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명수 칼럼>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들어갔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곧바로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에 놀랐다.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그 때에 회당에 악한 귀신 들린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큰소리로 이렇게 말하였다. “나사렛 사람 예수님, 왜 우리를 간섭하려 하십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입니다.” 예수께서 그를 꾸짖어 말씀하셨다. “입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나가라.” 그러자 악한 귀신은 그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서 큰 소리를 지르며 떠나갔다. (마가복음1:21-26; 새번역)
They went into Capernaum; and immediately on the Sabbath He entered the synagogue and began to teach. 22.They were amazed at His teaching; for He was teaching them as one having authority, and not as the scribes. 23.Just then there was a man in their synagogue with an unclean spirit; and he cried out, 24.saying, "What business do we have with each other, Jesus of Nazareth? Have You come to destroy us? I know who You are--the Holy One of God!" 25.And Jesus rebuked him, saying, "Be quiet, and come out of him!" 26.Throwing him into convulsions, the unclean spirit cried out with a loud voice and came out of him. (Mark1:21-26; NAS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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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2천 년 전입니다. 예수께서는 근동에 위치한 팔레스타인의 변방 갈릴리 나사렛에서 태어났습니다. 한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지요. 복음서는 예수의 유년과 소년 시절 이야기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어요. 단지 한 두 가지 단편적인 이야기들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지요.
어린 나이에 부친을 여읜 것으로 짐작됩니다만, 예수는 일찍이 가족부양의 책임을 떠맡아야 했을 것입니다. 서른 살까지 독신으로 지내야했던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동생들이 성장하여 경제활동을 시작하자, 예수는 가족부양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는 큰 뜻을 품고 출가(出家)했습니다. 가정과 고향을 떠났어요. 갈릴리 변방에 있는 시골마을들을 이곳저곳 떠돌며,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농민들의 실상(實相)을 두루 살폈을 것입니다.
요단강에 이르렀을 때였지요.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어요. 털이 덥수룩하게 난 한 사람이 청중을 향해 힘차게 외쳤어요. 호기심이 발동한 예수는 가까이 가서 그의 외침을 들었습니다. “회개하라! 하나님나라가 임박했다.”
사탄에 의해 조종되는 ‘현 에온(시대)’가 끝나가고, 하나님에 의해 통치될 ‘새 에온(시대)’이 임박했다. 이를 준비하는 회개(메타노이아)의 삶을 살아야 한다. 요한의 설교는 예수에게 신선하게 들렸고, 아주 충격적이었어요. 새 시대를 준비하는 회개의 징표로, 사람들은 요르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도 사람들을 따라 요르단강에 들어갔습니다.
예수께서 세례 받는 장면을 복음서들은 일제히 소개하고 있어요.(막1:9-11; 마3:13-17; 눅3:21-22) 그만큼 예수의 수세사건(受洗事件)이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는 반증(反證)인데요. 물에서 올라오면서 예수는 하늘이 갈라지고 거룩한 영이 내려와 자신의 머리 위에 임하는 것을 보게 되지요. 그 때 하늘 소리(天語)를 듣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네 존재 자체가 내 기쁨이다.”
수세사건(受洗事件)은 예수에게 일어난 일종의 신비체험인데요. 이것은 예수에게 자기존재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한 일종의 회개(메타노이아)사건이었어요. 죄를 뉘우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한 생각을 바꾼다는 의미에서이지요.
예수는 자기를 누구라고 생각했나요? 나사렛 촌부(村夫)로 생각했어요. 별 볼일 없는 촌놈으로 알았지요. 그런데 수세사건을 계기로 자기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자기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기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자존감(自尊感)을 얻게 된 것입니다.
헌데 유의할 것이 있어요. 회개는 ‘존재의 변화’가 아니라, ‘생각의 변화’ 또는 ‘의식의 변화’를 뜻하지요. 나사렛 촌부村夫인 내가 ‘지금 이대로’ 하나님 아들이라는 자아인식의 일대 전환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와 그리스도의 일여(一如)’ 체험이지요.
예수는 거룩한 영에 이끌리어 곧장 유대광야로 나가지요. 모래와 돌과 바람뿐인 삭막한 광야였어요. 광야 체류 40일 동안은 예수에게 치열한 내적 투쟁 기간이었어요. 사탄을 ‘인격적 실재’로 체험했어요.
사탄이 물음을 던지지요. “자네가 진정 하나님 아들이라면 저 돌들을 가져다가 빵으로 만들어보시게.” 그렇게 하면 진정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겠다는 것이었어요. 배고픔을 이용하여 예수가 얻게 된 하나님 아들 의식을 의심케 하려는 유혹이었지요.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답변이었어요. ‘빵 없이(without bread)’ 살 수는 없지요. 허나 ‘빵만으로(only bread)’ 살 수 없다는 것이지요. 예수는 ‘만(only)’의 사고를 경계했어요.
