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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숙경, 훈춘애국부인회 창립하다

기사승인 2020.08.22  17:5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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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천 독립투사 황병길의 가족들 (3)

▲ 대한애국부인회 ⓒ항일역사영상재단 영상 캡쳐

잊혀진 독립투사 황병길의 아내이자, 또 한 명의 독립투사였던 김숙경은 20세기 초 간도 일대에서 일제 침략에 저항하는 독립운동의 불길이 요원처럼 타오를 때 여성들을 계몽하면서 독립투쟁의 불길 속에 뛰어 들었다. 그는 <훈춘애국부인회>를 설립한 항일 독립 운동가이며 여성교육을 주장하며 미신과 구습타파에 앞장 선 계몽활동가였다.

가난한 소작농의 가정에서 태어나다

가난을 이기지 못하고 연해주로 이사를 가게 된 그의 부모는 떠나기 전에, 어린 딸을 이웃집 12세 소년, 황병길과 약혼을 시켰다. 그는 13세에 결혼식을 올리고 남편을 따라서 남의 집 사랑방에 새 살림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남편이 그의 나이에 15세 되는 해에 일거리를 찾아 집을 떠났기 때문에 20세 될 때까지 시아버지를 모시고 홀로 살아야 했다.

그러나 오매불망 기다리던 남편이 1905년에 다녀가고 난 뒤에, 임신한 몸으로 일본 경찰에게 구타를 당하였으며 아기를 낳은 후에도 다시 잡혀가서 시아버지와 함께 조사 받으며 구타를 당하였다. 그런 중에 첫 아이가 굶주려서 영양실조로 죽었다. 1906년 그는 남편에 보내온 사람들을 따라서 연해주 연추로 이주하였다. 1907년 맏딸 황정선을 낳았으며 남편의 권고로 한글을 익히며 한문 공부도 겸하였다. 그는 독립운동의 열기가 고조된 연추의 조선인 사회에 살면서 독립운동가의 아내로 살기로 결심을 하였고 틈틈이 신문과 책을 읽으며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08년 연해주는 조선독립 전쟁에 참전하는 의병들의 사기가 하늘을 찔렀으나 회령전투의 패배와 러시아정부의 탄압으로 독립운동가들이 연해주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직면하였다. 이때 황병길은 자주 훈춘으로 나와서 활동하다가 1909년에 오병묵과 함께 훈춘성내교회를 시작하였고(1) 1910년 2월(음력)에는 가족과 오병묵을 비롯한 동지들과 함께 연추에서 가까운 양포 연통라자 서골로 이주해서 새로운 독립운동의 터를 닦기 시작하였다.

귀틀집을 짓고 황무지를 일군 후에 남편이 훌쩍 떠나고 그는 혼자서 둘째딸 정신을 낳았다. 그러나 남편을 대신하여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고 찾아오는 독립운동가들의 숙식을 위해서 몸을 풀고 누울 여가도 없이 나물을 뜯으며 밭농사를 지어야 했다.

그는 남편이 복음전파와 교회설립, 사립학교 설립을 위해 훈춘현을 순회할 때 동행하며 지지발언을 하였고 한편으로는 서골에서 가까운 하다문과 마적달 등지를 돌면서 여성들에게 신식교육의 장점과 필요성을 선전하였다. 몇 년 사이에 연통라자 서골, 하다문, 마천자 전선촌 등지 교회와 학교가 연이어 세워졌는데 이에 그의 공로를 부인할 수 없다.(2)

김숙경, 1인 5역을 감당하는 벅찬 삶을 살다

1919년 용정 서전대야에서 있었던 <3∙13 만세시위>와 3월 20일에 있었던 <훈춘 만세시위>는 그의 항일의식을 고양시켰다. 그는 훈춘에서 만세시위가 끝난 후에 여성 동지들과 함께 사타자, 구사평, 투도구 등지를 돌면서 항일연설로 많은 사람들의 심장을 울렸다. 3월 28일부터 4월 1일 사이에 위 지역에서 있었던 만세시위에 수천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참여하였는데 구사평 시위의 참가자는 4,000여 명에 이르렀다.(3)

그는 훈춘의 만세시위에서 맛본 감동과 민초들의 위력을 되새기면서 남편이 오랫동안 이끌어 온 <기독교우회>가 <훈춘한민회>로 재조직 되어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것에 영감을 얻어서 여성 독립운동단체를 창립할 생각을 하였다.

훈춘한민회 회장 이명순과 황병길은 그의 의견을 환영하였다. 마침내 1919년 9월 29일, 훈춘현 여성대표 200여명이 모여서 훈춘현성의 박봉식 집에 모여 <훈춘애국부인회> 창립대회를 가졌다. <훈춘애국부인회>의 취지는 여성들이 단합하여 독립무장투쟁을 지원하고 여성교육과 여권확립을 도모하며 군인부상자들을 간호하는 것이었다. 그는 대회에서 부회장으로 선출되어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으며, 남편의 사후에도 좌절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자기의 직무를 투철하게 감당하였다.(4)

모금·공급·책임

그는 남녀평등을 제창하였으며, 여성들에게 독립운동 참여와 관심을 촉구하였고, 문맹인 여성들을 위해 야학교를 열었으며, 때로는 남편의 소식을 이동휘와 오병묵에게 전해주고 그쪽의 소식을 남편에게 전하는 연락원이 일까지 맡았다. 그는 애국부인회 조직과 활동에 두각을 드러냈으며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1920년 4월 중순(음력) 남편을 따라갔던 충견이 갑자기 집 앞에서 낑낑거리는 소리를 듣고 개의 목줄에 끼어있는 편지를 찾아서 읽었다. 편지에는 남편의 병이 위독하므로 마적달 뒤골 박씨 집으로 속히 오라는 사연이 적혀 있었다. 남편이 살아 있길 기도하며 그가 처소에 도착했을 때 남편의 몸은 불덩이처럼 타고 있었다.

