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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하늘과 서양의 하늘은 같다

기사승인 2018.07.11  19:3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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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교회의 뿌리를 찾아서(2)

탁사(濯斯) 최병헌은 누구인가?

탁사 최병헌 목사는 1858년에 충청도에서 태어나 1927년에 사망했는데, 그가 태어나던 시기에는 국외적으로는 두 차례에 걸친 아편전쟁으로 중국이 서구 열강의 힘 앞에 무릎을 꿇기 시작하던 때이고, 국내적으로는 서학(西學)을 수용한 남인파가 북학파와 논쟁하며 유교 신분 사회를 밑바닥에서부터 흔들려고 시도하다가 서학이 박해를 받던 때였습니다. 한마디로 탁사는 조선 500년을 지탱해온 중화사상에 물든 유교의 세계관이 무너지고 새로운 세계관이 요구되는 혼돈의 시기에 몰락한 양반 가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납니다. 당시의 양반들이 그러했듯이 그 또한 유학을 공부하여 과거급제의 길을 추구합니다. 그리하여 거의 삼십여 차례 과거에 응시하지만, 그때마다 그가 발견한 것은 실력이 아닌 돈과 권력에 의해 당락이 결정되고 매관매직이 이루어지는 부정부패한 조선의 모습이었습니다.

여기서 그는 정신적인 허무감을 극복하기 위해 개화사상과 기독교 신앙에 입문하게 되며 풍전등화와 같은 조선왕조의 몰락을 지켜보며 민족 구원의 길에 동참합니다. 그런데 이때 그는 당시 김옥균 박영호 등이 취했던 개화의 길 곧 유교의 가르침을 야만으로 보고 공맹의 도를 서양의 도로 바꾸려는 그런 급진적인 길을 택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김윤식 유길준 등이 취했던 동도서기(東道西器)론 서양의 기술문명은 수용하되 정신은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온건개화파의 길도 따르지 않습니다.

▲ 탁사 최병헌 목사 ⓒGetty Image

그 또한 독립협회의 전신인 협성회를 창립하는 일에 참여하기는 하지만, 그가 취한 길은 민족의 구원은 개화파들의 정치 운동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고 초월과 관계된 민중의 자각을 호소하는 종교 운동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믿었던 것입니다.(변선환. “탁사 최병헌목사의 토착화 사상” 『신학사상』, 73쪽) 그는 동도서기론을 비판하며 서양의 기술이나 문명도 정신에서 출발하는 것이며, 따라서 정신을 수용하지 않고 그 껍질인 기술과 문명만을 취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음을 말한 것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지금 사람들은 서양의 기계는 취하고 쓸 수 밖에 없다고 말하면서도 서양의 종교는 존경 숭상할 수 없다고 하여 이를 이단으로 지적하여 버리니 그것은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매번 서양의 문명이 도움이 된다하면서도 가르침과 도리는 물리치고 있으며, 또한 외국의 강한 것은 칭찬하면서도 그들이 부강해진 원인은 알려고 들지 않으니 한스럽다!”(이길용, “‘겨레-믿음-체험’의 신학자 탁사 최병헌”, 『한국신학 이것이다』, 21쪽)

그렇다고 해서 그가 서양의 것을 무조건 옳다 하거나 선교사의 말만을 믿고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그는 배재학당의 한문선생을 하며 아펜젤러와 대화를 통해 기독교에 입문한 후에도 무려 5년 동안이나 스스로 성서를 공부하고 기독교의 진리를 터득하고 나서 세례를 받습니다. 그런데 이때 그로 하여금 기독교인이 되도록 이끈 것은 단지 머리만의 깨달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선교사들이 보여준 헌신과 희생의 모습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세례를 받을 것인가 말까를 고민하던 때에 우연히 도심에서 거의 죽게 된 병든 거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아무도 돕는 이가 없고 자신마저 어쩔 수 없어 돌아섰는데, 이후 며칠이 지나 외국인 선교사가 그를 데려다가 잘 치료하여 다시 건강을 되찾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입니다.

