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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5주기의 시간에 셸리 램보의 『성령과 트라우마』를 읽다

기사승인 2019.04.20  18:4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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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토요일의 성령론과 한국 여성신학

1. 시작하며

세월호 5주기, 사순절 기간에 아주 귀한 책을 읽게 되었다. 감사한 일이다. 이 책을 지은 셸리 램보라는 미국의 여성신학자, 그 책을 자기 삶의 경험과 연관시키며 잘 번역해주신 번역자 박시형 목사님, 그 램보라는 여성신학자를 키운 나의 ‘동료 같은’(?) 여성신학자 캐서린 캘러 교수, 램보나 캘러 교수 등의 미국 여성신학자로 하여금 그와 같은 성토요일의 성령론을 더욱 적극적으로 사고하게 만든 2005년 미국 뉴올리언스에서의 허리케인 카트리나 희생자들의 고뇌와 고통, 남긴 이야기와 기억 등, 많은 것들이 서로 ‘연결’(multiplicity)되어서 이 책이 나오게 되었고, 거기에 한국기독교연구소 김준우 목사님의 수고도 빼놓을 수 없다.

책을 읽으면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이러한 성찰이야말로 특히 한국 신학계에서 고유하게 나올 수 있는 책이고, 또한 한국 여성신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지난해까지 4.16 세월호 참사와 더불어 해 온 성찰이 나름의 유사한 것이었다는 생각이었다.(1) 특히 올해 그 5주기를 맞이한 세월호, 71주기의 제주 4.3사건 이야기, 3.1 독립운동 백 주년을 맞이해서 지난 백여 년의 시간 동안 묻혀있던 각종 이야기가 드러나면서 그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겪어온 삶이야말로 바로 서구 여성신학자 램보가 부각하고자 하는 ‘성토요일’의 삶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상상해 본다. 그들이 이때까지 살아남았고, 살아남아서 어떻게든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해주려고 다시 목숨과 얼굴과 안락을 감수하게 만든 힘과 숨이 바로 저자가 말하는 성토요일의 ‘성령’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또한,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의 이야기도 있는데, 그는 여성작가 김숨의 언어를 빌어서 지난해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라는 ‘증언소설집’을 남겼다. 만 14세의 나이로 속아서 일본군 전쟁터 위안소로 끌려가 겪은 죽음과도 같은 고통의 트라우마를 그녀는 올해 92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참으로 길게 견뎌내야 했다. 그 증언집은 독실한 불교도인 그녀가 겪는 트라우마가 어느 정도인지를 드러내 주고 있다.(2)

그 고통과 상처 속에서도 그녀는 이후의 삶을 통해서 세계가 주목하는 여성인권운동가가 되었고, 하지만 그것은 결코 간단한 ‘성공’의 이야기가 아니다. 죽는 순간까지 그녀는 불교도로서 살면서 자신이 죄를 지으면 다음 생에서도 다시 유사한 고통을 겪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고, 삶의 감각이 극심하게 손상된 채로 고통스럽게 살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것들을 넘어서 죽는 순간까지 일본 정부의 공적 사과를 받아내기 위해 투쟁에 몸담았으며, 세상을 떠나면서는 가진 것을 재일 조선학교 어린 학생들을 위해서 내놓으면서 자신의 저항과 투쟁과 경험이 계속 이어지기를 원했다. 그녀 속의 ‘생리’(生理), 램보의 이야기로 하면 “숨”과 “사랑”의 “성령”이 그녀의 트라우마 속에서도 남아서 역할을 한 것이다.(3)

하지만 한국 기독교 교회와 목회의 현실은 한국 역사와 특히 근현대사만 하더라도, 그리고 오늘 우리 매일의 삶의 현장에서 상처와 고통, 죽음과 그로 인한 트라우마의 현실이 심각한데도 이를 깊이 들여다보지 않고 오직 승리와 부활과 성공과 빠름의 이야기만을 선호한다. 이 책의 가치와 소중함은 바로 이러한 현실로 인해서 빛나고, 특히 바로 며칠 전 강원도 고성과 속초 등에서의 산불과 같은 자연 재앙도 이제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 되어가는 현실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 책은 지금까지 우리 기독교 신앙의 기초와 기본을 그 근본에서부터 다시 검토하기를 요청하고, 그러나 저자인 서구 여성신학자보다 훨씬 더 중층의 다원성과 복합적으로 누적된 트라우마와 접하고 살아가는 한국 여성신학자로서 그 제안의 한계와 불철저성도 보면서 그런 것들을 중심으로 몇 가지 밝혀보고자 한다.

