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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예수(little Jesus)

기사승인 2015.10.07  15: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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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수 칼럼>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하면, 가서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2.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근심을 하면서 떠나갔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23.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24.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19:21-24; 새번역)

Jesus said to him, "If you wish to be complete, go and sell your possessions and give to the poor, and you will have treasure in heaven; and come, follow Me." 22.But when the young man heard this statement, he went away grieving; for he was one who owned much property. 23.And Jesus said to His disciples, "Truly I say to you, it is hard for a rich man to enter the kingdom of heaven. 24."Again I say to you, it is easier for a camel to go through the eye of a needle, than for a rich man to enter the kingdom of God."(Matthew19:21-24; NASB)

사람은 각각 다르게 생겼습니다. 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난 자식들이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긴 모습이 다르고요, 성격이나 생각도 다르지요. 행동이나 취미도 각기 다릅니다. 왜 다를까요? DNA 차이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도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살아오면서 형성된 삶의 습관이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현재 내 모습은 무엇인가요? 지금까지 내가 살아오면서 길들여진 습관이 축적된 결과물인데요. 습관이 축적되면 업業을 형성하게 되는데요. 이를 불교에서는 까르마라고 하지요. 나는 무엇인가? 곧 까르마의 결과이지요. 따라서 현재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가 살아온 과거의 까르마가 대충 짐작이 가지요. 

저는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고 평생을 살아왔는데요. 한 학기 동안 학생들을 가르치고 나면, 기말고사를 치르게 됩니다. 제가 교수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들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일이 학생들 답안지를 채점하는 것이었어요. 요즈음은 학생들도 교수를 평가하는 제도가 생겼어요. 교수가 학생들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시대가 되었지요.

학생들이 제출한 답안지를 살펴보면요, 같은 내용이 하나도 없습니다. 내 수업을 똑같이 들은 학생들인 데도, 학생들 답안지는 백인백색이지요. 제가 기대하고 있는 답을 쓰는 학생은 10% 정도에 불과합니다. 예를 들면 열 명 중 한 두 명 꼴입니다. 전혀 엉뚱한 답을 쓰거나 아예 백지를 내는 학생들이 20% 정도 돼요. 만약 열 명이 제 강의를 들었다면, 한 두 명 정도 a학점을 받고요. d학점 이하의 점수를 받는 학생이 두 세 명이 되지요. 나머지는 b학점이나 c학점을 받습니다. 

같은 교수 밑에서 같은 내용의 수업을 듣는 데도요.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제 강의를 이해하는 수준이 학생마다 각기 다르기 때문이지요. 수준은 무엇인가요? 공부하는 태도가 축적된 까르마이지요.

저는 첫 시간 수업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학생들의 수업태도를 살핍니다. 수업태도를 보면, 그 학생의 학기말 성적이 얼마 나올까 예측이 가능하기 때문이지요. 강의시간에 일찍 들어와 앞자리에 앉거나, 강의를 집중해서 듣는 학생, 필기 열심히 하고 질문 자주 하는 학생은 소수인데요. 주로 a학점을 받게 될 확률이 크지요. 강의시간에 늦게 들어와 뒷좌석에 앉거나, 필기도 안하고 질문도 하지 않는 학생들이 있어요. 강의시간에 딴 생각하고 있는 학생, 여자 친구와 데이트할 것을 생각하거나 영화관에 생각이 가 있는 학생들이 있어요.

수업시간 내내 핸드폰으로 문자 날리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몸은 강의실에 있는데, 생각은 딴 데 가 있는 학생들이 학기말에 좋은 학점 받을 리가 없지요. 초중고 시절에 공부하는 습관을 들여놓은 학생은 대학에 가서도 열심히 공부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런 습관이 들여지지 않은 학생은 반대 결과를 낳게 되지요. 까르마가 그 사람의 현재 운명을 결정짓기 때문입니다.

저는 점쟁이는 아닙니다만, 얼굴표정을 보면 여러분이 어떠한 과거를 살아왔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어요. 제가 지금 여러분의 얼굴표정을 살펴보고 있는데요. 웃는 표정을 하고 계신 분도 계시고요. 성난 얼굴을 하고 계신분도 있습니다. 무엇인가 못마땅하여 찌푸린 표정을 하고 계신 분도 계시네요. 마음의 상태가 얼굴표정에 담겨있습니다. 마음이 평안할 때 얼굴표정도 밝고요. 마음이 불안하면 얼굴표정도 어둡게 되지요.

