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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향한 첫 걸음: 사랑의Y 노동형제단

기사승인 2025.01.17  02:4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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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주석, 시민사회운동의 길을 열다 (6)

▲ Y노동형제단 동양기계 소그룹 준비위원회 수련회

마산YMCA 간사로 일하기 시작한 황주석은 대중운동방식으로 노동운동에 접근하였다. 그는 소수운동가의 자기희생적 방식으로는 미래에 닥칠 노동자대중의 요구를 받아낼 수 없다고 보았다. ‘사랑의 Y노동형제단’(이하 Y노동형제단)은 이러한 판단의 실현이었다.

Y노동형제단이 시작된 1981년은 전두환 신군부의 철권통치에 짓눌렸던 암울한 시기였다. 노동자들의 삶 역시 정치적 상황과 다르지 않았다.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에 허덕였고 법으로 보장된 기본 권리조차 지켜지지 않았다. 대다수 사업장에는 노동조합이 없었고 그나마 조직된 노동조합은 소위 ‘어용노조’가 대부분이어서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속에서도 일각에서는 노동자들의 자발적이며 대중적인 조직을 탄생시키려는 노력들이 시도되었다. Y노동형제단도 이런 움직임의 일환이었다.

당시 마산에는 여성노동자 3만 명이 밀집된 수출자유지역과 1만5천 명의 한일합섬이 있었고, 인접한 창원에는 3만여 명의 남성노동자가 모인 공업단지가 있었다. 전국 어디와도 비교할 수 없는 남녀청년노동자들의 집결지였다. 그럼에도 이곳 역시 허울뿐인 노동조합이 일부 있었을 뿐 대부분 노조가 없었다. 80년 초 ‘서울의 봄’ 시기에 가톨릭노동청년회(JOC) 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동양기계(이후 통일중공업, 현 S&T중공업) 등 두 세군데 사업장에서 잠깐 파업투쟁이 있었으나 이 역시 전두환 집권 후 소리 소문 없이 사그라졌다. 이런 점에서 Y노동형제단이 출범되던 시기는 80년대 노동운동의 발아 직전, 그 에너지가 축적되던 시기였다.

사랑의 Y노동형제단 탄생

최초로 보인 Y노동형제단 모델은 1981년 1월부터 시작된 한일합섬 내의 산업체고등학교였던 한일여자실업고 학생들의 겨울독서토론이다. 여고였으나 연령은 대부분 20대 초중반이었다. 외출을 제한하는 규정이 기숙사에 있었지만 ‘YMCA’라는 공신력 때문에 외출이 가능했다. 독서토론 책으로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과 동학농민혁명을 다룬 유현종의 『들불』을 택했으며, 휴일에는 야유회를 가져 유대를 강화해나갔다. 프로그램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황주석 간사는 이 경험을 통해 노동청년들의 조직과 활동에 대한 가능성을 확인하고 이 모델을 다른 남녀사업장에 확대할 계획을 했다.

Y노동형제단 초대단장이었으며 87년 초부터 90년 말까지 마산YMCA 간사로 근무하기도 한 박성철은 Y노동형제단 출범과정과 활동 등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Y노동형제단은 1982년 초 마산YMCA정기총회 후 황주석 간사가 산업현장에서 모집된 현장노동자 20여명과 가진 즉석간담회에서 교양강좌프로그램을 제안하며 시작되었다. 강좌는 주2회 2개월 과정이었다. 교육과목은 회의진행법, 한자, 경제, 인간관계, 성과 결혼, 법률, 역사 등이었다. 출석률 80% 이상인 회원에게만 수료증을 교부했으며 수료한 회원들을 중심으로 후속모임을 조직하고 그들을 대상으로 YMCA 정회원 활동을 위한 교육프로그램을 시행하였다.

