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명수 칼럼 - 삶은 소유가 아닌 존재>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 5.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마5:3-5; 새번역) 나는 모든 일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이렇게 힘써 일해서 약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주 예수께서 친히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 하신 말씀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사도20:35; 새번역) |
1990년 저는 독일에서 신학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후 부산에 있는 대학에서 직장생활을 했는데요. 그곳에서 제 인생의 절반을 보냈습니다. 아침에 출근하다보면요. 지하철이나 길거리에서 전도지 나누어 주는 사람들과 자주 부딪치게 되는 경우가 있었는데요. 그들 중에는 특히 대형교회 교인들이 많이 눈에 띠었습니다. 휴지 몇 장 들어있는 조그만 비닐봉투 하나씩 나누어 주면서, 한 마디 하지요. “우리교회 오셔서 예수 믿고 복 많이 받으세요.”복이란 것이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지, 예수 믿으면 어떻게 복 많이 받을 수 있다는 것인지 잘 알 수 없지만, 하여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복 받게 해 준다는데 싫어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유교의 5대 경전 중에 『서경』이 있어요. 이 책에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복에 대해서 말하고 있어요. 대대로 우리 조상님들이 강조해온 오복도 서경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따온 것인데요. 대략 다섯 가지 형태로 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꼽는 복이 장수長壽에요. 오래 사는 것이지요. 아마도 옛날에는 육십까지 사는 사람들이 드물었던 것 같아요. 평균수명이 40세정도였으니까, 육십세까지 살면 장수했다고 생각하여 환갑잔치를 벌였던 것 같아요. 헌데, 지금은 어떤가요? 우리국민 평균 수명이 자그마치 81세입니다. 팔십을 살아야 평균으로 사는 장수시대가 되었어요. 우리 모두 장수의 복을 받은 것입니다.
실은 오래만 산다고 해서 복은 아니지요. 병 없이 무병장수하는 게 축복입니다. 병원에 가보면 80% 이상이 노인들로 차 있어요. 병든 몸으로 병원과 약에 의존해서 근근이 목숨만 유지하면서 장수하는 것은 결코 복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오래 사는 것 자체에 목을 맬 일은 아닙니다. 얼마나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지요.
두 번째로는 재복財福을 들고 있습니다. 돈 많은 복이지요. 물질적으로 넉넉하게 사는 것을 복이라 했습니다. 재물은 적당히 있는 게 좋습니다. 너무 적으면 생활이 궁색하게 되고요, 너무 많으면 교만하게 됩니다. 화근이 되어 가정파탄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어요. 돈 때문에 부모를 살해하는 자식들도 있고요. 요즈음 신문지상에 한창 떠들고 있는 롯데재벌의 재산을 둘러싼 형제간의 혈투는 모두 돈이 많아 생기는 불행들이지요. 돈은 너무 적어도 문제이지만, 너무 많아도 문제입니다. 적절한 수준에서 만족하며 사는 것이 지혜롭지요.
셋째로는 건강 복을 말하고 있어요. 이 있습니다. 돈 잃으면 부분을 잃는 것이지만, 건강을 잃으면 전부를 잃는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지요. 비록 집안에 천만금을 쌓아놓고 있다한들, 건강을 잃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건강이 중요합니다. 헌데 반드시 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건강한 몸을 어디에 써먹을 것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건강 자체보다도 건강한 몸으로 무슨 일을 하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사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건강한 몸을 굴리면 어찌 되나요? 대인관계가 파탄나지요. 이웃에게 해롭게 하는 일이 아니라, 가정과 사회를 이롭게 하는 일에 써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이 복이 되는 것이지요.
넷째로, 선행을 복이라고 했어요. 세상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공부하지 않는 자식을 두고, 좋은 대학 합격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사적인 욕망에 눈이 가리어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콩 심어놓고 팥 나기를 바란다거나, 팥 심어놓고 콩 나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요행을 바라는 마음입니다. 말기 암 판정을 받은 환자에게 당신은 기도하면 삽니다. 성경에 “믿는 자에겐 능치 못함이 없다”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라고 한다면, 이것은 창조질서를 거스르는 말이지요.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 세상이치요, 우주만물의 질서입니다.
예수님은 무어라고 말씀하셨나요?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했어요. 왜 그랬을까요? 다른 사람에게 선한 일을, 반드시 그 대가가 자기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지요. 당장 코앞의 작은 이익에 눈이 멀어, 다른 사람을 해치거나 불행하게 만들어놓고, 그 위에 내 행복을 쌓으려고 하면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 불행이 언젠가는 반드시 자기에게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굴리시는 인과응보 법에서 비켜갈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인생은 약간 손해 보며 사는 것이 지혜로운데요. 당장은 내게 손해인 것 같지만, 그것이 결국 나를 이롭게 하지요. 세상엔 공짜가 없기 때문이지요. 친구들과 식사를 하면 먼저 돈을 내는 편인데요. 우선 마음이 찜찜하지 않아 좋습니다. 마음이 편하니 소화가 잘 되지요. 친구와의 인간관계도 좋아지지요. 돈 몇 푼 내고 이렇게 많은 것을 얻게 되지요.
