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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filoxenia)에 대한 묵상

기사승인 2016.09.13  11:3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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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점일획 말씀 묵상>

사랑을 실천하는 첫 걸음인 "환대" φιλοξενία (filoxenia 필로크쎄니아)

로마서 12:13 성도들이 쓸 것을 공급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십시오.
히브리서 13:2 나그네를 대접하기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디모데전서 3:2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 . .
디도서 1:8 오히려 그는 손님을 잘 대접하며, 선행을 좋아하며, 신중하며, 의로우며, 경건하며, 자제력이 있으며 . . .
베드로전서 4:9 불평하지 말고 서로 따듯하게 대접하십시오.

위 다섯 성구 중, 앞쪽, 네 성구 밑줄 친 부분인 "손님 대접"과 "나그네 대접"은, 헬라어 원문에서는 서로 다른 단어가 사용된 것이 아니라 공통된 한 단어가 사용되었다. φιλοξενία (filoxenia 필로크쎄니아)가 그 단어이다. 그런데 이 단어를 한국어로 번역할 때 사용된 "손님 대접"이나 "나그네 대접"은 모두 filoxenia를 이해하는 데에 오해를 줄 수 있는 표현이다.

Filoxenia를 번역하는 데 가장 적절한 단어는 "환대"이다. 그래서 영어성경에서는 이 단어를 hospitality(환대)로 번역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환대"가 한국 교회와 신학계에서 중요한 신앙적-신학적 개념으로 자리 잡지 못하였기 때문에 filoxenia를 번역하는 데 사용되지 못하였다. 한글 성경 중에 그나마 "환대"에 가깝게 번역한 구절은 "따뜻한 대접"으로 번역한 베드로전서 4:9 정도가 되겠다.

세 나그네를 환대하는 아브라함과 사라 (러시아 정교회 이콘)

어떻게 다른가? "손님 대접"이나 "나그네 대접"에는 filoxenia를 "외부인"에 대한 대접으로 한정짓는 뉘앙스가 있다. 교회를 찾아온 노숙자에게 잘 해주거나, 길에서 만난 걸인에게 잘 해주라는 뜻처럼 들린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일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알기에, 우리는 이런 선행 역시 그리스도인들에게 참 중요한 덕목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filoxenia(필로크세니아)로 표기된 "환대"는, "외부인"에 대한 따뜻한 대접이 아니라 "낯선 자" 곧 strangers에 대한 따듯한 대접을 말한다. 단어의 합성 구조가 그것을 잘 드러내 준다. filoxenia(필로크세니아)는 filos와 xenos의 합성어이다. 앞쪽 필로스의 뜻은 누구나 알 것이다. 사랑이다. 뒤쪽 크쎄노스는 그리 익숙한 단어는 아니지만, "외국인 혐오"를 뜻하는 영어 단어 xenophobia(제노포비아)에 남아 있다. xenophobia는 헬라어 xeno(크쎄노)와 phobia(포비아)가 합해진 꼴이다. 이 때 크쎄노는 "외국인" 이전에 "낯선 사람"을 뜻한다. 낯선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발전하여 외국인에 대한 두려움이 된 것이다.

정리하자면, filoxenia필로크세니아로 표현된 "환대"는 "외부인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낯선 자에 대한 사랑"을 뜻한다.

누가 낯선 자인가? 물론 손님과 나그네 같은 외부인도 낯선 자이다. 그러나, 낯선 자는 그보다 범위가 넓다. 필자가 정의하자면 "내 안에 그 사람의 자리가 없는 사람"이 내게는 낯선 자이다. 그런 낯선 자는 꼭 손님과 나그네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같은 교회 안에 있을 수 있고, 같은 신도회 안에 있을 수 있고 심지어 같은 가족 안에도 있을 수 있다. 그를 위해 내 마음을 낸 적이 없으면 그는 내게 낯선 자이다.

성경이 filoxenia를 통해 말하는 환대는 그런 사람에게 잘하라는 말이다. 위에 적시된 성구들이 "환대"에 대하여 말할 때, 특별히 장로와 집사의 자격 요건으로 "환대"를 제시하였을 때, 그 환대의 대상은 일반적인 "나그네"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 자기 자리를 갖지 못한 사람들들, 곧 교회 공동체 안의 "낯선 자"들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 사람들에게 마음을 내주며 따뜻하게 대하라는 말씀이다. 그것이 사랑의 출발점이다.

우진성 목사 (성경과설교연구원)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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