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3.1운동 정신과 한반도의 제 종교

기사승인 2019.01.19  19:14:21

공유
default_news_ad1

- 3.1운동 정신의 통합학문적 이해와 기독교 신앙의 미래 2

1. 서학(西學, 기독교)과 만나는 유교

▲ 성호 이익(星湖 李瀷) 선생 초상화 ⓒGetty Image

18세기 조선의 실학자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은 당시 중국 주자학적 성리학에 실체론적으로 빠져서 고사하고 있던 조선 유교사회의 정신적 정황에 대해서 “학자들은 입만 열면 성선(性善)을 말하고 말만 하면 반드시 정자(程子), 주자(朱子)를 일컬으나, 재주가 높은 자는 훈고에 빠지고 지혜가 낮은 자는 명예와 이욕에 떨어지고 있었다”고 비판하였다.(미주 1) 이 비판에서 잘 지적하고 있듯이 그때까지 조선사회를 이끌어왔던 정신적 지주였던 유교는 당시 이웃의 강대국 중국과 그 정신세계에 깊이 종속되어서 뼛속까지 사대주의적 모화사상에 물들어 있었다. 아니면 그들이 가장 많이 말하는 것이 돈과 이름(名利)을 떠난 성학(聖學)이었지만 양반계급의 서민착취와 가렴주구는 한계를 몰랐다. 그래서 조선사회는 부패한 보수주의와 우물 안 개구리식의 허욕에 빠져서 세상이 어떻게 바뀌어 가는지를 잘 알아채지 못했고, 그래서 급기야는 나라 전체가 큰 존재의 위기에 빠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가운데서도 일련의 유자 그룹들은 세상과 이웃나라들의 변화를 감지하면서 자신들의 오래된 가치체계인 유교적 세계관을 그들이 새롭게 만난 낯선 타자와 연결시켜 보면서 개혁의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 시기에 이들에게 다가온 낯선 타자는 주로 이웃 청나라를 통해서 온 서학(西學)이었는데 이 만남에서 유자들은 자기인식을 새롭게 하고 자신들 학의 본원을 다시 정립하려는 노력으로 맞섰고, 이 일의 맨 선두에 선 사람이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이었다. 성호는 그 서학에 대해서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먼 곳까지 와서 전하려 하는 서양 전교자들을 자신들 유학자와 동일한 목표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인정한다. 즉 ‘사사로움’(私)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로서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을 구제하려 한다’는 것이다.(2)

하지만 그 제자들 중에 신후담(愼後聃, 1702-1761)이나 안정복(安鼎福, 1712-1791) 같은 사람은 스승이 강조하는 서학의 실용적 차원을 넘어서 서학으로 전해진 천주교와 자신들 성리학을 그 근본 원리와 교리의 차원에서 점검하고자 했다. 이들에 따르면 인간의 도덕심과 윤리적인 실천의 동기가 서학에서 말하듯이 천당에 가거나 불멸을 위한 것이라면 이것은 지극히 이기적이고, 사적인 이익(利) 추구의 행위와 다름없다고 비판한다. 그와는 달리 자신들 유학의 성리(性理) 이해와 心 이해에 따르면 인간은 궁극적으로 氣로 구성된 존재라서 몸의 죽음과 더불어 그 기가 흩어지는 것은 당연하고, 선한 행위라는 것도 본성의 理를 따르는 행위이지 결코 화복(禍福)이나 내세의 이익을 구하는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서양의 천주학은 모든 것이 사적인 이익을 위한 추구이며 그런 동기에서 ‘천주’(天主)의 존재도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특히 안정복에 따르면 자신들의 유학이야말로 진정한 “천학”(天學)인바, “상제”(上帝)라는 말도 “우리 유자가 이미 말하였”고, 현세를 배척하고 내세의 복이나 이익을 위해서 천주를 믿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상제가 부여한 천명(天命)을 따라서 그 마음을 보존하고 성품을 기르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학이야말로 진정한 “천학”이라고 역설한다.(3)