또 다른 사건은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의 죽음이 보여준 감화입니다. 복음 전파를 위해 목포로 가던 배가 파선하였을 때, 수영선수 출신이었던 아펜젤러는 혼자서는 얼마든지 살 수 있었지만, 끝까지 동료를 구하려다 함께 익사하고 만 것입니다. 이 두 사건은 인간 최병헌, 선비 최병헌으로 하여금 기독인 최병헌, 목사 최병헌이 되게 만든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김창식, 김기범에 이어 우리나라 세 번째 목사가 되었고, 아펜젤러의 뒤를 이어 정동교회의 2대 목사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당시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을 합병하려고 하는 민족의 위기 앞에서 그는 단지 종교적인 개종으로만 대응을 한 것인가? 그것만은 아닙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민족의 자주를 위해 애를 썼습니다. 1906년 을사늑약 후 대한매일신보에 실은 그의 글을 읽어보자. “내가 일전에 남대문안 시장 동쪽 가에 몇 간의 빈터를 한성부에 청원하여 점포를 설치하려 했더니, 관원이 굳게 고집하여 허락하지 않고 말하기를, 이 땅은 나라 땅이라 후일에 반드시 공용으로 쓸 데가 있다더니 지금 보니 일본 사람이 그 터에 이층집을 짓고 점포를 설치하였다. 어찌 자기 백성을 이다지도 경시하는가? 이 벼슬아치여! 어찌 그들에게는 후하고 우리 한민족에게는 야박하게 하는가!” 하며 정부를 질타하기도 하였고, 정동교회 목사가 된 이후 윤치호, 이상재와 함께 황성기독교 청년회를 창설하고 청년지도자가 되어 신문 잡지와 저술을 통하여 개화기의 애국 계몽 운동가로 나섭니다.

애국가의 작사자?

대한민국의 국가인 애국가의 작곡자는 안익태이지만, 작사자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는 객관적이고 완벽한 증빙자료가 없다하여 작사자 미상으로 결론을 내린바 있습니다. 당시 민영환, 최병헌, 안창호, 윤치호, 김인식 등이 작사자로 거론된 바 있어 저도 이번 하늘뜻을 준비하면서 여기저기 인터넷을 뒤져 기록들을 살펴보았는데, 최병헌 목사 작사자 설이 가장 타당하다는 저 나름대로의 결론을 얻었습니다. 장손녀인 최규애 씨는 어린 시절 천연동 자택에서 조부 최 목사와 지내던 때에 많은 문객들이 방문하였고, 매달 시회(時會)가 열리면 ‘올드랭 사인’ 곡의 애국가를 자주 불렀는데 아버지께서는 “할아버지가 애국가를 지으셨다고 말씀하셨고, 어머니는 “애국(愛國)가 원형은 할아버지가 지으신 불변(不變)가다. 후렴은 윤치호 선생의 황실가 후렴이 좋아서 첨부했다”고 하시며 애국가 4절 원문을 조부 최병헌 목사가 지으셨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정동교회 목사로 계시던 시절, 이승만, 신흥우, 김규식 등 배재학당 출신 13명과 ‘바보클럽’이라는 친목회를 만들어 매주 1회 만나셨는데 회원들이 해외로 망명할 때 불변가를 적어서 주셨다는 말을 들었다. 이 불변가가 오늘날 애국가임을 확신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증언들에 덧붙여서 최병헌 목사 저작설이 더 큰 힘을 받는 것은 지금은 고층빌딩에 가려 보이지 않으나 옛날 정동교회 목사 사택에서 남산을 보면 울창한 소나무 숲이 보여, 애국가의 “남산 위의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이라는 구절이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한글을 무척 중요시 여겨 성서의 한글번역에 참여하고 순한글신문인 <제국신문>을 창간하여 주필로 활동하고 신학 학술지인 <신학월보>를 한글 전용으로 발간하기도 했습니다. ‘한시에 달인’이라고 불리었기에 그는 분명 한문이 한글보다 더 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민족정신의 함양을 위해 일제의 탄압에 불구하고 한글을 전파하기에 힘썼다는 사실에서 그의 깊고 뜨거운 민족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종교가 현실을 외면하고 피안의 세계로 들어가려는 입장인 정교분리의 원리를 비판하면서 국가의 흥망성쇠가 종교에 달려 있다고 보면서 당시의 유교를 국가 패망의 원인을 제공한 ‘죄인’으로 정죄하고 그 대안으로 기독교를 말하였던 것입니다.(심광섭, “탁사 최병헌의 유교적 기독교 신학”, 『세계와 신학』, 2003, 겨울 106쪽)

