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명수 칼럼>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갈2:20; 새번역)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and it is no longer I who live, but Christ lives in me; and the life which I now live in the flesh I live by faith in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up for me.(Galatians2:20; NASB) |
12월을 기독교달력에서는 ‘아드벤투스’(Adventus)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시는 절기라는 뜻인데요. 아기예수의 탄생을 기다린다는 뜻에서 강림절降臨節 또는 대림절待臨節이라 부르기도 하지요. 신약성경 4복음서 중, 아기예수 탄생을 전하는 복음서는 두 개 뿐입니다. 마태복음(1:18-25)과 누가복음(2:1-20)인데요. 맨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과 바울서신에는 나오지 않지요.
아마도 마태와 누가복음 저자는, 예수님이 하느님 아들임을 증명하는데 있어서 아기예수 탄생 스토리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마가복음과 달리, 복음서 기록 과정에서 이를 첨가했던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아기예수의 탄생소식이 이렇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은 이러하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나서, 동거하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마1:18)
이 말씀 배후에는 초기기독교 세계에서 예수 탄생을 둘러싸고 다양한 소문이 떠돌고 있었음을 짐작케 하고 있는데요. 그 중 하나는,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가 외간남자와 관계를 맺어 낳은 사생아가 다름 아닌 예수라는 루머였던 것 같아요. 오리겐의 초기 기독교 교부인 오리겐이 “셀수스에 반대하여”(origenus, <contra celsum>)라는 책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 탄생을 둘러싼 이러한 악성 루머에 대항하여, 초기교회는 싸워야 했는데요. 예수는 동정녀 마리아에 의해서 성령으로 잉태된 분이라는 선언이 그것입니다. 예수는 사생아(私生兒)가 아니라, 하느님의 적자(嫡子)라는 선언이었지요.
당시의 그리스신화에는 신이 여자와 성관계를 맺어 아이를 생산하는 경우가 종종 등장하는데요,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영웅 헤라클레스는 어떻게 태어났나요? 제우스 신이 암피트리온의 아내 알크메네를 유혹하여 낳은 아들입니다.
▲ 산드로 보티첼리 作 <수태고지> |
마리아가‘성령으로(ek pneumatos hagiou)’잉태되었다는 마태복음의 전언(傳言)은 그리스 신화와는 다른 차원을 지니고 있습니다. 동정녀 탄생 자체가,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창조하시는(creatio ex nihilo) 하느님의 능력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지요. 그래서 마태는 이를 임마누엘(immanuel) 사건이라고 말합니다.(마1;23; 참조, 이사8:8-10) 아기예수 탄생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하신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임마누엘 사건의 대표적인 예는 무엇인가요? 히브리 성경에 나오는 이집트 탈출사건(Exodus)인데요. 모세의 영도 하에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던 히브리인들은 탈출하게 되는데요. 이 때 하느님께서는 홍해를 열어 히브리인들을 구원하셨어요. 40년 동안 광야 떠돌이 생활을 할 때, 하느님은 밤에 불기둥으로 낮에 구름기둥으로 그들을 보호하셨어요. 배고프면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를 채워주셨어요. 목이 마를 때는 바위에서 생수가 솟아나게 해 주셨어요. 이와 같이 이스라엘은 그들과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을 밤낮으로 체험했던 것입니다.
헌데,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그들은 어떻게 행동했나요? 하느님을 배신했습니다. 대신 왕을 세워 섬겼어요. 이스라엘이 사는 길은 오로지 왕권을 강화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어요. 왕권에 반대하는 이스라엘민중을 억압하고 탄압했습니다.
이런 시대에 예언자들이 등장하지요. 그들의 메시지는 한결같았습니다. 우상을 버리고 하느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이었어요. 사회복지 정책을 펴서, 사회의 음지에서 힘들게 살아가야만 하는 약자들을 돌보라고 하셨어요. 그것이 진정한 예배라고 하셨어요.