이상에서처럼 유교는 불교와의 만남에서도 그렇고 낯선 서학과의 만남에서도 그 궁극적인 평가 잣대를 ‘公’(공공성)인가 아니면 ‘私/利’의 추구인가 라는 물음에 두었다. 성호 자신도 서학을 그들이 ‘세상을 구제하려 한다’라는 말로 공공성에 기초해서 평가했다. 그러나 모두가 주지하는 대로 이 유교적 공공(公共)의 관심이 조선 말기로 오면서 고사하고 왜곡되면서 나라는 큰 위기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위기를 단지 수동적으로만 견딘 것이 아니라 다시 그에 대한 여러 방식의 대응을 보이는데, 심지어는 나라를 고사시킨 주범으로 비판받아온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의 대응도 사실 유교적 公과 의리(義理)의 원리를 다시 강하게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3.1운동 이전의 강력한 ‘의병운동’이 파생되고 주도되었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의병이란 것은 민군(民軍)이다.” 그것은 나라가 위급할 때 “義로써 분기하”는 사람들인데, 이 의병의 전통은 우리 민족에게 오래된 전통이고, 일본이 대한제국을 합병하기 까지 2개 사단의 병력을 출동하여 7, 8년간 전쟁을 한 것도 의병의 저항이 있었기 때문이고, 만약 이 의병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짐승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4) 보통 우리가 쉽게 말하기를 조선 말기의 유교 폐쇄성과 사대주의적 경직성이 결국 나라를 잃게 했다고 하고, 또 3.1운동 당시 33인의 대표 중에 유교측이 부재했던 것을 비난한다.

하지만 유교의 역할을 그것에 한정해서 보는 것은 온당치 않고, 예를 들어 유림 의병과 애국계몽 세력을 크게 연합하여 활동한 의암 유인석(毅庵 柳麟錫, 1842-1915)의 아래와 같은 언술에서도 분명히 드러나듯이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다시 ‘규준’과 ‘근본’(理)을 세우는 일을 중시하면서 그것을 구체적 의병과 독립운동으로 실천한 일에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그 유교의 의식이 이후 전개될 모든 독립항쟁 운동의 밑받침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박은식도 “의병이란 것은 독립운동의 도화선이다”라고 하면서 그 의병운동의 성패에만 매달려서 논평한다면 “식견이 천박한 것”이라고 논했다.(5) 그 의병운동의 기반에 유교의 깊은 ‘지공무사’(至公無私, 공을 높이고 사를 지양함)의 종교성과 영적 추구가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6)

“공(公)하면 하나가 되고, 사(私)되면 만 가지로 갈라진다. 천하를 의리의 공으로 이끌면 하나 됨을 구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하나가 되며, 천하를 이해타산의 사로 이끌면 만 가지로 갈라짐을 기약하지 않더라도 만 가지로 갈라진다. 천하를 하나로 할 수 있는 것은 의리가 아니면 할 수 없고, 진실로 의리로써 하나 되고 공(公)에서 나온다면 비록 천하가 하나 되길 바라지 않아도 하나가 된다.”(7)

2. 동학(東學, 천도교)을 불러일으킨 기독교

그러나 한국 기독교사상가 중에서 남강 이승훈(南崗 李昇薰, 1864-1930)이 세운 오산학교에서 공부한 함석헌(咸錫憲, 1901-1989)은 이웃종교에 대한 열린 사고에도 불구하고 한국 유교를 그렇게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1930년대 오산학교에서 역사 선생으로 있으면서 쓴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에서 그는 조선의 전통 종교사상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언급하지 않는다. 나중에 “유교야말로 현실에 잘 이용된 종교다”라고 하면서 자신이 참으로 중시여기는 ‘뜻’(志)이 “선비(士)의 마음(心)”이고, 그 선비(士)란 “열(十)에서 하나(一)를 보고, 하나에서 열을 보는 사람”이라고 풀어내기도 하지만,(8) 그에 따르면 동양 성인(聖人)의 가르침은 “엄정한 의미의 역사철학을 가지지 못했”고, 기독교와 비교하면서 기독교가 “불교, 유교를 다시 깨워 새 생기를 주는” 일을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9)

