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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기사승인 2025.01.21  03:3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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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그리스도인인가?’ 5(요한복음 4:13-14)

▲ 자신의 근원적 결핍을 발견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Getty Images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3-14)

주일예배에 참여하신 한성교회 모든 성도님들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지금 여기 나 있는 곳에 함께 계신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크신 은혜와 평화, 가득 내려주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왜 그리스도인인가?’라는 주제로 말씀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다섯 번째 시간으로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겠습니다.

우리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고, 기억하셨으며, 또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주님의 그 사랑과 부르심에 응답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주님이 우리를 원해도 우리가 주님을 원하지 않으면, 주님과 우리 사이의 인격적 관계는 불가능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얼마든지 악을 선택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을 보장하십니다. 주님은 때로 우리의 악을 허용하시면서까지 우리의 자유를 보장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주님이 무능하게 보이기까지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 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저렇게 무능한 사람이 메시아일 리 없다고 항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가 예수님을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우리를 설득하는 최상의 방편입니다. 죄 없으신 이가 무참하게 살해당하셨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큰 죄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분이 아무런 저항 없이 고난을 달게 받음으로 우리의 죄악의 실상이 낱낱이 드러났습니다. 우리에게는 구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온천하에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자신을 노출시키면 예수님의 구원을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 스스로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우리 스스로 주님을 선택하길 오래참고 기다리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라는 물음에서 우리의 응답과 선택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분명 우리가 원해서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원해야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로, 원하지도 않는데 억지로 그리스도인이 된 것처럼 굽니다. 엄마에게 억지로 예배당에 끌려 나오는 청소년들처럼 굴 때가 있습니다. 물론 실제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딱히 원하는 것은 아닌데, 교회라도 다니지 않으면 왠지 불안하고, 나쁜 일이 생기지 않을까 싶어,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딱히 원하는 것은 아닌데, 교회라도 다니면 혹시라도 내 오랜 소원이 이뤄지지 않을까 싶어, 그리스도인 흉내를 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원하면서도 억지로 그리스도인이 된 것처럼 굴 때도 분명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원하면서도 그리스도와 어울리지 않는 생각을 고수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원하면서도 그리스도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반복할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선 우리가 얼마나 간절히 그리스도를 원하는지 잘 못 알아차려서 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그렇게 자명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도대체 왜 원하는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분명, 이 세상의 것으로는 도저히 해갈 수 없는 근원적 목마름이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 채울 수 있는 근원적 결핍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근원적 목마름을 잘 못 알아차립니다. 이 근원적 목마름을 육신의 욕구나 세속적 욕망과 혼동하기 일쑤입니다. 마치 본문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여인처럼 말입니다.

본문의 사마리아 여인은 요한복음 4장 6절에 의하면, 남들은 다 기피하는 시간, 햇살이 가장 따가운 정오에 물을 길러 왔습니다. 주변의 시선을 피하고 싶을 만큼 그녀가 지금 깊은 수치감과 좌절과 무기력에 빠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면에는 ‘나 같은 사람이 뭘 원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절망적 인식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이런 그녀에게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주님은 때로 우리의 좌절의 틈을 뚫고 오십니다. 주님에게 좌절은 참된 소망과 참된 만족으로 가기 위한 기회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 청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께서 유대인이라는 사실에 내심 많이 놀랐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을 극도로 혐오했으니 그럴 법도 합니다. 그녀는, 예수께서 자신에게 물을 달라 청하는 것이 이상하고 묘하게만 느껴졌을 것입니다.

나도 지금 내가 밉고 실망스러운 상황인데, 나를 혐오해야 할 유대인이 오히려 나에게 뭔가를 요구하니 있으니 말입니다. 심지어, 오래된 관습에 의하면, 우물가에서 물을 달라 요구하는 것은 일종의 구애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습니다. ‘나도 날 원하지 않는데 이분은 도대체 왜 날 원하는 것일까?’, 의문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영문을 물었습니다. 4장 9절입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여인의 물음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4장 10절입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니라.” 여인은 예수님의 대답의 의미를 아직 깨닫지 못해서 되물었습니다. 4장 11절입니다.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4장 13-14절입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의 이런 말씀의 의도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그동안 여인은,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살아왔을 것입니다. 뭔가 원하는 게 있으면 이 세상에서 그것을 찾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이 순간, 그녀는 아무리 많은 물을 구하고 마셔도 해갈될 수 없는 근원적 목마름이 자신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자각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으로는 채울 수 없는 근원적 갈망이 자신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자각했을 것입니다.