허나 이스라엘 집권자들은 예언자들을 통해서 주시는 하느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어요. 하느님에 대한 불순종의 결과가 무엇이었나요? 멸망이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당했고(722), 남유다왕국은 바빌론에 의해 멸망당했습니다(587).
이스라엘 마지막 예언자 말라기 시대부터 아기예수 탄생까지 400년 동안 이스라엘은 하느님 부재(不在)의 역사를 경험했어요. 그야말로 어둠과 고난의 시기였습니다. 헌데 아기예수의 탄생에서 초창기 기독교인들은 임마누엘을 체험하게 되었어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임마누엘 사건은 어둠과 슬픔 속에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빛과 기쁨을 주는 사건이었어요. 아기예수의 탄생을 누가복음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불가능이 없다(Nothing is impossible with God)’(눅1:37)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라고 부연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임마누엘 신앙 위에 기독교는 정초(定礎)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하시면 불가능이 없다는 진리를 온 세상에 알리는 것이 기독교의 존재이유임을 알 수 있지요.
바울은 예수님과 동시대를 살았습니다. 허나, 살아생전 그 분을 뵌 적은 없었어요. 33년 경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바울은 신비체험 가운데서 부활의 예수를 만나는데요. 그 후 바울은 64년 네로황제 시절에 교수형을 당할 때까지, 30여년 동안 ‘예수메시아 복음’을 전파하는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소아시아와 유럽지역을 세 차례나 돌면서 복음을 전파했어요. 바울의 이러한 선교열정이 없었다면, 아마 기독교는 오늘날과 같은 세계적인 종교로 발돋움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울 이름으로 쓰여 진 편지가 신약성경에 13편이 있습니다. 그만큼 초기기독교 세계에서 바울의 영향이 컸다는 것을 보여주는데요. 그 중 갈라디아서는 바울사상의 특징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주고 있어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은 무엇인가? 율법이나 돈이나 명예를, 구하고, 얻고,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펙을 얼마나 많이 쌓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와 어떤 관계를 맺고 사느냐가? 그것이 사람다운 삶을 사는 기준이 되어야 하고, 인간의 운명과 구원을 결정짓는다는 것이었어요.
본문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 실존의 의미를 기독교인 입문의식인 세례와 연결시켜 밝히고 있어요.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나’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세례인데요. 세례의 의미를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나는 더 이상 나(에고)로 살지 않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다(zo ouketi ego, ze de en emoi Christos.).”으로 됩니다.
▲ 발랭탱 드 볼로냐 作 <사도 바울> |
더 이상 ‘나 없이(ouketi ego)’사는 것에서 바울은 크리스천 아이덴티티(Christian identity)를 찾았던 것 같아요. 그러면 ‘나 없이’ 산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요? 삶의 중심 교체입니다. 나에서 이웃으로, ‘사(私)’에서 ‘공(公)’으로 바꾸는 것이지요. 모든 인간사(人間事)의 문제와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온갖 고뇌는, 결국 ‘나’가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바울은 깊이 통찰했던 것 같아요.
‘나 없이’ 사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온갖 번뇌와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바울은 무아(無我; ouketi ego)의 삶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나’가 없다면, 내 것도 없고, 내 생각도 있을 수 없지요. ‘나’없이 살면 모두를 나로 삼을 수 있게 되지요. 내 것을 놓아버릴 때, 모든 것을 내 것으로 삼을 수 있고요. 내 생각을 놓아버릴 때, 다른 사람의 생각을 내 생각으로 삼을 수 있지요.
‘나 없이’ 산다는 것은, 나 아닌 것들과 관계 속에서 살며, 소통하는 삶을 산다는 뜻이지요. 이를 바울은 ‘내 안에(en emoi)’그리스도가 산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어요. 바울은 ‘나’가 따로 있고, 그리스도가 따로 있다는 생각을 버렸습니다. 나 없이 그리스도를 나로 삼고 살았던 것입니다.