해방 이후 1950년대 그의 기독교 이해가 다시 한 번의 깊은 전회를 경험하지만 함석헌은 그럼에도 그 기독교의 핵을 불교의 ‘각’(覺)과 유교의 ‘학’(學) 곁에 ‘믿음’(信)을 강조하는 “인격”의 문제라는 것을 부각시키고자 한다. 여기서 인격을 강조한다는 것은 그에 따르면 사고를 더욱 더 ‘관계적’으로 하는 것을 말하는데, “인격은 홀로 생기지 못”하기 때문이고, “‘나’에 대하는 ‘너’가 있고서야 되”는 것이며, 이 인격관념이 없기 때문에 믿지 못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10)

▲ 천도교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 선생 초상화 ⓒGetty Image

여기서 함석헌이 설명하는 논리가 얼핏 보기에 유교적 인(仁)과 공(公)의 언술과 그렇게 다르지 않게 보이지만 그가 강조하는 우리 인격의 상대는 특히 초월자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그에 따르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선언하는 예수라는 구체적 역사적 인물의 믿음과 인격을 통해서 “역사를 인격화했습니다. 세계를 인격화했습니다. 우주에 인격적 질서를 주었습니다”라는 의미에서 강조한 것이다.

즉 이 말에서 표현된 대로 함석헌은 기독교가 궁극(天)과 초월(聖)을 어떤 막연한 추상이나 형이상학적 이론 등으로 파악하는 것보다 ‘인격적’(“하나님 아버지”)으로 만나면 훨씬 더 구체적이고, 실천력과 함께 현실적이면서 효능적으로 그 궁극과 직접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 일이 바로 예수라는 인격 속에서 참으로 고유하고 진한 농도로 가능해졌기 때문에 예수는 의심 없이 스스로를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믿고 고백할 수 있었고, 함석헌은 그 일이 우리 민족에게는 어느 다른 종교 전통에서보다도 나중에 전해진 ‘기독교’를 통해서 가능해졌다고 본 것이다.

나는 이 기독교의 방식이 한말 한반도에서 통했다고 보고, 특히 당시 사회적 약자였던 신분차별 속에 억압당했던 민중들, 그중에서도 여성들에게 크게 역할을 하여서 이들에게 참으로 강력한 방식으로 하늘(天)과 초월(聖)을 직접 만나고 대면하여 관계 맺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을 나는 어떤 다른 종교전통에서보다도 폭넓게, 그리고 깊이 있게 “聖(거룩)의 평범성”이 확대된 사건으로 보았다.(11) 거기서 일어나는 개인적 삶의 변화는 물론이려니와 그와 더불어 특히 당시 점점 더 큰 위기에 빠져드는 민족의 독립과 안위를 위해서 자신을 버리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게 했고, 1919년 3.1운동이 가능해진 데에는 그러한 기독교 메시지를 통한 한민족 의식의 개혁이 큰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러한 개신교의 역할 전에 그와 유사한 맥락에서 역할을 한 종교그룹이 ‘동학(천도교)’이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모두가 주지하듯이 1919년 3.1운동은 당시 교인수가 3백만 명 정도에 달하는 천도교가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고, 3대 교주 손병희(孫秉熙, 1861-1922)가 대표적 지도자로 추대되어서 운동을 위한 각종 자금뿐 아니라 독립선언서의 인쇄도 천도교 직영의 보성사(普成社)에서 2만 1천매를 완성하여 사용하였다고 한다.(12)