어느 날,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여쭈었습니다. “선생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그러자 예수께 대답하시지요. “..., 계명들을 지키면 되네.”“무슨 계명을 말씀하고 계신지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그러자 젊은이가 예수께 말했어요. “그런 계명들은 다 지켰는데요. 아직도 부족한 게 있습니까요?” “자네가 온전한 사람이 되고자 하면, 가서 자네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시게. 그러면 하늘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네. 그런 다음 나를 따르시게.”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그 부자 젊은이는 어떻게 행동했나요? 심히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합니다.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딸려 있어요. 이 부자 젊은이에게 문제는 무엇인가요? 재산이 많은 것인가요? 아닙니다. 재산이 많은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재산에 대한 집착이 문제이지요. 재산이 많은 것 자체가 염려근심의 원인이 될 수 없어요. 재산에 대한 집착이 염려근심의 원인이지요. 재산에 집착하면 어떻게 되나요? 재산에 매이게 됩니다. 재산에 매이면 어떻게 되나요? 재산이 내 인생의 주인으로 군림하여 나를 부리게 되지요. 그러면 평생 돈이나 명예의 노예가 되어 끌려 다니는 신세가 됩니다.

예수께서 부자가 구원받는 길을 제시했을 때, 부자 젊은이는 어떻게 행동했나요? 사람답게 사는 길, 곧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사는 길을 제시했을 때, 그는 어떻게 행동했나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지요. 왜 거부했나요? 이미 그는 재산의 주인이 아니라 노예가 된 상태였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참 자기’가 되는 영생의 길을 포기했던 것이지요.

영원한 생명은 무엇인가요? 영생은 구원과 동일한 의미로 쓰이고 있는데요, 시간적으로 영구히 지속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이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영생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하나님의 아들딸로서, 언제 어디서든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주체적으로 자유자재하게 사는 것입니다.

재산이 많은 젊은이는 모세의 십계명만 어기지 않고 잘 지키는 생활을 하면 영생과 구원을 얻을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십계명을 철저히 지키는 삶을 살았던 것이지요. 물론 십계명 지키는 것도 필요하지요. 예수께서 이 점을 부인하지 않았어요. 헌데 종교적 계명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지요.

부자 젊은이가 돌아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무어라고 말씀하나요?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부자가 천국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이 말씀을 우리는 흔히 부자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어요. 헌데, 예수께서는 그런 의미로 하신 말씀이 아니지요. 오히려 그와 정반대입니다. 부자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는 말씀이지요. 적극적인 의미로 해석해야 합니다.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려면 정문과 쪽문이 있어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정문을 이용하지요. 허나 해가 넘어가면 정문은 닫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곳으로 드나들 수 없게 되지요. 그래서 늦게 도착한 사람들은 부득이 작은 쪽문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는데요.

이 쪽문을 ‘트뤼마 라피도스’이라고 부르지요. 번역하면‘바늘귀’라는 뜻이지요. 성문이 닫힌 후에 예루살렘에 도착한 대상隊商들은 이 바늘귀와 같이 작은 쪽문을 이용하여 성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데요. 낙타에서 짐을 전부 내려놓는다 해도, 이 쪽문은 간신히 사람들만이 드나들 수 있기에 낙타가 통과하기는 힘들다고 합니다. 

부자가 천국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문에 들어가기보다 어렵다는 예수님 말씀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단정한 말씀이 아니지요. 불가능하다는 말씀이 아니라 어렵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지요.‘트뤼마 라피도스’는 ‘불가능한 가능성’(impossible possibility)을 말하고 있어요. 이 말씀은 부자들에 대한 저주로 받아들인다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 부자들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해주고 있는 말씀으로 읽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제시한 영생의 길이 무엇인가요? 마태복음에서는 온전한 사람이 되고자 하면,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  헌데 다른 복음서에서는 “자네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있네.”로 되어 있어요.(막10:21; 눅18:22) 아마도 마태복음 저자는 오리지널한 예수말씀을 교회의 신학적 목적에 따라 수정한 것 같아요.