2. ‘트라우마 렌즈’(lens of trauma)와 성토요일의 발견, 성토요일의 성령론과 요한복음의 부활 증언

1) 사실 이미 오래전에 『교회와 제2의 性』, 『하나님 아버지를 넘어서』 등의 저자인 미국 여성신학자 메리 데일리는 지금까지 기독교 교리상에 나오는 모든 기독론은 ‘그리스도 우상주의’(christolatry)에 빠진 것이고, 일종의 ‘가현설’(假現說, docetism)이라고 비판하였다.(4) 그것은 지금까지의 기독교 그리스도 이해가 철저히 영육 이원론에 빠져서 그리스도의 몸성과 인간성, 역사성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묻어두고 단지 그 신성과 영웅적 그리스도성, 승리의 부활만을 강조해온 것이라는 비판이다.

램보의 『성령과 트라우마』도 같은 비판적 정신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고, 그러나 여기서는 더 나아가서 지금까지의 기독교 복음이 신론과 기독론에 집중된 것을 넘어서 ‘성령론’이 시각에서 새롭게 보려는 시도라고 하겠다. 성령론의 시각에서 신론과 그리스도의 죽음(십자가)과 부활을 새로이 이해하려는 이러한 기도는 오늘 우리 시대에 만연하게 된 ‘트라우마’라는 ‘외상 증후군’과 마주하면서 시작된다.

우리가 겪은, 또는 겪을 많은 일이, 심지어는 죽음의 경험이라는 것도 단지 한 번에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삶 속에서, 매일의 일상에서, 살아있음과 더불어 반복적으로 겪는 상처와 고통이라면 지금까지 기독교 신앙이 단선적으로 예수의 십자가 죽음 이후에 자동적으로 ‘부활’을 말하고, 막강한 힘의 담지자로서 저 어딘가 외부에 의심 없이 ‘존재’하는 신의 있음을 말한다든가, 또는 항상 승리로 이끄는 요술 방망이처럼 어떤 강력한 성취와 성공의 힘으로만 이해되는 ‘영’(성령) 이야기는 더 이상 믿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가 이런 정황을 다시 살피기 위해서 돌아보는 단어가 ‘성토요일’(Holy Saturday)이고, 이에 근거해서 저자는 ‘정통적인’ 기독교 신앙의 ‘구원 내러티브’를 다시 살피고 해체하여 재구성하려는 것이다.

2)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이후에 “신은 죽었다, 나의 내면의 신은 이렇게 말한다”라는 언어로 ‘세월호 以後 교회’를 말해온 나 자신도 여기서 저자가 부각하는 ‘성토요일’에 대한 이상은 갖지 못했었다. 그래서 저자의 이 책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오고, 그 성토요일에 대한 상상과 더불어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이야기가 또다시 새롭게 펼쳐지는 것을 느낀다.

저자 램보는 칼 바르트와 같은 세대의 스위스 가톨릭 신학자 한스 폰 발타자르(H. U. von Balthasar)의 ‘성토요일 신학’과 그 신학의 전개를 가능케 해준 여의사 출신의 평신도 여성 아드리엔 폰 스페이어(Adrienne von Speyr)의 신비 체험에 주목한다. 스페이어는 1941년 이후 25년 동안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지옥으로 내려가서 겪는 무시무시한 고독과 버림받음, 포기를 환상 속에서 반복적으로 체험해 왔다고 한다. 지금까지 전통(정통) 신학에서는 이 극도의 고통의 시간이 간단히 지워져 있었고, 금요일의 십자가 사건 이후로 곧바로 일요일의 승리에 찬 부활이 말해지면서 토요일의 죽음의 시간, 삶과 죽음이 교차하면서 극도로 외롭고, 어떤 희망과 재생의 가능성도 없이 철저히 내던져진 ‘지옥’의 고통과 죽음의 경험이 무시되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토요일의 경험을 우리가 겪고 듣는 ‘트라우마’의 경험과 연결한다. 그것은 살아있으면서도 죽음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며, 결코 부활이나 승리를 쉽게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찬 경험이며, 그리고 그것이 정말 고통스러운 이유는 언제 이 고통이 끝날지 알 수 없이 ‘반복’되고 ‘지속’되어서 이 지옥과도 같은 트라우마의 고통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그것을 ‘견뎌내고’, ‘버티면서’ ‘살아남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3) ‘성토요일의 성령론’은 바로 이러한 가운데서 드러나는 ‘성령’의 새로운 모습을 그리는 신학이다. 그러나 저자 램보는 그와 같은 성토요일의 신학을 말하는 발타자르조차 그 신학이 여전히 ‘기독론’(십자가) 중심적이고, ‘삼위일체론’에 묶여있다고 비판한다. 즉 발타자르가 전통의 신학이 주목하지 못하는 성토요일의 고통과 죽음의 시간을 발견하였다고 하지만 그의 신학은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서 삼위일체적(trinitarian)으로 ‘구원’의 그리스도가 부각되어서(soteriological) ‘지옥’이나 ‘몸의 고통’이나 ‘성령’ 등의 의미가 충분히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램보는 성토요일의 신학은 더욱더 ‘성령론’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이고, 그 성령론의 해석에서도 전통적 성령론이 주목하지 못하는 또 다른 차원을 밝히기 위해서 특히 요한복음 막달라 마리아의 부활 증언과 애제자 요한의 증언을 살핀다.