남편은 작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일본군의 불의의 습격을 당하였고 산길로 숨어서 달리는 중에 어둠 속에서 부상을 입은데다가 밤새도록 비를 맞아서 급성폐렴에 걸려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두려움 없이 전쟁터에 뛰어들었던 황병길은 죽음을 예감하고 아내의 손을 잡고 그의 모든 노고에 대한 치하와 감사를 하였다. 그리고 “애들을 잘 키워서 나라를 위해 힘쓰게 해주오.”라는 유언과 함께 3호 권총(미주 5) 한 자루를 10년 후에 아들 정해에게 주라며 그의 손에 쥐어 주었다.

남편이 세상을 뜬 후에도 민족의식을 일깨우며 항일교육을 주제로 강연하다

1920년 10월 일제 토벌대가 연통라자에 쳐들어왔다. 일제는 황병길의 <단지동맹>의 유물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고 찾지 못하자 그의 묘까지 파헤쳤다.

아무 것도 찾지 못한 토벌대는 분풀이로 붙잡아 온 10여명의 사람들을 빈 건물에 몰아넣고 방화를 하려고 하였다. 그 때 그는 “저 사람들은 무고한 군중들이다. 죄가 있다면 나에게 있으니 전부 풀어놔라!”고 고함을 질렀다. 토벌대는 그들을 풀어주고 김숙경을 마적달 아래 마을까지 끌고 갔다.

36명의 끌려온 사람들은 자기가 묻힐 구덩이를 파고 체념하고 구덩이 앞에 섰는데 기관총 방아쇠가 당겨질 찰나에 <토벌대>의 한 장교가 소리치며 달려왔고 그의 지시에 따라 <토벌대>는 잡혀 온 모든 사람들을 풀어주었다. 그는 순간, 몸을 가누지 못하고 의식을 잃고 쓰러졌는데 마침 그 마을에는 황병길을 잘 아는 중국인들이 있어서 그들이 소문을 듣고 찾아와서 그를 데려다 보살폈다.

어느 정도 건강이 회복되었을 때, 그들은 그를 마차에 태워 서골까지 데려다 주었다. 17일 만에 돌아온 김숙경과 그를 백방으로 찾아다녔던 자녀들은 서로 붙들고 통곡하였다. 그는 자신의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고 큰 딸을 1924년에 대황구의 독립운동가인 김규봉과 둘째딸을 1927년에 양포의 리주옥과 결혼시켰다.(6) 그는 <경신대참변>으로 사립학교들이 줄줄이 폐교를 당하자 막내딸 정일이를 직접 가르쳤다. 그리고 그는 남편의 유지대로 바르게 성장한 아들에게 남편의 유물인 3호 싸창(권총)을 자기 손으로 건네줄 날을 기다리며 자기에게 주어진 가족 부양과 애국부인회 일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1927년 음력 7월 27일, 심신이 쇠약해진 그는 식중독(중풍이라는 설도 있음)으로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의식이 돌아왔지만 그는 말을 하지 못하였다. 남편의 <단지동맹> 유품을 간직하고 있었던 그는 말 한 마디 하지 못하고 4일 동안 모진 고통에 시달리다가 42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빈농의 딸로 태어나서 크리스천인 남편을 따라 크리스천이 되었으며(7), 신교육운동가인 남편을 따라 신교육운동가가 되었으며, 문화계몽운동을 펼치는 남편을 따라 여성 사회활동가가 되었다. 그는 조선독립을 간절히 원하는 마음으로 여성 회원으로 구성되는 <훈춘애국부인회>를 창립하여 훈춘현의 여성들을 독립운동의 전면으로 끌어내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위대한 여성 독립투사가 되었다.

그는 독립운동가로 활동을 하면서 시아버지를 모시고 생계를 책임졌으며 남편 사후에도 한결 같은 자세로 독립운동에 몸담았으며 남편의 유지대로 자녀들 모두가 독립운동에의 길로 나아가도록 지도한 위대한 신앙의 어머니였다.

미주

(미주 1) 리광인은, 『겨레 항일지사들 3』, 45쪽.
(미주 2) 같은 책, 46쪽.
(미주 3) 같은 책 48쪽.
(미주 4) 3호 싸창 - 권총의 한 종류 
(미주 5) 리광인은 저, ⌜겨레 항일지사들 3⌟, 52쪽; 주영돈·한상호, 『중국동북조선족녀성과 항일투쟁』, 158쪽.
(미주 6) 당시 국내에서 우후죽순으로 만들어진 <애국부인회>는 대부분 장로교와 감리교 교단의 배경 아래서 여성들이 주도하여 만들었다. <훈춘애국부인회>에 대한 기록에 교회여성들이 만들었다는 언급은 없지만 <기독교우회>에서 함께 활동한 이명순과 황병길의 적극 지원으로 애국부인회를 만들 수 있는 여성들은 당시 캐나다장로교회에 속한 여성들로 유추할 수 있다.
(미주 7) 일본제국주의가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을 세우고 연변 조선인독립군부대를 토벌하기 위한 빌미를 만들기 위하여 중국 비적 떼들로 하여금 9월 12일, 9월 30일, 10월 2일에 3차례 걸쳐서 훈춘 상부지와 일본영사관을 침공하여 약탈, 방화하며 일본인들을 살해하며 납치하도록 획책한 사건.

이이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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