저는 본문에서 말하는 ‘영생’은 다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람이 사람다운 삶을 사는 것이고, 사람답게 사는 것이 영생이고 구원이지요. 무엇이 사람다운 삶이고 사람답게 사는 것일까요? 위로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고, 아래로는 가난한 사람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삶일 것입니다. 이를 <노자>는 화광동진(和光同塵)으로 풀고 있어요.(4장) 위로는 빛과 조화를 이루고, 아래로는 민民과 하나 되어 사는 삶이 도의 길이고, 곧 영생을 얻는 길이라는 뜻이지요.

사회의 소수자인 민民과 하나 되는 ‘나눔의 삶’(sharing life) 없이 영생과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마치 연목구어(緣木求魚)와 같은 행태라는 것입니다. ‘나눔의 삶’을 우회(迂回)한 구원의 길은 없다는 선언이지요. 나눔이야말로, 부자들을 구원에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선언이지요.

부자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어려운 것 같지만, 생각하기에 따라 그 길은 가장 쉬운 데 있음을 보여주고 있음을 보여주지요. 재산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리고, 이웃과 나누며 살면 됩니다. 이웃과 나는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밀접하게 연결된 공동운명체임을 아는 것이지요. 이웃이 죽으면 결국 나도 죽게 되고, 이웃을 살리는 길이 내가 사는 길임을 깨닫고 살면 되지요.

예수님은 구원이나 영생을 개인의 문제로 한정시키지 않았어요. 공공(公共)의 문제로 보았어요. 전체의 문제로 보았던 것입니다. 예수에게는 ‘나의 구원’이 아니라, 다만 ‘우리의 구원’이 있을 뿐이지요. 영생이나 구원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입니다. 사적(私的) 차원의 일이 아니라 공공(公共) 차원의 일이었지요. 

   
▲ 예수님은 구원이나 영생을 개인의 문제로 한정시키지 않았어요.

개인의 문제를 비롯해서 우리가 겪고 있는 인간사회의 모든 문제는 ‘나’라고 할 만한 실체가 따로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지요. ‘나’에게 집착하게 되면, 나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내 것’이 있어야 하고, 나를 방어할 ‘내 주장’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인간사(人間事)의 모든 문제는 결국 ‘나’의식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예수의 삶에는 사(私)가 따로 없어요. 도대체 ‘나’가 없습니다. 무사(無私)이지요. 서가모니의 무아(無我)와 통합니다. ‘나’가 없으니, 예수에게는 ‘내 소유’도 없어요. ‘나 의식’도 없습니다. 이른바 예수에게서‘메시아 의식’은 ‘나’의식이 아니라 ‘공공(公共)’의식입니다. 메시아 의식은 예수 개인의 생각으로 나를 삼는 것이 아니라, 민民의 생각으로 나를 삼은 것이지요. 길, 진리, 생명을 ‘나’라고 했을 때, 여기에서 ‘나(ego)’는 개체 예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나(universal ego)’또는 ‘공공의 나(public ego)’를 뜻하지요. 그런 면에서 여러분과 저는 예수의 분신(分身)이 돼야하며, ‘작은 예수’(little Jesus)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 삶의 스타일은 무소유(無所有), 무혈연(無血緣), 무연고(無緣故)로 성격 지을 수 있어요.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이 살았으니, 예수는 당연히 내 소유, 내 가족이나 연고에 매이지 않고 자유자재하게 살았던 분이지요.

예수는 민(民)을 자기로 삼았습니다. 민(民)의 것을 자기 것으로 삼았습니다. 민民의 생각을 자기 생각으로 삼았습니다. 예수는 민民의 화신(化身)이요, 민(民)은 예수의 화신(化身)이었습니다. 민(民)으로 하여금 하나님나라의 주인으로써 사람답고 사람다운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 예수께서 펼친 하나님나라 운동의 궁극적인 지향점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헌데, 오늘 날 한국교회의 현주소는 어떤가요? 예수가 섬겼던 공공(公共)의 민(民)이 실종된 사적제의종교(私的祭儀宗敎 privatus cultus relegionus)가 돼버렸어요. 영생이나 구원도 개인의 사적(私的)인 신앙 차원으로 환원되었습니다. 기독교는 어디에 근거하여 자아정체성을 찾아야 하나요? 역사적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서 찾아야 한다면, 역사적 예수에로의 회향(回向)이야말로 한국교회가 ‘복음의 본래성’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것입니다.

김명수(경성대명예교수,충주예함의집) kmsi@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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