저자는 요한복음의 증언을 살피기 위한 첫 출발로서 요한복음 19:33-34절의 숨을 거두신 후 창에 찔린 예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는 기록에 주목하면서, 특히 거기서 피보다는 ‘물’에 집중한다. 그러면서 그 물이란 ‘생명’과 연결되고, 결국 ‘성령’과 관계된다는 독특한 해석을 내놓는다. 저자는 예수의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는 말씀을 상기시키며 여기서 드러나는 성령은 사도행전 등에서 전하는 ‘성령강림절의 (확실한) 성령’이 아니라 죽은 예수의 옆구리에서 ‘남은’ 물이 흐르듯이,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가 안식 후 첫날 아직 어두울 때 예수의 무덤에 찾아가서 만난 예수의 부활이 무엇이라고 정확히 말할 수는 없는 가운데 그래도 “어떤 다른 종류의 존재”로 있었고, “현존과 부재가 섞여 있는 영역”에서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방식으로 그곳에 현존”하는 방식의 영이라고 한다. 즉 저자가 여기서 새롭게 드러내고자 하는 성령과 부활은 전래의 인습적 성령과 부활 이야기대로 그렇게 분명하고 확실한 성공적 메시지의 것이 아니라 부재이기도 하면서 현존하고, 죽음이기도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현존하는 증언이고, 그것은 그래서 “죽음의 여파 속에서 삶을 이해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증인들”의 증거라고 한다.(5)

저자가 여기서 중시하는 두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남아 있다’ 또는 ‘머무른다’의 뜻을 가진 ‘메네인’(menein)과 ‘넘겨주다’라는 뜻을 지닌 ‘파라디도나이’(paradidonai) 이다. 저자는 자신의 성토요일의 성령론과 새로운 부활 이해를 펼치기 위해서 이 두 단어를 여러 맥락에서 다양하게 풀어낸다. 요한복음 19장 30절의 예수가 신포도주를 맛보신 후 ‘이제 다 이루었다’ 하시고 ‘그의 영(spirit/pneuma)을 넘겨주셨다’라고 증언한 대로 예수의 죽음 후 무언가가 분명히 ‘남겨졌다’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 ‘영’, ‘예수가 죽을 때 내쉰 숨’을 제자들이 ‘넘겨받았으며’, 순교한 베드로와는 달리 ‘남아 있는 자’가 되어서 그 영을 넘겨받은 예수의 애제자는 예수의 죽음이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마지막 숨이 말하는 진실’을 ‘넘겨주는 일’을 맡은 것이라고 역설한다.

즉 몸의 끝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며,(6) 성령은 “승리하는 힘이 아니라 끈질기게 지속하는 힘이며, … 견디어내는 힘”이고,(7) 그래서 우리는 ‘증언’(부활)은 “죽음과 삶이 만나는 곳인 동시에 죽음과 삶으로부터 생겨나는 증언의 장소이기도 한 독특한 공간”으로 이해할 수 있고,(8) ‘생존’은 “남아서 사랑하라는 독특한 명령을 통해 주어진 모습”이기 때문에 “이제 부활한 삶에 대한 개념도 달라”져서, 부활한 삶이란 “승리한 새 삶”(victorious new life)이 아니라 “살아남은 사랑에 대한 끊임없는 증언”(persistent witness to love’s survival)이라고 강조한다.(9)

3. 램보 성토요일 성령론의 한계와 불철저성

이렇게 삶과 죽음, 십자가와 부활, 몸과 영의 불이적(不二的) 관계에 대한 전복적 성찰을 하면서 성령과 부활의 보다 진실한 실재에 다가서려는 저자의 노력은 매우 의미 깊다. 원래 이 저술의 시발점이 그러하듯이 특히 오늘날 누구나 맞닥뜨릴 수 있는 삶과 죽음이 혼재한 트라우마 현실의 만연 앞에서 이러한 시도는 기독교 복음과 ‘구원’의 진실성과 성실성을 더욱더 신장시킬 수 있다.