‘빵’이 ‘빵만’이 되고, ‘돈’이 ‘돈만’이 될 때, 문제가 생기지요. 빵이 빵만이 되면 어찌되나요? 빵에 매이게 됩니다. 돈이 돈만이 되면 어찌되나요?, 돈의 노예가 되고 말지요. ‘경제성장’이 ‘경제성장만’이 되면 어찌 되나요? 국민의 절대다수는 비정규직으로 전락하고, 경제민주화와 보편복지는 실종됩니다. “이웃사랑하기를 네 몸처럼 하라‘는 예수의 말씀은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인간세(人間世)의 모든 문제는 ‘만의 사고’와 연결되어 있지요. 예수는 무엇이든지 우상화, 절대화, 획일화 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했고, 그 배후에는 사탄의 계략이 숨어있는 것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사탄의 유혹을 이겨낸 예수는 어디로 가나요? 가버나움입니다. 갈릴리호수 근방에서 시몬 형제와 세베대오의 아들 야고보 형제를 제자로 삼습니다. 그들과 함께 예수는 가버나움으로 갑니다. 중소도시인데요, 때마침 안식일이었어요. 예수는 회당에 들어가 설교를 하셨어요. 무슨 내용인지 말하고 있지 않지만, 그의 설교는 청중들을 놀라게 했어요. 바리새파사람들과 달리 권세가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마침 그 때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설교를 들었어요. 그가 큰 소리로 외칩니다. “나사렛 예수님, 왜 우리 일을 간섭하려고 하십니까? 우리를 내쫓으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까? 나는 당신이 누군지 알지요.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하지요. “입 다물고,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그러자 더러운 귀신은 그에게 경련을 일으켜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떠나갔다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공생애(公生涯)를 시작하면서 행하신 첫 번째 사건이었는데요. 예수께서 펼친 하나님나라 운동의 성격을 결정짓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나라 운동은 무엇인가요? 한마디로 ‘귀신 내 쫓는 운동’이었다는 것이지요.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지요. 당신을 닮은 사람을 만드시고 심히 기뻐하셨다고 했어요.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아닌가? 헌데, 왜 고통과 번뇌 속에서 살아야 하나? 왜 갈릴리 농민들은 일 년 동안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가난과 배고픔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 없는가? 사회의 부조리와 불평등의 기원은 무엇인가?
인간의 실존적 고통, 사회적 불평등의 기원을 예수는 어디에서 찾았나요? 사탄의 지배에서였지요. 인간을 실존적 고통과 사회적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는 길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자녀로써의 자존감(自尊感)을 갖고 사회의 소수자들이 사람답고 사람다운 삶을 사는 길은 무엇인가?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세(人間世)를 지배하는 사탄의 세력을 몰아내는 길밖에 없다고 예수는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에게 있어서 귀신축출 사건은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의미했고, 하나님나라의 도래는 귀신축출을 의미했던 것이지요.(눅10:17-18)
예수께서 귀신들린 사람을 꾸짖으며 말씀하셨어요. “입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나가라.”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악한 귀신은 그에게 경련을 일으켜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떠나갔다고 되어 있어요. 이 귀신 내쫓은 사건으로, 예수님의 소문이 갈릴리 전역에 퍼졌고요, 졸지에 예수님은 유명인사가 되었다는 것이 본문이 말하고 있는 줄거리입니다.
여러분 어때요? 귀신이 실제로 있다고 믿으세요? 근대의 과학적인 세계관을 공부한 현대인들에게 귀신은 실재가 아니지요. 그것은 정신착란증세요, 정신질환의 한 형태로 보기 쉽습니다.
허나 예수는 사탄을 ‘영적 실재(spiritual reality)’로 보았어요. 인간의 삶을 규제하고 사회 시스템을 조종하는 구조악(structural evil)을 사탄의 작용으로 보았던 것이지요. 바람은 눈으로 볼 수 없지요. 허나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을 보면, 바람의 실재를 느낄 수 있습니다. 사탄의 실재도 이와 같습니다. 눈으로 볼 수는 없지요. 허나 인간세人間世에 존재하는 사회적 불평등과 선하고 정직한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 불의한 현실을 목격하게 될 때, 사탄의 실재를 확인할 수 있지요.