그런데 오늘 제가 최병헌 목사를 조선교회의 중요한 뿌리로 말하는 것은 단지 그의 민족주의적 애국심 때문만은 아닙니다. 당시 조국을 사랑한 수많은 사람들, 기독교 목사 가운데도 만주로 시베리아로 나아가 일제를 몰아내기 위한 무장 독립투쟁에 나선 사람도 있었기에 단지 나라 사랑 애국심만으로 오늘 이 시간에 그를 말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 그를 얘기하는 것은 그가 가졌던 우리의 전통 종교인 유교나 불교에 대한 열린 자세 때문입니다. 당시는 나라를 잃게 되는 위기감과 장로교 길선주 목사로부터 시작한 1907년의 평양 대부흥 운동의 열풍으로 교회가 급속하게 보수화되고 비정치화 내지는 몰역사적인 신앙으로 빠져들던 시기였습니다. 당시의 전도 방식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매우 획일적이고 배타적인 전도 방식이 주를 이루었던 시기입니다. 게다가 당시 선교사들의 대부분이 우리의 전통 신앙이나 문화를 야만적이고 미신적인 것으로 간주하였을 때입니다. 이러한 때에 이미 그 효력이 다한 것으로 보이는 전통종교와 기독교의 대화를 시도한다는 것은 상당한 식견과 신념이 요구되는 일이었습니다.

조상 제사와 기독교

명절이 지나면 부부 이혼율이 올라간다는 신문기사가 기억납니다. 이의 주범은 “조상 제사는 우상이니 이를 행해서는 안 된다.”는 개신교회의 가르침 때문에 일어납니다. 집안에 며느리로 들어간 사람이 이를 거부할 때, 이는 단순한 종교적 갈등으로 그치지 않고, 종종 이혼이라는 파국에까지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과연 예수께서는 가정이 깨어지고 그래서 자녀들에게 불행을 가져온다 할지라도 조상 제사를 행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을까? 이런 문제는 일률적으로 옳다 그르다를 판단할 수는 없는 문제이지만, 조상 제사가 성서에서 말하는 우상 숭배와 동일한 행위인지도 물어봐야 하고, 예수님은 조상 제사보다는 오히려 돈 맘몬이 우리가 주의해야 할 우상이라고 가르쳤는데, 여기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보아야 하고, 사도 바울로는 믿지 않는 사람을 얻기 위해 자신은 믿지 않는 사람처럼 그들과 똑같이 행동한다는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데, 왜 이런 열린 신앙은 발휘하지 못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질문을 해보아야 합니다.

제가 아는 어느 여 집사님은 제사를 중시하는 믿지 않는 가정에 결혼하여 갔지만, 여러 해 동안 말없이 제사를 포함한 가정의 모든 일에 솔선수범하여 어른들의 신임을 얻은 다음에 조상 제사의 형식주의의 폐단을 설명하여 유교식 조상 제사를 기독교식 추모예배로 바꾸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분들이 다 개종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여간 사랑의 종교인 기독교가 제사로 인해 가정을 파괴시키는 일은 분명 하느님이 원하시는 바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조상 제사의 기독교 토착화는 오늘 이 시대에 중요한 교회의 과제입니다.