하지만 본인이 보기에 저자의 이러한 탐색에는 여전히 불철저하고, 분명하지 않은 측면들이 여럿이 보인다. 그리고 그 가장 주된 원인을 본인은 저자가 여러 차원에서 전통적 기독교 사고의 울타리를 넘어서서 ‘다원적’으로 사고하고 ‘중간성’의 의미를 강조한다고 하지만, 여전히 전통 안에 머물러서 그 성령론의 강조에도 불구하고 기독론 중심주의, 또는 그리스도 중심적 성령론에서 충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그의 영론이 충분히 일관되게 보다 보편적으로 확장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예수가 죽을 때 내쉰 숨(death breath)이 넘겨졌다”라고 서술하면서(10) 이 죽음 이후에도 살아남는 것이 “남아 있는 사랑”(remaining love)이며, “남아 있는 성령”(the remaining Spirit)이라고 언급하지만,(11) 동시에 거기서의 ‘영’(숨)이 ‘예수’의 영인지, ‘성령’인지 “불분명”하다고 말하고,(12) 또한, 이 장면에 대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의 증언을 비교하면서 누가복음의 예수는 자신의 영을 “성부”의 손에 부탁하지만, 요한복음은 예수의 영이 “누구에게 넘겨지는지 명확히 제시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바로 우리가 “이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13) 본인에게는 저자의 이러한 질문과 그렇게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는 이런 분석은 그가 여기 ‘이 세상’과 고통과 몸의 실제와 다원성의 중시-그녀의 트라우마의 렌즈-에도 불구하고 전통 기독교의 완고한 성속(聖俗)이원주의와 개체주의적(인격주의적) 神 이해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영’으로서의 실재 이해가 철저하지 못해서 야기되는 것을 보인다.

물론 저자는 자신이 많은 영향을 받은 캐더린 켈러의 ‘테홈’(tehom, 심연)이라는 언어를 통해서 전통적 기독교의 ‘무로부터의 창조 이야기’(ex nihilo)를 극복하고 창조(시작)와 부활도 직선적이고 일회적인 것보다는 반복되고 지속되는 나선형의 ‘되어감의 사건’(continual becoming)으로 이해하는 것을 밝힌다.(14) 하지만 그러한 이해를 분명하게 ‘예수’ 부활 사건에까지 적용시키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즉 전통 기독교가 여전히 놓지 않는 ‘부활’ 사건, 그 중에서도 ‘예수’ 부활 사건은 그러한 반복과 지속의 시각을 통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영(테홈)의 반복 불가능한 유일회적 배타성으로 보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성토요일의 성령론은 예수에게서 마지막으로 넘겨진 영이 ‘하느님의 영’인지, ‘예수의 숨’인지, 아니면 생전에 예수가 자신이 가고 제자들에게 찾아올 것이라고 이야기한 ‘성령’인지의 구분을 묻는다.

최근 한 페친이 2001년 자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산에 모시고 돌아온 며칠 후 꿈속에서 만났던 어머니에 대해서 구술해 주었다. 그 어머니는 평소의 옷차림으로 등에 약수터에서 길러오는 물통에 물을 한 통 지고 오셔서 병원 중환자실 옆에서 쭈그리고 있는 자신에게 작은 소반에 삭힌 고추와 깻잎장아찌를 반찬으로 밥상을 차려주며 먹으라고 하셨다고 한다. 어머니와 구술자가 밥을 물에 말아서 먹으며 “엄마, 죽은 거 괜찮아?”라고 물으니 말씀은 안 하시고 괜찮다는, 나쁘지 않다는 표정을 지으셨다고 한다.