나는 당시 토착 신흥종교로서 한없는 평등과 자주, 박애와 인권의 이상으로 3.1운동을 이끈 ‘동학’(東學/천도교)이란 그 이름에서도 드러나듯이 ‘서학’(西學/기독교)의 도전에 대해서 한국적 유교 문명권에서 나온 고유한 응전이라고 본다. 그런 맥락에서 앞에서 함석헌의 기독교 ‘믿음’(信)과 인격적 속죄론을 설명한 논리를 동학의 핵심 메시지에 적용해 보면 동학도 당시 기층민의 인격적 변화(“聖의 평범성의 확대”)를 그 이전의 유교나 불교가 이루지 못한 급진적인 방식과 정도로 성취한 경우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의미심장하게도 동학은 한 때 당시 사람들에 의해서 ‘서학’(西學)으로 지목되어 탄압을 받았다고 하는데,(13) 동학의 혁명적인 내재적 초월의식과 반봉건적 평등의식과 인권의식을 당시의 유교 기득권 세력이 서양 기독교에 대해서 그랬던 것만큼이나 용납하기 어려워했을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 탑골공원에 세워진 천도교 3대 교주인 의암 손병희(義菴 孫秉熙) 선생님의 동상 ⓒGetty Image

해월 선생이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의 오지로 숨어 다니던 시절 편찬되고 집필된 것으로 알려진 동학의 역사서 『도원기서道源記書』에 따르면 스승 수운(水雲 崔濟愚, 1824-1864)은 잡히기 전 새벽에 해월(崔慶湘)을 불러서 “이 도(道)는 유불선(儒彿仙) 세 도를 겸하여 나온 것이다”라고 하면서 “... 우리 도는 때에 따라 그때그때 알맞은 제례(祭禮)의 방법을 따른다”고 하였고, “용담의 물이 흘러 사해(四海)의 근원이 되고, 검악(劍岳)에 사람이 있어 한 조각 굳은 마음이다”(龍潭水流四海源 劍岳人在一片心) 등의 시를 써서 “그대의 장래 일을 위하여 내린 강결(降訣)의 시”이니 영원히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14) 이러한 깊은 종교적 체험과 수행적 실천과 더불어 가능해졌던 동학혁명은 당시 정치와 제도정립 면에서는 실패했다고 할 수 있지만, 후기 조선사회의 “대내외적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책임을 평민이 인수해 일으킨 것”이라는 큰 의미로 평가받는다.

그러면서 ‘시천주’(侍天主)와 ‘대인접물’(待人接物), 다른 사람이 거짓으로 속이면 진실로써 그를 위하고, 남이 심하게 굴면 사랑으로써 대우하며, 사물을 다루는 데 있어서도 한 포기 풀이나 한 구루의 나무도 함부로 다루지 말고 하찮은 물건도 자기 몸과 같이 아껴야 한다고 설파하는 동학의 이상사회 이념은 일종의 “영적 코뮤니즘의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이상은 오늘의 현대적 제도까지도 훨씬 넘어서는 “평등 정신의 초월적 본성”을 잘 보여준다고 지적되었다.(15) 그런 맥락에서 동학도 스스로가 “후천(後天) 오만 년(五萬年이)의 도에 남게 될 것”이라고 자임하는데, 그러한 동학 기원의 천도교가 3.1독립운동을 이끈 것은 그래서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16)

3. 민족(기독교)과 세계(유교)를 품고 중흥한 대종교(大倧敎)

천도교와 기독교의 핵심 역할로 가능했던 3.1운동은 그러나 일본의 합병조약 폐기를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그래도 이후 한국인들의 민족의식과 해방과 독립운동에서 큰 전환점을 마련해 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또한 의미 있는 결실로서 여러 독립운동 세력들이 합세하여 상해에 최초의 공화제 정부인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진행에 있어서 한말의 또 다른 고유한 민족저항과 새로운 시대를 위한 창조적 모체인 ‘대종교’(大倧敎)가 있었다는 것을 주목하고자 한다.