직장생활도 마찬가지에요. 특히 <예함의집>과 같은 요양원은 서비스 업무에 종사하는 직장에서는, 나 혼자 하는 일보다 다른 동료와 협동해야 되는 일들이 많지요. 상부상조하는 정신이 없으면 힘든 직장입니다. ‘이것은 나에게 손해다 이익이다. 득이 된다. 실이 된다.’이렇게 하나하나 이해득실을 따져서 일을 한다면, 직장생활이 엄청 피곤하게 되지요. 불평불만 스트레스가 쌓이게 됩니다. 내가 좀 손해 보는 한이 있더라도, 상대방이 꺼리는 일을 내가 먼저 해 보세요. 우선 내 마음이 편하게 되고요. 상대방과의 인간관계도 원만하게 됩니다. 그러면 비록 말로 표현하지 않을지는 몰라도요. 상대방도 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게 됩니다. 그에게도 양심이 있기 때문이지요. 자기 자신을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의 법인 양심은 속일 수 없지요. 진실은 모든 사람에게 통한다는 것이 제 믿음이고 소신입니다.
인간은 모두 다 태어날 때부터 ‘양심의 법’과 ‘에고의 법’을 가지고 태어나지요. 양심은 이웃, 사회, 세계를 나로 보고 행동하도록 합니다. 양심은 ‘큰 나’(大我)를 바라보게 합니다. 허나, 에고는 내 한 몸둥아리를 나로 보고 행동하도록 하지요. ‘작은 나’(小我)에 집착하게 만듭니다. 이 두 법 사이에서 인간은 살아가지요. 에고에 따라 행동하면 어찌 되나요? 당장 나에게는 이로운 것 같은데요.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찜찜한 경우가 있지요. 양심에 따라 행동하면 어찌 되나요? 당장 나에겐 손해인 것 같은데도 마음이 편하게 되지요. 양심이 에고를 콘트롤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양심이 작동하는 삶을 살 때, 인간다운 삶이 가능하게 되지요.
우리 주변에는 소탐대실小貪大失하는 사람들을 자주 보지요. 작은 것을 욕심내다가 큰 것을 잃게 되지요. 어리석은 짓입니다. 당장은 손해 보는 한이 있더라도, 큰 이로움을 얻는 삶, 곧 소손대익(小損大益)의 삶을 사는 것이 양심의 법에 따르는 지혜이지요.
다섯째로, 제 명대로 살다가, 편히 눈 감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했어요. 천수를 누리고 죽는 것을 고종명考終命이라고 합니다. 누구나 다 죽게 마련이지요. 허나, 언제 죽을지 아는 사람은 없어요. 죽음은 그 사람의 인생을 총 결산하는 것이지요. 잘 죽어야 합니다. 잘 죽기위해서는 어찌 해야 하나요? 잘 살아야 하지요. 죽음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지요. 내 자손이나 평소에 관계를 맺었던 지인知人들의 기억 속에 나는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지긋지긋한 부모로 기억된다면, 실패한 인생을 산 것이에요. 자식들에게 좋은 아버지로 기억되고 아름다운 어머니로 기억되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 하고 잘 죽어야 합니다.
한국교회 신도들은 특히 복 받기를 좋아하는데요. 대부분 사회적으로 성공 출세하여, 돈 많이 벌거나 명예 얻는 것을 복 받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복 하면 뇌리에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가요? 불로소득입니다. 공짜나 요행을 바라는 마음이지요.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는 성경말씀이 있어요.(살후3:10) 롯또나 도박과 같은 요행심이나 사행심을 조장하는 일은 성경의 진리에 위배됩니다.
▲ (사진: 부산문화재단 전자아키브) |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는 사람들이 복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마5:3-20)
이를 팔복이라고 합니다. 누가 복 받은 사람들로 거명되나요? 부자들이 아니고요. 만사형통하여 기뻐하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자기 이익만 구하는 사람들이 아니고요. 돈 벌어 혼자 잘 먹고 잘 쓰는 사람들이 아니지요. 마음이 탐욕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아니고요. 상대방의 불행위에 자기 행복을 쌓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지요.
팔복 복 중에, 저는‘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받는 복이 으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돈의 유혹을 물리치기 어려운 세상에서 살고 있어요. 실상은 그렇지도 않은데요.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는 허황된 믿음을 갖도록 우리사회에서 매스컴은 부추기지요. 돈의 노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는 예수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청빈淸貧하게 살고, 스스로 가난하게 사는 삶이 복되다는 것을 깨달아야합니다. 그래야 돈의 유혹이나, 세속적인 탐욕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어려서부터 가난이 몸에 배었습니다. 출가出家후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면서도 가난하게 사셨어요. 배가 고파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드시기도 했고(막3:23), 속 옷 두 벌도 지니지 않으셨어요(마10:9). 머리 둘 방 한 칸 없이 뜨내기 생활을 하신 분이지요(눅9:58). 예수님은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며 그들의 파트너partner로 사셨어요.