그동안 그녀는 남편만 잘 만나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살아왔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 이야기를 듣고선 여인은 그 물을 달라 청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여인에게 남편을 불러 오라 명하셨습니다. 여인은 남편이 없다고 말합니다. 알고보니 이 여인은 다섯 번의 이혼에, 여섯 번째 이혼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여섯은 불완전수를 상징합니다. 이제까지 여인이 의지했던 모든 대상은 그녀에게 절망감만 안겨주었던 불완전한 대상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그녀는 이 세상의 남편으로는 해갈할 수 없는 근원적 목마름이 자신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마름을 해갈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자각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근원적 목마름과 그밖의 다른 욕구나 욕망을 혼동하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욕구나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만 주로 관심을 기울일 뿐 그것을 직시하고 성찰하고 분별하고 조절하는 데는 무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욕구나 욕망은 무조건적 충족의 대상이 아니라 직시와 성찰과 분별과 조절의 대상입니다. 우리는 욕구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 자체를 행복이라고 가정하기 쉽습니다. 이 가정이 일면 맞기도 합니다.

뇌과학에서는 흔히, 우리가 생리적 욕구나 육신의 생존에 직결된 일차적 욕구, 예를 들면, 먹고 번식하고 권력을 쌓고 주변 환경에 대한 정보를 획득하고 그 과정에 쓰이는 에너지를 최소화하려는 욕구 등을 충족시키면, 그 보상으로 뇌에서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이 분비되는데, 이 도파민이 쾌락과 즐거움을 가져다 준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배고플 때 밥을 먹으면, 그저 배만 부른 게 아니라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도피민을 보상으로 지급받는 욕구들이 ‘더 많이’의 법칙에 사로잡히기 쉽다는 점에 있습니다. 프레데릭 르누아르가 “욕망의 철학”에서 이점을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식욕과 관련해 우리가 추구하는 것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음식에 대한 욕구는 항상 더 많은 음식으로, 더 많은 음식 대한 욕구는 항상 더 맛있는 음식에 대한 욕구로, 더 맛있는 음식에 대한 욕구는 항상 더 고급지고 더 비싼 음식에 대한 욕구로 끊임없이 강화되고 확장됩니다.

권력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적 인정에 대한 욕구가 사회적 지위에 대한 욕구로, 사회적 지위에 대한 욕구가 사회적 지배에 대한 욕구로 끊임없이 강화되고 확장됩니다. 이렇게 ‘더 많이’의 법칙에 붙잡히면, 욕구 충족은 행복이 아니라 불만과 불안을 가중시킬 뿐입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육신의 생존과 직결된 이런 일차적 욕구들은 비교의 법칙에도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더 많이’를 추구하는 성향은 대개 남보다 ‘더 많이’로 귀결됩니다. 남보다 더 많이 갖고, 남보다 더 나은 것을 갖으면 된다는 식입니다. 남보다 우월하면 되고, 남보다 높아지면 된다는 식입니다.

물론 우리가 모든 사람들과 자기를 비교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개는 가까운 주변 사람들과 비교하지요. 가까운 주변 사람보다 나으면 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나보다 나은 사람들이 무수히 많고, 그들은 언제라도 내 주변을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비교의 법칙에 사로잡히면, 우리의 욕구는 행복이 아니라 좌절과 불안을 가져다 줍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육신의 생존과 직결된 일차적 욕구는 즉각적 만족의 법칙에도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바로 지금, 바로 당장 욕구를 채우지 않으면 큰 일 나는 것처럼 구는 성향을 말합니다. 시간과 과정과 노력을 요구하는 만족은 피하고 즉각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성향을 말합니다.

즉각적 만족의 법칙에 사로잡히면 타인의 욕구는 안중에도 없는 자기중심적 사고와 행동을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즉각적 만족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비윤리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할 위험성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즉각적 만족의 법칙에 사로잡히면, 우리의 욕구는 행복이 아니라 갈등과 타락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므로 다시 강조하지만, 우리의 갖가지 욕구는 충족 만큼이나 직시와 성찰과 분별이 중요합니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또, 욕구의 대상과 욕구 그 자체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식욕에서, 식욕의 대상인 음식과, 먹고자 하는 욕구 그 자체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분리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욕구는 탐욕과 집착으로 뒤바뀔 수 있습니다.