주지하다시피 대종교는 한말 러일전쟁을 계기로 점점 더 기세가 등등해지는 일본의 침략에 맞서서 전남 나주 출신 유학자 나철(弘巖 羅喆, 본명 寅永 1863-1916)이 중심이 되어 “중광”(重光)한 것이다. 여기서 왜 중광이라는 말을 쓰는가 하면 대종교는 자신들의 현현이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민족의 시원 속에 담겨져 있던 가르침이 오랜 동안 감추어져 있다가 민족이 큰 위기에 처하게 된 그때 다시 드러나 밝혀지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나철 대종사의 전해지는 생애사에 따르면, 그는 한말의 관료와 유학자로서 1905년 을사늑약의 상황을 맞게 되자 어떻게든 ‘신의’(信義)의 원칙으로 일본의 위정자들과 담판하려고 일본을 네 차례나 왕래한 구국운동가였고, 그러한 외교항쟁이 효과를 보지 못하자 을사오적을 처단하기 위한 비밀결사대를 조직하기도 했다. 그렇게 애쓰는 가운데 그러나 그는 1906년 1월 서울 서대문역에서 백두산의 백봉신사(白峯神師)가 보낸 백전(伯佃, 호는 頭巖)으로부터 『삼일신고三一神誥』와 『신사기神事紀』를 전해 받으면서 생의 결정적인 전환을 맞이하는데, 즉 종교 구국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 대종교 창시자 나철 대종사 ⓒGetty Image

1908년 11월 네 번째 도일했을 때 백봉신사가 또 보낸 두일백(枓一白)으로부터 『단군교포명서』를 건네 받고서 돌아와 1909년 그동안 뜻을 같이했던 반제 반봉건의 사상가 해학 이기(海鶴 李沂, 1848-1909) 등과 더불어 ‘단군교’의 중광을 선포한다. 이듬해인 1909년 일제의 주목을 피하기 위해서 교명을 ‘대종교’(大倧敎)로 개칭했고, 1913년 총본사를 백두산이 바라다 보이는 만주 화룡현(化龍懸)으로 옮겨 교세 확장과 교리의 체계화에 힘쓴다.

하지만 일제가 1915년 포교규칙(布敎規則)을 발표하여 ‘종교’(신도, 불교, 기독교)와 ‘유사종교’를 법령으로 구분하며 포교를 금하자 1916년 음력 8월 황해도 구월산의 단군사당 삼성사로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대종교를 위해, 하늘을 위해, 인류를 위해’라는 세 가지 목숨을 끊는 이유를 밝히고(殉命三組) 방대한 양의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호흡을 끊는 방식으로 자결로써 항거하였다.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은 이때로부터 “불길처럼 번져나갔다”고 지적되었다.(17)

철학자 이규성은 대종교 홍익사서(弘益四書)로 불리는 『태백진훈太白眞訓, 삼일신고三一神誥, 천부경天符經, 참전계경參佺戒經』 중에서 특히 「천부경」을 중심으로 해서 화서 이항로 계열과 사우관계로 연결되는 서우 전병훈(曙宇 全秉薰, 1857-1927)의 정신철학(精神哲學)을 대종교 도의 특성을 잘 드러내는 것으로 평가한다. 위서(僞書) 논란이 많은 『환단고기桓檀古記』와 『규원사화揆園史話』 등을 통해 한민족 고대사를 회복하고 그 고유의 사상을 전파하다 일제에 피살된 계연수(桂延壽, 1864-1920)로부터「천부경」을 전달받은 전병훈은 그 정신을 한 마디로 천도(天道)와 인도(人道)를 겸해서 함께 이루려는 “겸성”(兼聖)의 성인(聖人)추구 그것이라고 이해했다고 한다.(18)