그러면서 구술자는 살아생전에 가난한 삶에서 어머니가 자신의 소풍날까지도 텃밭에서 키운 파로 파무침을 해주는 것을 보고, 계란과 멸치 반찬, 김밥을 싸 오기도 하는 친구들과 비교해서 창피한 생각에 소풍을 가지 않겠다고 서럽게 울었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파무침, 삭힌 고추가 자신의 사랑하는 일상의 양식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어쩌면 일용할 양식은 이런 밥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라고 하며 그렇게 “깻잎 같은, 무나 배추처럼 살다 가신 어머니들...”의 삶을 반추한다.(15)

본인은 이러한 구술 앞에서 오늘 여기서의 한 평범한 구술자가 ‘영’으로 만난 어머니 이야기가 요한복음 21장 고기 잡는 제자들의 바닷가에 나타나셔서 그들을 위해 숯불을 피우시고 고기와 빵도 마련하여 지친 제자들을 먹이시며 나의 양을 치라는 사랑의 명령을 남기시는 예수의 부활 이야기와 어떻게 다른가를 묻고 싶다. 이 두 그림은 매우 유사하게 진정으로 몸의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고, 죽음 속에 남겨진 영의 사랑의 힘으로 큰 고통과 상실에도 불구하고 다시 삶이 시작되며, 살아남은 자는 그 영의 이야기를 계속 구술하고 전하면서 새로운 삶의 장소가 되어가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이제 5주년이 되어가고 요사이 <생일>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져 우리를 다시 찾고 있는 세월호 참사의 여러 유족이 들려주는 ‘죽음 이후’와 ‘영’에 대한 이야기, 그 이전에 작가 한강의 『소년이 온다』가 들려주는 80년 5월 광주 항쟁에서 희생된 한 소년의 영에 관한 이야기 등에서도 우리는 유사한 메시지를 받는다. 그래서 ‘예수’의 부활과 이 ‘평범한’ 사람들의 부활, 요한복음 ‘성서’의 부활 증언과 우리가 오늘 ‘주변’에서 듣는 부활 이야기가 그렇게 다른 것일까 라는 질문을 하고 싶어진다.(16)

‘정통’ 기독교는 지금까지 2천여 년 동안이나 기독교나 서구, 또는 유대인 남성 예수의 존재론적 유일회성을 주장하면서 그 외의 다른 문명이나 종교, 여성과 비성직자 등을 차별하고 소외시켜온 근거로 바로 이 ‘부활’, ‘예수’의 부활을 최종적인 근거로 주로 내세웠다.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는 근거가 바로 이 부활로서 어느 종교 전통에도 그렇게 예수처럼 몸이 부활하는 사례는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묻고자 한다. 이 주창을 우리는 오늘도 여전히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앞에서 우리가 본 대로 성토요일의 성령론을 가져와서 매우 급진적으로 그 정통을 전복시키려는 램보조차도 이 물음 앞에서 우왕좌왕하는 것을 보니 답하기 매우 어려운 질문임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본인은 비서구 평신도 여성신학자로서 지금까지 겪어왔던 존재론적 소외와 불평등, 부정직과 의심을 억누를 수 없기 때문에 또 다른 대안을 찾아보고자 한다. 동아시아적 신유교 전통과 대화하면서 나온 한국적 聖․性․誠의 여성신학이 어떻게 ‘다른’ 부활 이해, ‘다른’ 그리스도 이해를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피할 수 없이 다가오는 트라우마 현실 앞에서 다르게 사고할 수 있는지를 간략하게마나 밝혀보고자 한다.

4. 한국적 聖․性․誠 여성신학의 복수(複數, plural)론적 그리스도론과 ‘구원하는 자기’ (the redemptive self)의 다른 이해

1) 본인은 지금까지 한국적 유교 전통과 대화해온 여성신학자로서 그 대화에서 얻어진 ‘聖, 性, 誠’의 세 언어를 가지고 신론과 기독론, 성령론을 재구성하고자 노력하면서 특히 “聖의 평범성의 확대”를 주창해 오고 있다.(17) 본인은 저자 램보가 많이 의지하는 캐더린 켈러의 ‘테홈’이라는 하느님의 이름을 아주 좋게 여긴다. 그러나 그 테홈(심연)과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서 보다 크게 有와 無, 있음과 없음, 하늘과 땅, 삶과 죽음, 몸과 영 등을 불이적(不二的)으로 통합하는 ‘태허’(太虛)나 ‘무극’(無極), ‘태극’(太極)이나 ‘리’(理) 등의 이름을 선호하면서, 특히 그 모든 이름을 아주 보편적으로 ‘聖’(거룩)이라는 이름으로 명명하면서 그 속성을 ‘통합성’(the integrity)으로 해석해 왔다.