돈을 예로 들어 볼까요? 우리는 돈을 원합니다. 그게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 주고, 행복을 가져다 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돈은 욕구의 대상이지, 욕구 그 자체가 아닙니다. 여기에서 욕구 그 자체는 안전에 대한 욕구, 행복에 대한 욕구입니다. 이것을 분별하고 분리시키면, 안전에 대한 욕구와 행복한 대한 욕구를 다른 대상들을 통해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분별하고 분리시키지 않으면, 불안할수록, 불만족스러울수록 돈에만 신경을 쓰고, 그러다 돈에 집착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놓쳐선 안 되는 진실은 욕구의 대상과 욕구 그 자체를 연결시키는 게 바로 생각이나 신념이라는 사실입니다. ‘돈이 많아야 행복하다’, 이 생각이 돈이라는 욕구의 대상과 행복하고자 하는 욕구 그 자체를 하나로 결합시키고 있음을 보십시오. 우리가 고수하고 있는 수많은 생각들은 대개 욕구의 대상과 욕구 그 자체를 동일시하는 데 쓰이는 생각들입니다.

여기에서 문제는, 우리가 우리의 모든 욕구를 이 세상에 속한 것들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성향 때문에 이 세상에 속한 것으로는 도저히 채울 수 없는 근원적 목마름이 자꾸 은폐되고 가려진다는 데 있습니다. 근원적 목마름을 해갈하기 전까지 우리는 세속적 대상에 고착된 세속적 욕망에 매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의 욕망은 우리 삶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면, 이 세상에 속한 것들과 동일시된 욕구들은 탐욕으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예를 들면, 식욕은 탐식으로, 성욕은 정욕으로, 권력욕은 교만으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이런 탐욕들은 그리스도를 향한 갈망에 장애를 일으킵니다. 우리가 앞서 제기한 질문을 다시 떠올려 보십시오. 그리스도를 원하면서도 억지로 그리스도인이 된 것처럼 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원하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에 반하는 욕망, 곧 자기중심적 탐욕도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조절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조절한다는 것은 억압하거나 통제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추구한다는 것도 물론 아닙니다. 조절한다는 것은 방향을 바꿔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이 그간 집착해왔던 세속적 욕망의 대상들로부터 그녀를 분리시키셨습니다. 근원적 목마름이 있음을 자각하게 하셨습니다. 근원적 목마름을 자각하면서 그녀는 뜬금없이 예배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듭니다. 4장 20절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근원적 목마름은 초월적 세계에 대한 관심과 지향,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성향, 공동체적 관계에 대한 욕구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예배 이야기를 떠올린 것입니다. 예배는 유한한 세계에서 무한한 세계로의 주의 전환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예배 이야기를 꺼낸 그녀에게 예수님은 어떤 말씀을 주셨습니까? 4장 21절입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예배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임을 밝히신 것입니다. 나를 얽어매는 모든 세속의 대상들로부터 시선을 거두어 하나님을 대상으로 그 시선을 집중하는 것이 예배임을 밝히신 것입니다. 욕망을 조절한다는 것은 모든 욕망의 방향을, 그 대상을 하나님께로 끊임없이 전환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또 이렇게 덧붙여 말씀하셨습니다. 4장 23절입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우리 안에 육신의 생존을 초월하게 하는 영적 지향이 있는데, 그 지향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곧 예배라는 말씀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말씀, 곧 진리에 순응하는 것이 곧 예배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입각에 이 세상과, 이전의 욕망의 대상과 다시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 곧 예배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의 갖가지 욕망을 우리의 삶에 긍정적인 방향으로 조절하는 최적의 방법은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욕망의 대상들에 집착하고 그것들을 숭배해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그 욕망의 대상들로부터 분리시키시고 하나님을 예배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그 욕망의 대상들로부터 자유케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욕망이 문제가 아닙니다. 욕망에 대한 무분별이 문제입니다. 욕망을 조절하지 않고 충족시키려고만 드는 게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무분별하고 무절제한 욕망 때문에 괴로워하고 망해가는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욕망하는 존재를 넘어서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존재로 이끄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존재로 부름받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원하는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살기 위한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욕망은 결국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삶으로 이끌기 위한 방편입니다.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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