그것은 나 개인의 인격을 최고로 고양시키면서 동시에 사회적, 국가적, 우주적인 통일과 이상의 궁극을 함께 실현시키려는 내외쌍수의 추구로서 “하늘과 하나가 된다”는 의미이고, 우리 모두가 그러한 겸성의 성인을 지향하자는 뜻이라고 밝힌 것이다. “지극한 창조적 자유정신(至神)은 내외를 완성하는 성스러움을 겸한다(至神兼聖)”, “‘동한(東韓)의 단군 천부경은 겸성철리의 극치(兼聖哲理之極致)’, ‘겸성의 최고원리(兼聖之至理)’” 라고 전병훈은 언명하고,(19) 단군을 바로 하늘이 내린 겸성지신의 “신인”(神人)이며, “선성”(仙聖)의 모형으로 보는 것이다. 그의 현현을 근거로 우주의 온 생명은 자아완성과 세계변형의 내외 겸성을 지향하는 바, 거기서의 창조와 진화와 소통과 순환의 무한한 운동은 “시작이 없는 상태에서 시작하는 것”(一是無始一)이기도 하고, “그 하나가 세 가지 이상으로 무한히 분화한다고 해도 근본이 다함이 없는”(析三極無盡本) “궁극적인 하나”(一終無終一)라는 원리를 설명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천부경」의 사고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대종교 신앙의 독립운동은 그리하여 인격적 정신의 자유와 세계변형, 그리고 그 변형이 단지 자국의 독립과 해방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 우주공동체에 대한 사랑과 하나 됨(“愛合種族”, “勤務産業”)을 크게 지향하게 했고, 이렇게 한민족 고유의 불이적(不二的)이고 통합적인 세계관에 근거한 대종교는 만주로 중심을 옮긴 후 빠른 속도로 확산되어 30만의 신도를 헤아리게 되었다고 한다. 자기수련과 교육운동 및 민족해방을 위한 군사적 실천을 함께 병행하는 역동적이고도 창조적인 정신운동으로 역할하면서 3.1운동 이후 한국 독립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 내면의 핵으로서 내재되어있는 하늘 씨앗(性)에 대한 깊은 자각과, 현실에서의 과제와 명에 대한 뚜렷한 인지(命)와, 그것을 용기 있게 실천하는 몸의 실천력(精)을 ‘삼일’(性命精 三一)로 보는 대종교가 한국 자주와 독립 운동에 지대한 역할을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쓴 백암 박은식, 위당 정인보(鄭寅普, 1892-1950), 상해임시정부의 산파역을 했던 예관 신규식(晲觀 申圭植, 1879-1922), 초대의장 석오 이동녕(李東寧, 1869-1940), 민족사학의 단재 신채호(申采浩, 1880-1936), 대종교 정신에 따라서 한글의 존귀성을 밝힌 주시경(周時經, 1876-1914) 등이 모두 대종교인들이었다. 생사를 초극하며 독립운동을 치열하게 이끌던 대종교 리더인 김교헌(金敎獻, 1868-1923)과 윤세복(尹世復, 1881-1960) 등 39인이 참여한 가운데 대종교 본사에서 “대한독립선언서”라는 명확한 이름으로 1918년 2월에 ‘무오독립선언’(戊午獨立宣言)이 나와서 3.1운동의 기폭제가 된 것이 지적된다.