聖으로서의 하느님은 비록 트라우마의 현실, 성토요일의 지옥에 놓여있는 존재에게도 그가 결코 본래적 거룩과 신적 본질로부터 소외되어 있지 않고, 반복되는 죽음과 고통과 상처의 현실에서도 그 존재의 선험적 선성(善性)과 거룩과 무조건적으로 하늘의 자녀라는 것을 보다 분명하게 선포한다. 그런 통합성의 聖의 영성에서 보면 하느님이나 예수의 영만을 ‘성령’으로 보지 않고, 온 우주에 편재한 영을 같은 거룩의 영, ‘성령’으로 인지하고, 한국적 전통이 ‘천지생물지심’(天地生物之心)이나 ‘생리’(生理, 낳고 살리는 영), 또는 ‘인’(仁, 인간성) 등의 언어로도 강조해온 그 거룩한 영이(18) 트라우마의 현실에 놓여있는 죽음과 고통의 당사자에게서 결코 떠나지 않음을 보다 확고하게 말할 수 있다.

2) 성토요일의 죽음과 고통, 상처, 즉 트라우마는 우리 삶에서 진정 ‘타자’이다. 같이 하고 싶지 않고, 피하고 싶고, 항상 억누르고자 하고, 단번에 처치하고 싶지만 우리 삶이 다하는 동안 ‘남아서’ 어떻게든 우리는 그와 관계해야 한다. 본인은 聖․性․誠의 여성신학에서 두 번째 중간의 性을 ‘타자성’(the otherness)으로 해석하면서 우리의 신적 본래성인 통합성의 聖과 함께 이세상성, 몸성, 섹슈얼리티, 여성성 등을 지시하는 언어로 말해 왔다. 그 性은 우리가 먼저 ‘타자’로 취급하지만, 그 타자야말로 진정 우리 거룩(聖/神)의 현현의 장소임을 밝히는 의미이다.(19)

오늘 현대 사회에서 우리 몸의 욕망과 욕구, 특히 섹슈얼리티를 이 性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며 사는 데서도 드러나듯이, 이 性은 보통 부정적으로 이해되고, 정신과 영적 존재로서의 우리 대신에 어두운 몸적 속성을 지시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우리는 점점 더 이 性이야말로 우리가 저버릴 수 없고 억누를 수 없는 인간성의 또 다른 핵심이고, 그 性과 잘 관계해야지만 우리 삶과 정신적, 영적 이상이 유지, 신장되는 것을 알아간다. 그러므로 본인은 이 性이라는 단어로  램보가 트라우마에 대한 탐색에서 다각도로 밝혀준 대로 죽기까지 계속해서 다시 등장하면서 우리가 그와 관계 맺어야 하는 ‘트라우마’를 표시하는데도 부족함이 없다고 여긴다.

더군다나 신유교 전통(性理學)에서 본래 이 性이란 결코 부정성이 아니라 바로 하늘의 태극(聖)이 우리 안에 인간적인 모습으로 내재해 있는 하늘적 씨앗(性)을 드러내는 단어로 쓰여 왔다면, 램보가 죽음의 성토요일과 트라우마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여서 기독교의 부활과 성령 담론을 더욱 더 삶(긍정성)과 죽음(부정성)의 긴밀한 관계로 나타내고자 할 때 이 한국적 性이야기가 더 적실해 보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性이야기는 또 다른 기독론, 또 다른 인간론과 트라우마론으로서 우리가 앞에서 본 대로 램보가 그러면서도 여전히 우왕좌왕하며 둘 사이의 연결을 충실히 밀고나가지 않는 것과는 달리 보다 보편적이고 분명하게 참으로 인간적인 것 속에 하늘이 남아 있다는 것을 지시해 주고, 부활의 장소가 바로 이 인간적인 것, 트라우마, 우리의 몸과 섹슈얼리티라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 보스턴 대학교 셸리 램보 교수 ⓒGetty Image

여기서 들려주는 부활과 새로운 시작과 영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트라우마의 현실을 더욱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한다. 그 현실에서 우리로 하여금 ‘중간의 길’ 위에서 남아있는 하늘(性)의 증언자가 되도록 한다. 사실 단순히 보더라도 우리는 우리 性을 통해서 다음 세대를 낳고, 전하고, 증언한다. 그래서 이런 모든 사실과 맥락을 고려해 볼 때 우리가 모두 한편으로 性의 존재라면, 2천 년 전 유대인 청년 예수만이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가 될 수 있고, 그래서 우리는 이제 ‘복수론적(複數論的) 그리스도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시점에 도달했다고 본다.