예수님은 무엇 하나 제 것으로 삼지 않으셨어요. 청빈하게 사셨어요. 청빈은 가난과 다릅니다. 형편이 어려워 궁핍하게 사는 것, 곧 일종의 강요된 빈곤을 일컬어 가난이라 하지요. 허나, 청빈은 자발적으로 가난을 선택하는 삶이지요. 무소유가 청빈이지이요.
무소유는 무엇인가요?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요. 내게 불필요한 것을 소유하지 않는 것이지요. 쓸데없는 것을 가지려고 욕심내지 않는 것이지요. 절약과 절제입니다. 하루 세 끼 굶지 않고, 비바람 피할 수 있는 것으로 감사하고 만족하며 사는 삶이지요.
사실, 이 세상에 내 것 아닌 게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게 내 것인데, 내 것이 아닌 줄 알고, 내 소유로 독점하려는 욕심에서 온갖 고통과 번뇌가 싹트게 되지요. 등산하다가 예쁜 꽃을 보면 그냥 보고 즐기면 되지요. 그것을 굳이 캐어 내 마당에 옮겨 내가 독점해야만 직성이 풀린다면, 그것은 욕심이지요. 소유욕입니다. 꽃을 보고 그 자리에서 즐기는 것으로 끝내면 됩니다. 문제는 견물생심이 되어, 본 것을 따라가고 바라고 독점하려는 데서 발생하게 되지요. 사물을 본 그 자리에서 멈추고, 내 소유로 취하지 않는 것이 존재로 사는 무소유의 삶이지요. 어느 누구도 독점할 수 없는 게 생명의 속성입니다.
삶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입니다. 소유(to have)를 내 것으로 삼지 말고, 존재(to be)를 내 것으로 삼고 살면 됩니다. 이 세상에는 내 소유란 따로 없습니다. 단지 소유란 생각이 있을 뿐이지요. 모든 것이 쓰는 사람에 따라 내 것이 되기도 하고요. 네 것이 되기도 하지요. 그것도 잠시 동안 빌려 쓰는 것이지요. 죽을 때 모든 인간은 빈손으로 가게 됩니다. 그 점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합니다. 지나치게 이해득실을 따져, 현실을 고통스럽게 살 일이 아닙니다.
강원도 한 제자 집에 들렀을 때입니다. 내일 떠나는데도, 오늘 아침에 일어나 땀 흘리며 마당 한 귀퉁이에 감나무를 심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본 제자가 물었습니다. “내일 떠나시는 마당에, 오늘 감나무를 심어 무엇에 쓰려고 하십니까?”해월이 대답했어요. “다음에 이 집을 방문한 사람이, 내가 오늘 심은 나무에서 감을 따 먹는다고 해서 안 될 일이라도 있겠는가?”오늘 감나무를 심는 것은, 다음에 누군가 이 집을 방문해서 감을 따먹게 될 기쁨에 미리 참여하기 위해서이지요. 이게 진짜 복이지요.
바울은 산상설교에 버금가는 보석 같은 예수의 진정한 말씀을 전해줍니다. 예수를 만난 이후, 바울은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복음을 전파하고 약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을 몸소 보였습니다. 그는 에베소 장로들에게 주옥같은 주님의 말씀을 전해줍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되다”는 예수님 말씀이지요.(행20:3) 우리는 구하고 바라는 것을 얻음으로써 복되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 생각은 달랐어요. 약자들과 나누면서 스스로 청빈하고 가난하게 사는 삶이,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 더 못 가져 안달하는 사람보다 훨씬 복된 삶을 살고 있다고 하셨어요.
부자가 많다고 해서 좋은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가난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아야 합니다. 성장이 아니라, 나눔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지요. 모든 것은 나누면 불어납니다. 줄어들지 않습니다. 사랑과 정의와 희망은 나눌수록 더 커집니다. 한 사람의 희망이 우리 모두의 희망이 될 때, 그 희망은 역사를 바꾸어놓게 되지요. 우리는 갈만한 길이라서 가는 게 아닙니다. 가야만 하는 길이기에 가는 것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든, 여러분의 생각대로 될 것입니다.
선한 것을 생각하면, 우주에 편재한 선한 기운(에너지)들이 모여들어 여러분을 선한 생각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가난을 실천하는 삶을 살기를 빕니다. 협동과 배려의 삶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을 풍요롭게 하는 복의 통로가 되는 여러분이 되길 빕니다.
김명수(경성대명예교수,충주예함의집) kmsi@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