현재 남한 사회는 유럽이나 미국, 중동 혹은 남미와는 달리 세계에서 몇 개 되지 않는 다종교의 사회입니다. 종교사회학적으로 보면 매우 독특한 사회입니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는 인도의 불교가, 조선시대에는 중국의 유교가, 그리고 현재는 미국의 기독교가 자본주의와 함께 뿌리를 깊이 내렸습니다. 그럼에도 다른 나라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종교간의 상생과 공존이 유지되어온 사회입니다. 물론 이점에서 무교의 역할을 강조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세계는 미국이 주도하는 기독교 세력과 아랍 중심의 이슬람 세력으로 양분되어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테러 집단과의 전쟁이지만, 그 내면에 들어가 보면 이는 종교 간의 전쟁입니다. 그래서 세계 지도자들은 어떻게 하면 세계가 종교적으로 평화롭게 공존할 것인가를 중심 화두로 갖고 있는데, 이점에서 남한 사회가 하나의 대안적 모범 사회로 알려져 있고, 이런 점을 높이 평가한 세계교회협의회는 지난 2013년에 부산에서 총회를 개최하였던 것입니다.

교회의 토착화운동

토착화라는 말은 자주 쓰지는 않지만, 우리 기독교 안에서는 매우 중요한 신앙의 주제입니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토양과 기후가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면 자연히 그 토양과 기후에 맞게 자신을 변형시켜야 생존이 가능합니다. 종교 또한 다른 문화권에 들어가 뿌리를 내리고 자생적인 종교가 되려면 그 문화에 맞게 변형이 되어야 합니다. 불교, 유교 또한 외국에서 들어온 종교이지만, 이런 토착화를 이룬 종교입니다.

기독교 또한 초창기에 선교정책을 세울 때에 중국 선교사 네비어스의 조언을 따라 독립, 자립, 진취적인 토착교회의 설립을 목표했습니다. 당시 미국장로교 선교본부 해외총무였던 스피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선교의 목적은 나라마다 토착적으로 기독교를 세워 민족에 알맞게 순화시키고 그 땅에 적합한 삶의 형태로 성장시키는 데 있다. 다시 말하면 사회적으로 그 겨레의 전통에 뿌리박고 생활의 기저에 연결되는 민족교회를 성립하려는 이상을 가져야 한다. 서구의 교파적 교리나 어떠한 교권 조직도 정당화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못하였는데, 미국에서 19세기 중반 대부흥 운동이 일어나면서 세계선교 열풍이 불게 되는데 이때 단기 훈련을 받은 자질 부족의 선교사들이 많이 들어오게 됨으로 인해, 업적 위주의 선교, 선교사들간의 파당과 경쟁, 거기에 서구 백인 우월주의로 말미암아 자치(自治)와 토착화(土着化)는 뒷전으로 밀리고 교리와 교권중심의 교회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래서 조선의 서양 선교사들은 중국교회나 일본교회와는 달리 조선교회의 지도자를 의도적으로 키우지 않았고, 실상 남한의 수많은 교단의 분리는 그 뿌리가 선교사들 간에 파당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남한의 개신교는 고쳐나가야 할 점이 많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토착화 문제는 매우 중요한 과제입니다. 토착화 신학과 토착화 예배음악입니다.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의 여러 나라들의 교회는 자신들의 전통적인 노래를 예배에 도입하고 이를 서구교회에 전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를 못합니다. 향린교회를 비롯한 몇몇 교회들이 국악예배를 드려오고 있지만, 대다수의 교회들은 서구 일변도의 신학과 음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향린교회를 섬기던 2013년 세계교회협의회 총회가 부산에서 열렸을 때, “국악예배와 에큐메니칼 영성”이라는 워크샵을 열어서 참석자들의 높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던 적이 있습니다. 남한교회가 세계 교회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인가? 유럽은 한때 모든 국민이 세례교인이었고 그리고 세계를 기독교왕국으로 만들려고 시도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 모든 것들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숫자 많은 것은 언젠가는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정신입니다. 우리가 세계교회에 기여할 수 있는 정신적 유산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어떤 학자는 최병헌 목사를 종교다원주의자로 말하기도 하지만, 그는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그런 얘기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공자나 맹자, 노자, 부처는 단지 성현이지만, 예수는 하느님이시며, 인류의 죄를 대속한 구속주가 된다”고 말한 전통적인 호교론자였습니다.(이길용, “‘겨레-믿음-체험’의 신학자 탁사 최병헌”, 『한국신학 이것이다』, 23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요즘 우리가 말하는 토착화신학을 본격적으로 얘기하고 열린 마음으로 이웃종교를 연구하고 대화를 시도한 최초의 신학자이자 목회자였습니다.