수료자들을 대상으로 시행한 YMCA 정회원 교육과정은 주1회 8주간 진행되었다. 교육내용은 YMCA와 사랑의Y노동형제 운동, 독서토론, 회의진행법, 대화법, 인간관계훈련, YMCA목적문 해설, 이웃 찾기의 이론과 실제, 한국사회의 이해, 정회원 문답 등이었다. 이 모든 과정을 마친 수료자는 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다하라는 의미로 ‘소금’을 먹은 뒤 ‘촛불‘을 손에 들고 인준을 받는 엄숙한 수료의식을 거쳐 Y노동형제단 회원이 되었다. 가톨릭의 대부제도를 본 뜬 형제회원 제도를 두어 특정선배회원과 후배회원이 밀접한 유대를 가지게도 했다. 이처럼 Y노동형제단은 황주석 간사가 구상한 교양강좌 후속모임이었기 때문에 교양강좌로부터 1년 여 후인 1983년경부터 본격적인 조직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처음 Y노동형제단을 구상하고 조직했던 황주석 간사는 1985년 YMCA간사논문으로 「노동청년 클럽활동에 관한 연구」를 제출했다. 이 논문에서 황주석은 Y노동형제단 창단은 ‘산업지역의 시 청년회가 노동청년활동을 현실적으로 진행시킬 수 있는 모델의 창출’이며 이를 통해 ‘노동운동에 기여’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YMCA가 노동운동체가 아닌 것임’을 명확히 함으로써 각종 프로그램을 통한 교육과 훈련을 목적으로 하되, 노동운동보다도 현장 지도력으로 성장시키고자 한 것에 방점을 정확히 두고 목적의식적으로 조직된 것이었다.

조직 및 운영 형태

▲ 1983년 하계수련회 (남해)

Y노동형제단은 시간여유가 많지 않았던 현장노동자들의 조직이었기 때문에 회원들이 쉽게 모일 수 있는 조직 단위여야 했고 정형화된 훈련 프로그램을 통해 짧은 시간에 성과를 내야만 했다. 이에 착안된 것이 각 사업장 별로 6명~12명 기준으로 클럽을 만들어 소그룹 활동을 하도록 했다. 12명을 넘으면 다시 6명 단위의 두 개 클럽으로 분할하여 새로운 조직을 만들었다. 단위조직 규모가 사업장별로 6~12명의 소그룹인 만큼 쉽게 모여 짧은 시간에 교육, 훈련 등 각종 프로그램을 소화할 수 있었고 소그룹이라 분화 속도도 빨랐다. 이 각각의 소그룹을 ‘개체클럽’이라 하였고, 각 개체클럽에는 단장, 부단장, 회계와 봉사부, 보건부, 교육부, 사귐부 4개 부서(이후 조직부가 추가된다)의 부서장 직책을 두어 회원 모두가 일정한 역할을 맡도록 하였다.

개체클럽의 모임은 ‘정기집회’라 하여 매주 1회 열렸으며 일정한 프로그램에 따라 훈련하도록 했다. 처음 2개월 8주간은 ‘양육기’라 하였고 그 후 10개월은 ‘자립기’라고 했다. 정기집회의 형식은 1부와 2부로 나누어 진행하였는데, 1부는 예배의 형식을 빌려 ‘사랑의Y노동형제 의식’이라 하여 3분 말하기, 1분 기원, 형제를 위한 기원 등 일정한 순서를 통해 말하기 훈련과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형제애를 기르는 훈련이 중심이었다. 회원들끼리 손을 잡고 마음을 정리하는 묵상으로 시작하여 다른 회원을 위해 준비한 100원 어치의 음식을 서로 나누는 애찬식과 회가를 부르며 폐회하기까지 모두 59분이라는 시간까지 세밀히 정해진 순서에 따라 진행되었다. 2부는 ‘부서별 모임’으로 각 부서장이 주관하였으며 첫째 주는 봉사부, 둘째 주는 교육부, 셋째 주는 사귐부, 넷째 주는 보건부 순서로 진행하였고 다섯째 주가 있으면 교육부가 추가되었다.

8주간의 양육기에는 회관에 모여 실무 지도력이 결합하여 모임을 원활하게 이끌 수 있도록 훈련을 받았지만 그 이후 자립기의 집회는 어디서든 자유롭게 모일 수 있도록 했다. 각 모임은 일정하게 짜여 진 훈련 프로그램에 의해 진행되었다.