트라우마(性)가 우리 부활의 장소라면 ‘거룩’(聖)의 보편성(평범성)뿐 아니라 ‘부활’의 보편성도 말해져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보편성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서구 여성신학자 램보는 켈러와 함께 ‘부활(시작)’의 복수성은 인정하지만 ‘그리스도’의 복수성에 대해서는 분명히 말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이제 우주적 ‘블랙홀’을 인간 모두가 그 몸의 보편적 감각으로 함께 인식하는 새 시대가 되었다면 그들도 서구적 전통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3) 램보는 성령은 “눈에 보이는 대상이 아니며, 활동으로 현존한다”라고 하면서 그 힘은 “지속하는 힘”이며 “견디는 힘”으로 밝혔다.(20) 그리고 “새로운 삶의 모습을 낳는 성령론적 운동”을 이야기하면서 “성령은 형체(form)를 만들어 내는 숨”이라고 지시했다.(21) 이런 이야기는 한국적 聖․性․誠의 여성신학이 세 번째의 誠을 ‘지속성’(the endurance/ continuity)으로 풀면서 한국적 성령론으로 이해하는 것과 잘 통한다.

유교 전통의 『중용(中庸)』은 ‘誠(지속성)은 하늘의 길이고, 그 誠을 따르는 것은 인간의 길이다’(誠者 天之道也, 誠之者 人之道也)라고 하면서 ‘誠(지속성)이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不誠無物) 라고 했다. 또한 한국의 신학자 윤성범은 오래전 그의 ‘誠의 신학’에서 중용적 ‘誠’을 요한복음 1장의 ‘말씀(言)이 육신이 되었다(成)’라는 의미로 풀어내면서 誠(지속성)을 그 신학적 사고의 핵심으로 삼았다.

한국적 트라우마 세월호 이야기는 참으로 평범했던 변방 지역 어머니들의 지속성(誠)으로 인해서 우리 시대의 부활과 구원과 남은 사랑의 이야기가 새롭게 그 형태를 이루어가고 있는 중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 끔찍한 트라우마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또 하나의 ‘성토요일’의 영적 진실이 마련되고 있고, 복수(複數)론적 그리스도론이 증거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모든 것들을 살펴보면, 켈러와 램보의 새로운 성령론과 부활 담론이 동아시아의 誠 이야기로 많이 접근해 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교회와 신학이 그러한 고유한 자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서구 신학에 대한 해바라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여긴다.

오늘 한국 교회가 스스로가 고유한 종교적 전통과 신학적 탐색 안에 서구적 ‘정통’ 신학의 승리주의와 제국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보물들을 풍성히 가지고 있다면, 그것들에 대한 탐색이 우리의 긴요한 신학적 작업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 우리의 현실 기독교와 목회 현장은 오히려 여기서 램보나 켈러 등이 비판하는 서구 교회의 ‘정통주의’보다도 더욱 경직되어 있고, 폭력주의적 성취지상주의에 차 있는 것을 보면 매우 안타깝다.

4) 본인은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간단히 살펴본 한국적 聖性誠의 여성신학의 테두리 안에서 유교와 기독교 대화의 새로운 ‘상상력’으로 기독교 여성신학자 램보가 비판한 ‘구원하는 자기’(The Redemptive Self)의 담론을 ‘다르게’ 해석해 보고자 한다. 램보는 책 마무리에 성인발달심리학자 맥아담스(Daniel P. McAdams) 교수의 미국 성인 삶의 내러티브 연구를 가져와서 트라우마와 성토요일의 죽음과 실패에 대한 의식이 없는 미국식 기독교의 ‘구원 이야기’가 어떻게 미국인들의 의식과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가를 밝히고 있다.

맥아담스에 따르면, 미국인들의 자기 삶 이야기는 항상 ‘구원하는 결말’(redemptive ending)의 ‘구원하는 자기’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이러한 의식이 개척정신과 도전의식의 미국인들 정체성의 최고의 장점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최악의 단점”이 되어서 성공하기 위한 폭력과 자기애를 정당화하고, 강한 개인주의적 경향과 특별함에 대한 요구와 선택받았다는 믿음의 “미국 우월주의’를 강화했다고 한다. 그것이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침략을 묵과하기도”하고, 삶 속에 “일종의 학대”를 유발하는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극히 해로운 것일 수 있다”라는 것이다.(22)

사실 이러한 지적은 특히 오늘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 요사이 패권주의적 미국과 사사건건 씨름해야 하는 우리의 처지로서는 매우 수긍이 가는 것이고, 또 경청해야 하는 연구이다. 하지만 본인은 오늘 한국 기독교의 과도한 기독론 중심주의, 서구 바라기와 배타적 그리스도 우상주의 등을 마주하면서 오히려 앞에서 살핀 대로 복수론적 기독론, 트라우마와 고통의 현실에서도 견디며 스스로를 이루어나가는 誠으로서의 성령론 이해에서는 이렇게 스스로의 주체성 속에 내재하는 지속하고, 형태를 이루고, 죽음과 고통 속에서도 남겨진 자의 역할을 담당하는 성령의 힘으로서의 ‘구원하는 자기’의 담론이 요긴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담론이 가지는 사각지대에 대한 의식도 있지만, 미국과 한국 교회의 처한 정황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래서 한국에서는 미국식 정통의 구원 이야기가 유교나 불교 등 아시아 종교 전통과의 대화 속에서 ‘다른 정통의 모습’(polydoxal possibility)으로 실행될 수 있고, 또한 그것이 요청된다는 것이다.