탁사의 실존적인 고뇌와 학문적 노력

그런데 그가 이렇게 종교간의 대화를 그의 학문적 주제로 삼게 된 첫째 이유는 그 자신이 나이 30세에 이르도록 유학의 세계에 흠뻑 빠졌던 사람으로 36세에 이르러서야 예수를 영접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가 이미 진리로 알고 배웠던 유학이라는 학문과의 대화는 그 자신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실존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개종을 이유로 자신의 과거와 수천 년 민족의 역사와 조상을 내쳐 버릴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지금 우리도 겪고 있는 일이지만, 전도의 대상자들이 유불선의 전통적인 신앙 속에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에 깊은 얘기를 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는 <성산명경>과 <만종일련>이란 책을 통해 타종교와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자기 이해를 추구하여 나갔습니다. 그의 호 탁사는 바로 자신의 작품 속에 나오는 주인공의 이름입니다. 그는 종교간 대화를 통해 타종교의 신도들은 물론, 기독교의 신도들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 재창조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박병길, “탁사 최병헌 목사의 삶”, 『세계와 신학』, 97, 겨울, 29쪽)

‘서양지천즉 동양지천시 천하시동일’(西洋之天卽 東洋之天以 天下視同一) 곧 서양의 하늘이 곧 동양의 하늘이요 서양의 상제가 곧 동양의 상제라는 말을 하며 보편적인 하느님 체험 하에서 동서양의 제 종교를 이해하려 했습니다. 이는 이치는 하나인데 만물이 나타날 때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는 유학의 논리를 적용한 것입니다. 그는 정약용을 비롯한 실학자들의 성리학 비판에 공감하며 성리학의 하늘(天)과 상제(上帝)를 동일시하지 않았습니다. 하늘은 천(天)의 형체이고 상제는 하늘의 변화를 주재하는 인격자인바 선진 유학의 인격신을 성리학자들이 자연의 천(天)으로 바꿔버린 것을 비판하고 유교의 신 이해와 기독교의 신 이해가 상통한다고 본 것입니다.

나아가서 그는 단지 유교뿐만이 아니라, 불교를 포함한 세계 대부분의 종교를 학문적으로 자세히 비교하였습니다. 그는 물론 기독교의 입장에서 다른 종교를 비판하였지만, 그러나 그는 한국의 고유종교들과 그 문화들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열린 목회자였던 것입니다.

제1 성서와 이방인 구원

여기서 우리는 그렇다면 성서는 다른 종교나 문화에 대하여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하여 보겠습니다. 물론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다른 신을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 종교입니다. 그런데 이 또한 유심히 살펴보면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은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말합니다. 다른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저들의 가르침이 잘못된 것이기에 이를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의 요나서를 읽어보면 이 뜻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요나는 어느 날 야훼 하느님으로부터 니느웨 성에 가서 회개의 복음을 외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유대민족의 원수의 나라인 니느웨 성에 가서 복음을 전하느니 차라리 죽는게 낫겠다 싶어 이 명령을 거부하고 정반대 방향으로 가는 배를 탑니다. 그리고는 하느님 한번 해 볼테면 해 보십시오 ‘배째라’의 태도를 갖고 배 밑창을 들어가 잠을 잡니다. 이때 큰 태풍이 일어나고 이차저차하여 바다 속으로 던져져, 큰 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결국 마지못해 니느웨 성에 가서 회개를 외칩니다.