나 없이 살 때만이, 인간은 나로 인해서 생기는 온갖 탐욕과 번뇌와 고통의 굴레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나 없이 사는 것이 진리 안에 사는 것이고, 진리를 알면 우리는 자유하게 할 것입니다(요8:31). 진정 자유인의 길은 ‘나 없이(우케티 에무)’ 사는 것이지요.
영어의 크리스천(Christian)은 크라이스트 인 맨(Christ in man)의 약자인데요. 내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사람이 크리스천이라는 뜻이지요. 예수를 나로 삼고 살 때, 내 인생의 주인으로써 참 자유인으로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19세기말 수운 최제우에 의해 동학이 창시되었는데요. 그는 모든 인간을 하느님을 모신 존재로 보았습니다. 시천주(侍天主) 사상인데요. 하느님을 모신 인간의 특징을 그는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어요. 첫째, 내 안에 하느님의 신령스런 기운이 계심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내유신령(內有神靈)인데요. 기독교적으로 풀면 성령의 내주內住 사상이지요(고전3:16). 이는 하느님나라는 네 안에 있다는 말씀과도 통하지요.(눅17:21) 항상 내 안에 계신 성령과 접속(接續)되어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을 모신 삶입니다.
둘째, 하느님의 신령스런 기운은, 나 밖의 이웃이나 사회 그리고 우주만물에 편재(遍在)하고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우주만물의 생성변화는 모두 그 기운의 작용이라는 것이지요. 외유기화(外有氣化)입니다. 해월은 이를 사람 대하기를 하느님처럼 하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 사상으로 풀고 있어요.
도마복음에는 “너희 안과 밖”에 있는 하느님나라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요(3장). 나와 나를 둘러싼 주변 환경에서 하느님나라를 찾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의 밥상교제(table koinonia) 운동이나 귀신축출 운동도 외유기화(外有氣化)의 지평에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각지불이(各知不移)인데요. 우리 각자가 우주만물의 순리를 확실히 알고, 거기에서 한 치의 벗어남이 없이 사는 것이지요. 양심의 결에 따라 사랑(仁), 바름(義), 배려(禮), 분별능력(知)을 갖고 사는 것이 시천주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법(nomos tou Christou)’에서 이탈하지 않고 살라는 바울의 권면과도 통하는 말씀입니다.(갈6:2)
내 안과 밖에 하느님의 영이 편만(遍滿)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신령스런 영의 법도(法道)에서 한 치의 벗어남이 없이 사는 것이 하느님을 모신 시천주(侍天主)의 삶인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을 모신 존재라는 ‘시천주적 인간이해’와 하느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창조된 것이 사람이라는 ‘히브리적 인간이해(창1:27)’는 인간 존엄과 인간 평등을 두 축(軸)으로 하는 인류휴머니즘 사상의 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정의가 실종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1%의 자본가계급과 그들의 시녀로 전락한 정부권력에 의해서, 99%의 국민 절대다수가 불평등한 사회구조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당한 채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아기예수의 탄생은 어둠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과 희망을 밝힌 사건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 임마누엘 사건입니다. 우리가 불가능하다고 체념했던 일을 가능하게 만든 사건이었어요.
한 사람의 꿈은 그 자체로 끝나지요. 허나, 여럿이 함께 꾸면 현실이 됩니다. 간절히 염원하면, 우주에 편재한 긍정적인 기운들이 우리의 소망을 이루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믿든 안 믿든, 우리의 믿음대로 된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하느님을 모신 사람들에겐 모든 것이 서로 작용하여 선을 이룹니다. 이러한 존재에 대한 절대 긍정신앙을 아기예수의 탄생은 다시 한 번 일깨워줍니다. 임마누엘 하느님 신앙위에 굳게 서서, 여러분의 꿈을 이루어가는 대림절 기간이 되길 빕니다.
김명수(경성대명예교수,충주예함의집) kmsi@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