또한 종사의 자격을 사양하고 대한독립단의 총재로서 무력 저항운동을 이끌었던 백포 서일의 활동으로 1920년 홍범도(洪範圖, 1868-1943)의 봉오동대첩과 김좌진(金佐鎭, 1889-1930)의 청산리대첩이 가능했다고 전한다.(20) 백범 김구(白凡 金九, 1876-1949)와 이시영(李始榮, 1868-1953)도 그러한 정신적 반경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한 것이고, 여운형(呂運亨, 1886-1947)은 「천부경」에 대한 찬을 썼다고 하고, 다석 유영모(柳永模, 1890-1981)가 유일하게 번역한 책이 「천부경」이었고, 그 제자 함석헌(咸錫憲, 1901-1989)이 펼친 씨ㅇ·ㄹ사상도 대종교의 정신적 계승임이 지적되기도 한다.(21)

미주

(미주 1) 홍대용, 『湛軒書』1, 「贈周道以序文」 , 이규성, 『한국현대철학사론-세계상실과 자유의 이념』, 이화여대출판부, 2015, 23에서 재인용.
(미주 2) 김선희, 『서학, 조선 유학이 만나 낯선 거울-서학의 유입과 조선 후기의 지적 변동』,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2018, 101.
(미주 3) 안정복 지음․이상하 옮김, 『순암집』, 한국고전번역원, 2017, 163; 이선경, “조선시대 『천주실의』 수용 양상을 통해 본 유교와 기독교의 만남”, 현장(顯藏)아카데미 편, 『21세기 보편 영성으로서의 誠과 孝』, 동연, 2016, 127-130.
(미주 4)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상), 남만성 옮김, 서문당, 1999, 51-52.
(미주 5) 같은 책, 68.
(미주 6) 이은선, 『잃어버린 초월을 찾아서-한국 유교의 종교적 성찰과 여성주의』, 모시는사람들, 62.
(미주 7) 『毅庵集』권33, 雜著, 下冊, 58쪽, “公則一, 私則萬殊, 率天下以義理之公, 不求一, 而自一, 天下以利害之私, 不期萬, 而自萬, 一天下非以義理, 則不可. 苟以義理而一, 出於公, 則雖欲不一, 天下不得也.”, 이종상, 같은 글, 387에서 재인용.
(미주 8) 함석헌, 『인간혁명의 철학』, 함석헌전집2, 83; 함석헌,『뜻으로 본 한국역사』, 354.
(미주 9) 함석헌, “새 시대의 종교”, 함석헌 저작집 14, 24;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279.
(미주 10) 함석헌, “기독교 교리에서 본 세계관”, 노명식 지음, 『함석헌 다시 읽기』, 노명식 전집 04, 책과함께, 2011, 455.
(미주 11) 이은선, 종교문화적 다원성과 한국 여성신학“, 『한국생물生物여성영성의 신학-종교聖, 여성性, 정치誠의 한몸짜기』,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2011, 29이하.
(미주 12) 金素眞,『韓國獨立宣言書硏究』, 국학자료원, 2015, 103.
(미주 13) 최동희, “全琫準”, 『人物로 본 韓國史』, 월간중앙 1월호 별책부록, 1973.1, 241; 수운 선생의 동학사상이 형성되는데 중요한 하나의 계기로 여겨지는 1855년 을묘년에 만났다고 하는 ‘을모천서’(乙卯天書)는 서학의 『天主實義』로 추측되기도 하는데, 그 책의 이치를 깊이 살펴보니 “기도”(祈禱)의 가르침을 담고 있었다고 고백되었다(『도원기서』, 18). 이 추측의 타당성 여부에 대한 논란은 많을 수 있겠지만 당시 동학이 서학(서구 기독교 문명)과의 대면과 나름의 응전 속에서 전개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미주 14) 『도원기서』, 윤석산 역주,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2012, 49-50.
(미주 15) 이규성, 같은 책, 114.
(미주 16) 『도원기서』, 167.
(미주 17) 이규성, 같은 책, 209; https://m.youtube.com 광주 MBC창사52주년 특집다큐 홍암 나철 100주기 다큐.
(미주 18) 같은 책, 186.
(미주 19) 같은 책, 191.
(미주 20) 이찬구, 『천부경과 동학』,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2007, 594.
(미주 21) 이규성, 같은 책, 255.

이은선(한국信연구소) leeus@sejong.ac.kr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