그런데 놀랄만한 일이 일어납니다. 마지못해 그것도 사흘을 걸어 다녀야 하는 큰 성인데 그만 하루 만에  왕 이하 신하 온 백성은 물론이고 모든 짐승들까지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그리고 베옷을 입고 회개를 하였고 그래서 하느님께서 심판의 재앙을 돌이키셨다는 우화 이야기로 씌어져 있습니다. 곧 요나서가 주장하는 것은 유대교가 혈연에 매여 민족배타주의로 나가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나서 저자는 이를 보다 분명하게 하기 위해 신을 뜻하는 단어를 달리 사용하고 있는데, 요나가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1장 2장 4장에서는 신의 이름이 ‘야훼 하느님 히브리언로 ’야훼‘로 나오지만, 3장에서 니느웨 사람들과 관련이 될 때는 그냥 ‘하느님’ 곧 히브리어로 ‘엘로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엘로힘’은 ‘엘’의 복수형으로 ‘엘’은 당시 근동의 여러 부족들의 신을 일컫는 보통대명사입니다. ‘야훼’는 ‘엘로힘’ 가운데 특별히 애굽에서 탈출한 히브리 노예들의 신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니느웨 사람들이 저들의 나쁜 행실을 뉘우쳤다는 구절만 나오지, 저들이 개종을 하였다는 곧 야훼를 예배하였다는 구절은 전연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요나서는 그 결론에서 이방민족을 구원하는 야훼 하느님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요나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요나서는 개종 없는 이방민족의 구원 곧 이방종교에 대한 열린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2 성서와 이방인 구원

제2성서의 경우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말하고 있지만, 그것이 반드시 개종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로마인도 이방인들도 구원을 받습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 크리스챤들을 향한 복음서입니다. 다른 복음서보다 유대 민족주의 성격이 강합니다. 1장에 족보가 나옵니다. 유대 민족의 시조가 되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다윗 왕을 거쳐 예수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에까지 이르는 족보입니다. 예수는 바로 유대인이요 다윗 왕가의 후손임을 밝혀주는 족보입니다.

그런데 이 족보에는 일반적으로 족보에 등장하지 않는 네 명의 여인들이 나오는데, 이 여인들은 모두 이방여인들이요 문제가 많은 여인들입니다. 다말은 유다의 며느리였지만, 어찌어찌하여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관계를 맺어 아들을 낳습니다. 라합은 본래가 이방여인으로 창녀입니다. 룻 또한 과부로서 이방여인입니다. 솔로몬의 어머니로 다윗의 아내가 되는 밧세바는 아예 그 이름 대신에 ‘우리야의 아내’라고 나옵니다. 이는 단순히 조상들의 이름을 열거한 족보가 아니라 다윗이 부하의 아내를 권력으로 빼앗은 그 죄악을 고발하고 있는 판결문이며 여기 우리야는 이방 족속입니다.

네 명의 문제 많은 여인들이 예수의 조상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여성들의 인권은 물론 억눌린 약자들에 의한 민중주체의 역사를 선포하고 있는 것이며, 종교/문화적으로 본다면 다양한 신앙과 문화가 한데 어울러져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다원주의 혹은 문화포괄주의적인 입장을 표방하는 것입니다. 요즘 제주도에 피난 온 예멘사람들에 대한 반대가 심합니다. 청와대 청원 숫자가 무려 65만명을 넘어섰습니다. 이들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반 모슬렘 주장을 믿고 있고 그 내면에는 한국인 순혈주의에 근거한 민족우월주의적인 태도를 갖고 있습니다. 여기에 동조하는 상당수가 보수 기독교인들이라고 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전도여행 중에 아테네에 들려 그 유명한 아레아바고 광장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그는 거기서 유대민족이 믿는 신을 유일신으로 선포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여러 신들을 섬기는 가운데, 그들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 경배하는 그 모습을 보고 이 알지 못하는 신이 바로 유대인들의 야훼 하느님을 말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다신 신앙을 인정하면서 야훼 하느님을 말하고 그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양자 선택의 갈림길로 아테네 사람들을 몰아가지 않고, 이것도 저것도 함께 취하게 하고 그리고 그것들을 서로 비교하게 하고 그래서 바른 신을 선택하도록 하는 지혜와 포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서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책이 아니라 한 민족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형성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다른 수많은 민족과 문화들이 서로 부딪히고 뒤엉켜지면서 형성이 된 책입니다. 기독교만의 독특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도 실상 학문적으로 추구해보면 여기저기 다른 종교나 문화에서 비슷한 것들이 발견되고 때로는 그것들을 기독교가 수용하여 자기 것으로 만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탄생일로 지키는 12월 25일은 본래 태양신을 섬기는 로마의 이방민족이 지키는 민속 절기였습니다. 예수가 그날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예수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그날은 어둠의 세력이 물러나고 낮의 밝음이 길어지는 동지 태양신의 절기로서 지켜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면서 이 태양절을 성탄절로 바꾼 것입니다.

