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크리스천 독립투사 황병길과 그의 가족의 위대한 정신

기사승인 2020.09.12  16:13:26

공유
default_news_ad1

- 크리스천 독립투사 황병길의 가족들 (5)

독립투사 황병길과 그의 가족은 한국의 독립운동사에 아주 특별한 존재들이다. 부모세대와 자녀세대가 서로 다른 시대적 배경 속에서 서로 다른 의식과 사상을 가지고 각자의 자리에서 충실하게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한 마디로 쉽게 말하자면 부모세대는 민족주의 계열에 속한 투사들이었고 자녀세대는 사회주의 진영에 속한 투사들이었다.

우리 독립운동사에는 양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벌인 암투와 경쟁으로 일어난 부끄러운 사건들이 많지만 황병길의 가족은 조국의 독립 앞에서 사상 문제로 분열되지 않았다. 아버지 황병길과 어머니 김숙경은 크리스천으로서 계몽운동에 참여하며 민족교육을 통해 항일운동을 전개한 독립투사로서 치열하게 살았다. 그러나 그의 자녀들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사회주의계열의 독립투사로서 더 뜨겁고 치열하게 살았다.

황병길과 그의 가족은 마치 독립운동의 제단에 자신들의 피를 붓기 위하여 태어난 사람처럼 소명의식을 가지고 뚜벅뚜벅 제단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아낌없이 자신들의 피를 쏟아 부었다. 그들의 순수하고 의롭고 뜨거운 희생은 십자가상의 예수 그리스도를 연상시킨다. 아름다운 항일투사 황병길과 김숙경 그리고 4자녀에게 발견되는 위대한 정신이 있다.

첫째는 모두가 독립운동을 자신들의 삶의 목표와 과제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서로 다른 시대에 활동했지만, 자기들의 시대적 사명을 알았으며 그 시대의 흐름에 적당히 안주하며 좌고우면하지 않았고 시대가 주는 아픔을 통째로 끌어안고 살며 끝내는 독립운동의 제단에 자신들의 피를 쏟아 부었다. 여섯 분 모두가 독립운동이라는 과녁에 자신들의 삶이라는 화살을 쏘았다.

둘째는 모두가 <대한독립>이라는 민족의 꿈과 희망을 성취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생명을 초개처럼 여겼다는 것이다. 황병길은 36세, 김숙경은 42세, 황정신은 24세, 황정해는 23세에 사망하였다. 맏딸 황정선은 남편이 <반민생단사건>으로 억울한 죽음을 당한 후, 일군에게 잡혀서 고초를 당하였고 탈출한 후에는 관내로 피신하였다. 해방이 되자 그는 조선으로 들어갔으나 연락이 끊겼다고 한다. 셋째 딸 황정일은 80여세까지 장수를 누렸다고 하지만 그는 20세 청춘에 항일연군 소속인 남편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잃는 고통을 고스란히 안고 살았으며 해방 이후에 동녕현에서 위만군들에게 포로로 잡힌 일로 인하여 명예가 회복될 때 까지 당적과 군적을 잃어버린 채 백의종군하는 삶을 살았다. 황병길과 그의 가족의 삶은 실로 개인의 행복이나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것에 있지 않았고 주권을 잃어버린 나라와 민족을 회복하는 대의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셋째는 그들은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자리나 지위, 명예나 권력에 연연하지 않았다. 황병길은 자신이 이끌어 온 <기독교우회>를 근간으로 해서 <훈춘한민회>를 만들 때 이명순에게 회장직을 양보하고 자신은 사교부장의 직분을 맡았다. 김숙경은 자신이 제안해서 만든 <훈춘애국부인회> 창립 시 주신덕에게 회장 자리를 양보하였다. 황정선은 자신에게 영국 유학의 기회가 주어졌지만 어머니의 권고를 받고 과감히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아동들을 위한 소학교를 열었다.

황정신은 17세에 결혼하였으나 20세에 중공공산당에 가입하였고 1932년 12월 연통라자에 소비에트정부(노농병대표대회)가 세워질 때 서골 소비에트정부의 부녀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기혼자로서 자기에 정황에 맞는 일에만 우선적으로 종사할 수 있었으나 군복제작, 위문활동, 무장투쟁 등 주어지는 일들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종족이 다른 만족 출신의 투사와도 호흡을 잘 맞추었다.

황정해는 1938년 5월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사령부 기관총반(특무조)의 반장이 되었으나 1940년 여름, 기관총반이 기관총패로 개편됨에 따라 다시 패장(소대장)으로 강등 되었을 때 대범하게 수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반민생단사건>으로 시끄러운 동만항일연군 상황에서 그는 중국인 상관인 위증민의 치료와 안전을 위해 모든 고난을 묵묵히 감수한 끝에 장렬하게 죽음을 맞이하였다. 황정일은 1935년 동녕현에서 활동하던 중, 적들에게 체포되었고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1948년에 무고를 당하여 당적과 군적을 고수란히 잃었다. 1987년 1월에야 <역사문제>가 해결되어 자신의 억울함이 밝혀질 때 까지 그는 조용히 백의종군하는 삶을 살았다.

넷째는 그들 모두가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날 존재이지만 그들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크리스천 황병길과 김숙경은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이 최고로 꽃 피었을 때 활동하였던 분들이었으므로 그 분들 사후에 연변일대가 사회주의에로 전향하는 사상적 대 변동을 겪으면서 자연스럽게 잊히어진 존재가 된 것으로 보인다.

황정선, 황정신, 황정해는 중국공산당의 지도하에 항일유격대, 동북인민혁명군, 동북인민항일연군으로서 항일투쟁 끝에 일찍이 순국하거나 투쟁으로 인한 고난을 겪는 중에 사망하였으므로 본인들이 자전적인 기록을 남길 수 없었다. 그리고 당시 일제의 식민지 위만국의 통치하에서 투쟁을 기록하는 일은 첩자로 오해 받을 여지가 있었으며, 오해를 받지 않는다 할지라도 기록을 적에게 들키거나 분실하게 되면 도리어 적군에게 아군의 사정을 알려주게 되어 엄청난 피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므로 누구도 쉽게 기록을 남길 수 없었을 것이다.

해방 이후, 가족들의 독립투쟁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사람은 막내딸 황정일 이었는데 그는 <역사 문제>로 당적과 군적을 잃었으므로 마음 편하게 저술 작업에 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세 그룹의 사학자들이 늦게나마 그와 인터뷰를 하여 자료를 남기었으므로 부족하지만 황병길과 그의 가족에 대한 글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연변에서 나온 대부분의 그들이 황병길과 김숙경의 삶의 핵심인 것으로 보이는 기독교 신앙을 제거해 버렸다. 머지않은 시일 내에 그들에게 덧칠해진 사상과 이념의 무거운 껍데기가 벗겨지고 진짜 피와 살을 가진 그 분들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쏟아져 나와 우리를 당시 간도와 연해주의 독립운동의 장으로 이끌어 주기를 기대해 본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을 그대로 이어받아 민족적인 수난과 고통을 운명처럼 감당해낸 불굴의 항일투사 황정선, 황정신, 황정일, 황정해의 마음을 품는다. 크리스천 독립투사 황병길의 가족은 실로 한국독립운동사에서 보기 드물게 온 가족이 혼연일체가 되어 독립운동에 투신한 성스런 <항일독립운동가정>이다.

황병길 의사 서거 100주년을 기념하며 부모와 자녀, 두 세대가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로서 망국의 시대를 살아낸 <황병길과 그의 가족>이 민족의 가슴에서 힘차게 부활하여 한반도에 변화의 불길이 일어나게 되길 빈다.

이이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