개체클럽의 연합조직으로 ‘본부’라는 연합회를 두었고 연합회에도 단장, 부단장, 회계와 4개 부서를 두었다. 본부의 모임은 월1회 각 개체클럽의 임원과 부서장들이 모이는 ‘합동모임’을 개최하였다. 합동모임 훈련내용은 1부에서 클럽별 활동보고와 활동계획을 발표하게 함으로써 사업장별 연대의식을 함양하는 훈련내용을 배치하였고, 2부에서는 초청강연회, 발표회, 토론회 등의 프로그램으로 진행했다.

매년 2회(춘계, 추계) 수련회도 개최하였으며, 여름에는 1박2일의 야외 캠프를 진행하여 집단훈련을 통해 공동체의식과 토론 및 발표력을 기르는 훈련도 지속적으로 진행했다.

규모와 활동

▲ Y노동형제단 동명중공업 소모임

1985년 Y노동형제단은 7~8개 사업장에 개체클럽 11개였고, 회원 수는 82년 50명이었던 회원수가 83년 70명, 84년 60명, 85년 100명 정도였다. 애당초 계획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조직의 규모가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직형태를 갖춘 최초의 행사는 초기 교양강좌 수료생들을 중심으로 81년 12월 창원 북면 온천에서 수련회를 가진 후 82년 5월 준비위원회(위원장 김진필)를 구성하여 Y노동형제단 출범을 위한 정회원 훈련을 시행한 일이다. 이 과정을 거친 회원들을 사업장 별로 조직화한 작업이 점차 확대되어 83년부터 Y노동형제단 활동이 시작되었다.

문경범·서일미 등이 노력한 준비단계를 거쳐 1983년 1월 사랑의Y노동형제단(초대 단장 박성철)이 출범하게 된다. 이어 84년(2대 단장 문경범), 85년(3대 단장 조동현), 86년 (4대 단장 조철우)까지 약 4년간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86년 이후 활동이 중지되다시피 한다. 대표적인 사업장은 마산수출자유지역의 한국수미다전자 외 2~3개 사업장, 창원공단의 동양기계(통일중공업, 현 S&T중공업), 현대정공(현 현대로템), 대림자동차, 동명중공업 등을 포함 7~8개 사업장에 1~2개의 모임들이 활동하였다. 각 모임마다 사랑의Y노동형제단이라는 명칭 외에 동양기계의 ‘등대’처럼 제 이름(이삭, 에덴, 한얼1, 한얼2, 한얼3, 미리네, 금잔디, 디딤돌, 석류 등)을 갖고 있었다.

Y노동형제단 활동이 활발했던 시기는 창단 후 4~5년간이었다. 80년대 중반 이후 현장노동운동이 점점 고조되면서부터 Y노동형제단 활동은 점차 줄어들기 시작해 86년이 지난 뒤부터는 활동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현장노동운동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Y노동형제단에 다시 불을 붙인 것은 89년 1월 마산창원연합회를 창립하고 활동을 다시 재개하면서였다. 이 연합회의 회원들은 주로 87년부터 진행된 마산Y의 노동자배움터교실과 창원Y의 교양강좌를 수료한 수료생들 중 일부가 후속모임의 형태로 88~89년 경 새롭게 개체클럽들을 구성하여 조직된 모임이었다. 89년~90년 까지 1대(단장 김용만), 2대(단장 황호남), 3대(단장 박종근) 까지 임원을 구성하여 활동한 사랑의Y노동형제단 마창연합회는 8개의 개체모임으로 회원은 최소 42명에서 최대 80명을 오르내렸다. 회원들이 소속된 사업장은 마산수출자유지역과 창원공단의 총 25개 작업장으로 구성되었다. 이 시기의 개체모임 구성은 애당초 시도했던 사업장 내 소그룹 단위가 아니라 한 개체모임에 여러 사업장 노동자들이 혼재된 형태였다. 공개강좌 수료생들의 후속모임이었기 때문이다. 이 연합회는 이후 사랑의Y노동형제단의 명칭을 ‘Y노동형제단’으로 변경하였다.