『예수는 신화다』라는 책을 보면 이런 얘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물론 다른 종교나 다른 책에 이미 있었으니 복음서의 얘기가 거짓이고 신화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억지입니다. 제가 읽어보았고 대부분 그의 얘기에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의 신앙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물론 여러분이 읽는다면 충격을 받을 얘기도 많을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성서의 기사들을 고고학적으로 증명한 『예수는 역사다』라는 책을 읽어보면 좋을 것입니다.

대화와 포용의 시대

우리가 견지해야 할 바른 신앙의 태도는 예수가 신화냐 역사냐 하는 양자택일의 입장이 아니라, 우리가 절대라고 주장하는 그 안에도 어떤 잘못이 있을 수 있으니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우리는 여유와 포용입니다. 오늘의 시대는 사회경제적으로는 신자유주의 시대이지만, 문화적으로는 탈근대주의 시대로서 개인이 존중받는 다양성의 시대입니다. 종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믿는 하느님이 참 하느님이요 내가 고백하는 신앙이 참 진리라고 신앙고백적으로 선언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와 다르게 고백하는 사람들은 모두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충돌 외에 다른 길은 없기 때문입니다.

톨스토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는 그르고 나는 옳다고 말하는 것은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말 중에서 가장 잔인한 말이다. 특히 그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일 경우 더욱 그렇다. 그런데 종교에 대해 논쟁하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 잔인한 말을 서로 거침없이 내뱉고 있다.”(『인생이란 무엇인가』, 564쪽)

이슬람의 신비주의를 태동케 한 수피의 잠언은 이런 말을 합니다. “네가 만약 이슬람교도라면 그리스도교도에게 가서 함께 살아라. 만일 그리스도교도라면 유대인과 함께 살아라. 만일 가톨릭교도라면 정교도와 함께 살아라. 네 종교가 어떠한 것이든 신앙을 달리하는 사람들과 사귀어라. 만일 그들의 말에 네가 화내지 않고 자유로이 그들과 사귈 수 있다면 너는 이미 평화를 얻은 것이다.”

다문화 다종교 사회에서 우리가 어떻게 신앙의 근본을 지켜나가야 할는지는 많이 생각해야 할 부분입니다. 게르베르트 비겔로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참으로 믿는 자는 어떤 교의 또는 어떤 경전을 맹신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신앙을 순수한 양심과 명쾌한 사상 속에, 즉 신의 의지를 가장 바르게 표현하는 자이다.” (위의 책, 565쪽) 그렇다면 성서에 제시된 야훼 하느님의 의지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사랑, 평화, 정의, 생명으로 충만한 세상을 이 땅에 건설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모름지기 대도(大道)는 끝이 없는 것이어서 진리라고 하는 것은 모든 나라에 두루 통할 수 있는 것이다. 서양의 하늘이 곧 동양의 하늘이다. 천하로 볼 때 모든 사해의 무리가 하나이고 형제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탁사 최병 헌목사의 말입니다.

조헌정 choshalo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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