인간과 사회는 항상 ‘~세력 하’에 존재합니다. ‘선의 세력 하’에 있든지, 아니면 ‘악의 세력 하’에 있게 되지요. ‘하나님의 지배 하’에 있던가, 아니면 ‘맘몬의 지배 하’에 있습니다. 어느 세력 하에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어느 세력에 접속(接續)되어 살아가느냐에 따라 인간과 사회의 운명이 엇갈리게 되지요.
예수는 어떻게 말씀하셨나요?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맘몬, 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결단을 촉구하고 있어요.(마6:24/눅16:13) 바울에 따르면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인간은 ‘새로운 피조물’로 된다고 했어요. ‘낡은 나’는 지나갔고 ‘새로운 나’가 되었다고 선언하고 있어요.(고후5:17)
사탄의 영에 의해서 접속된 사회는 미쳐 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어제(2015년 11월 14일)는 서울 광화문에 13만명이 넘는 인파가 모여 민중 총궐기대회를 했어요.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것이 대한민국 헌법 전문의 내용입니다. 국민이 위임해준 권력이라는 것이지요.
▲ 사진출처 : http://impeter.tistory.com/2938 |
국민의 권력, 국민에 의한 권력이라면, 마땅히 국민을 위한 권력이 돼야 할 것입니다. 권력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 돼야 할 것입니다. 헌데 현 정치권력은 어떤가요? 대다수 국민의 뜻을 거역하고 국민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권력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정상적인 민족혼을 지니고 있는 권력이라면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강행을 결코 밀어붙이지 않을 것입니다. 현금 진행되고 있는 한국 정치현실의 전반적인 기운으로 미루어 볼 때, 저는 개인적으로 한국 정치판세가 사탄의 세력에 접속되어 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현대인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돈(資)을 근본(本)으로 삼는 사회구조이지요. 자본주의는 인간의 탐욕을 끊임없이 부추깁니다. 돈의 전지전능성을 선전하면서, 돈을 하나님 자리에 앉혀놓고 숭배하도록 사회문화를 조종하고 있습니다. ‘돈만이’(only money) 네 행복을 보장해줄 것이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경쟁에서 상대방을 거꾸러트리고, 상대방의 불행 위에 네 행복을 쌓으라. 잘 사는 길은 돈을 축적하는데 있다. 이게 자본주의가 선전하는 복음의 내용입니다.
잘사는 것이 무엇인가요? 돈 많은 것이라고 생각하나요? 자본주의의 맘몬 문화에서는 사회구조뿐 아니라 인간의 내면의식 또한 돈에 의해 지배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잘사는 것을 돈과 결부시켜 생각하게 되지요.
사탄이 무어라고 유혹했나요? 빵만이 네 배고픈 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했을 때, 예수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산다고 했습니다.
잘 산다는 것에 대한 시각을 예수는 바꾸어놓았습니다. 잘 사는 것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어요. 그것은 어디까지나 돈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충실한 삶이어야한다는 것이지요. 하나님 뜻을 따르는 삶,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양심에 거슬리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바르지 못하다면, 그것은 저주의 삶이나 진배없다는 것이지요. 돈을 근본으로 삼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우리는 마음도, 생각도, 몸도 다 돈의 노예가 되어버렸어요. 이게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의 실상이지요.
사탄이 하는 또 하나의 일은, 남의 잘못은 보면서 자기 잘못은 보지 못하게 만들지요. 예수님도 남의 눈 속에 들어있는 티끌은 보면서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라고 한 적이 있어요.(마7:3)
우리는 남을 미워하고 싫어하면서 그 사람을 닮아가는 경우가 많지요. 독일의 심리학자 칼 융은 ‘그림자론’을 말했어요. 인간은 가장 싫어하는 것을 대항하여 싸우다가 바로 그것이 되어가는 인간의 어두운 습성을 본 것이지요.
“왜 우리 일에 간섭하려 하십니까?” 사탄이 예수에게 항의하는 말입니다. 현재 상태가 익숙하고 편한데, 지금까지 살던 방식이 좋은데, 왜 그런 방식으로 살지 말라고 하시는가요? 아무리 익숙하고 편해도, 지금 이 상태로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우리 안과 밖을 지배하는 사탄의 세력을 몰아내야만 하나님나라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지요.
예수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지식을 가르치지 않았어요. 하나님나라에 대한 진리를 선포하셨어요. 지식은 무엇인가요? 하루하루 쌓는 것입니다. 진리는 무엇인가요? 하루하루 덜어내고, 비우고, 말끔히 청소하는 것입니다. 내 안팎에 진을 치고 있는 부정한 세력들을 몰아내는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나라는 임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나라를 준비하는 여러분의 삶이되시길 기원합니다.
김명수(경성대명예교수,충주예함의집) kmsi@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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