그가 뿌린 씨앗이 열매를 맺다

▲ Y노동형제단 하계캠프(남해 송정)

1987년 들불처럼 타올랐던 6월 민주항쟁은 그간 독재권력 하에서 짓눌려 있던 노동자들의 폭발적인 투쟁을 불러왔다. 당시 마산, 창원의 경우만 해도 통일중공업, 한국중공업 등 이미 85년경부터 노조민주화 투쟁이 있었던 사업장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업장에는 노동조합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산에서 시작된 노동자 대투쟁의 물결은 바로 마창지역으로 옮겨 붙었다. 이때 각 사업장들마다 차이는 있었지만 각 투쟁현장에 Y노동형제단 회원들이 자연스럽게 결합되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85년부터 시작된 통일중공업 노조민주화 투쟁과 한국수미다전자 공청회 투쟁이었다. 마산수출자유지역의 한국수미다전자는 86년 서일미, 정두름, 이진선 등 Y노동형제단 회원들 중심으로 임금인상 공청회를 개최하려 했으나 미완으로 그치고 이들 모두 강제 사직을 당하거나 자진 사직하였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촉발된 이후에는 노동조합결성투쟁(현대정공, 현 로템), 노조민주화투쟁(기아기공, 동명중공업) 등에 Y노동형제단 회원들이 적극적으로 결합하였다. 특히 현대정공의 경우 노동조합 결성 이후에도 여러 명의 회원들이 임원이나 노동조합 위원장을 역임했다. 이 외에도 동명중공업이나 KTT, 한국일선 등에서도 Y노동형제단 회원들이 노조 임원이나 대표자 등으로 적극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사례를 보면, 통일중공업의 박성철(86년 구속 및 해고, 87년 3자개입관련 수배, 구속, 97년 국가보안법 구속), 조철우(노동조합 위원장), 안동락(노동조합 부위원장, 위원장 직무대행 등), 현대정공의 문경범(노동조합 창립 사무국장), 황호남(노동조합 위원장) 외 Y노동형제단 회원 2인의 노조위원장 활동, 동명중공업의 박명우(노동조합 위원장), KTT 박종근(노동조합 위원장) 등이며, 이 외에도 Y노동형제단 회원들의 수많은 활동이 있었다.

Y노동형제단은 YMCA에서 성장시킨 노동청년들을 노동현장의 지도력으로 만들어 내고자 했던 황주석 간사의 꿈이 담긴 결실이었다. 노동운동의 기초적인 교육과 활동, 활동가는 물론 이를 담아내고자 했던 공간조차 전무했던 마산·창원지역의 상황을 고려하면 성과와 무관하게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의미 있는 실천이었으며 선구자적 도전이었다. Y노동형제단 운동은 1987년부터 1993년까지 지속된 ‘마산YMCA 노동자배움터교실’과 이를 토대로 마창노련과 마산YMCA가 매년 공동으로 시행한 ‘노동자 여름캠프’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노동운동의 지도력이 발굴되었다.

Y노동형제단 운동은 전국YMCA로 확산되어 각 지역에 필요한 노동운동의 지도력을 배출했다. 이를 매개로 한국YMCA 내에 산업지역실무자모임이 만들어졌고 당시 지역YMCA를 끌어가던 중견 실무지도력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나아가 황주석은 Y노동형제단 모델을 주부들에게 적용, 주부모임 ‘등대’를 출범시켰다. 부천YMCA를 비롯해 안양, 마산 등 15개 지역YMCA에 ‘등대’가 활동했으며, 마산YMCA는 지금도 건재하다.

황주석 간사가 마산YMCA를 통해 탄생시킨 Y노동형제단 활동은 한국노동운동사에서 기억되어야할 획기적인 시도였고, 노동운동의 새 지평을 연 80년대 전 과정의 중심에 뚜렷이 그 족적을 남겼다. Y노동형제단에서 키워진 지도력들은 노동조합 결성과 현장 노동운동에 결합함으로써 노동운동의 저변을 지속적으로 넓혀나갔다.

허정도(전 한국YMCA전국연맹 이사장)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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