오늘 한국 기독교가 서구 남성 그리스도 우상주의에 빠져서 한편으로는 앞에서 맥아담스 교수가 지적한 미국식 정체성의 해악이 심한 것도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 기독교가 제시하는 ‘구원하는 자기’ 담론보다 더 오래되고, 특히 그것이 큰 우주적 공동체 의식(天下爲公)과 깊이 연결되는 자기 구원의 이야기를 보유하고 있는 문명의 나라로서 그 진정한 의미를 다시 찾아내야 한다고 본다. 참된 구원하는 자기의식을 잊고서 외부로부터 전달받은 편협한 구원론과 노예성에 빠져있는 한국 교회에게 그래서 본인은 진정으로 복수론적 그리스도론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또 다른 ‘성토요일의 성령론’을 나름으로 새롭게 상상해 보도록 권하고 싶다.

5. 마무리하는 말

지난 주일 안산 화랑유원지 내 생명안정공원 부지 내에서 열렸던 세월호 참사 5주기 기억 예배에 가보니 그동안 잘 보지 못했던 세월호 유족의 엄마들이 어떻게 새로운 그리스도로 부활해 가는지가 보였다. 이제 세상이 세월호 유족들을 돕는 것이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은 십자가의 길”이라는 의식으로 성토요일의 길을 가고 있는 유족들이, 그 트라우마와 더불어 알게된 생명과 진실의 이야기가 오히려 우리와 한국 사회를 살려내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아직 겨우 그렇게 희생된 아이들의 기억을 함께 모으기 위한 추모관 건립을 위한 부지만 마련된 상황이고, 앞으로도 그 추모관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가야 할 길이 무척 험난해 보이지만, 그녀들은, 그 유족들과 지금까지 지속해서 함께 해온 시대의 증인들은 여전한 슬픔 가운데서도 떳떳했고, 당당했으며, 고통 속에서 다져진 모습으로 오히려 우리를 부끄럽게 했다.

한편 이렇게 예배드리는 곳 바로 건너편에는 이들 세월호 유민들을 그만두라고 하고 그들이 겪은 것이 개인 여행 참사라고 호도하면서 쫓아낸 ‘은혜와 진리 교회’가 높다랗게 하늘을 찌를 듯 서 있었지만, 이미 해체의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고 있는 듯이 보였다. 본 책의 저자가 꼼꼼하고 성실하게 밝혀준 성토요일의 성령론이 어떻게 한국 세월호의 트라우마 현실 속에서도 그 빛과 진실을 드러내는지를 잘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게 된 것을 다시 한번 감사히 여기며, 세월호 유족들에게뿐 아니라 우리 교회와 사회에 진실한 ‘위로의 책’으로서 더 널리 퍼지기를 바란다.

미주

(미주 1) 작년에 출판한 본인의 책 『세월호와 한국 여성신학』(서울: 동연, 2018)가 있다. 여기서도 세월호라는 끔찍한 재난을 겪고 난 이후의 유족과 한국 사회가 어떻게 기독교 신앙을 견지할 수 있을까의 물음에 천착하면서 특히 ‘부활’과 ‘몸의 죽음’, ‘영’ 등의 물음과 더불어 전통 신론과 기독론의 재구성을 탐색했다.
(미주 2) 김숨,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일본군 위안부 김복동 증언집』, 현대문학, 2018.
(미주 3) 변선환 아키브 편, 『3.1정신과 ‘以後’기독교』,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2019, 16-17쪽.
(미주 4) 이은선, “페미니즘 몸담론과 역사적 예수 그리고 다원주의적 여성 그리스도론”, 『한국 여성조직신학 탐구-聖․性․誠의 여성신학』, 대한기독교서회, 2004, 101-102쪽.
(미주 5) 셰리 램보 지음, 『성령과 트라우마-죽음과 삶 사이, 성토요일의 성령론』, 박시형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2019, 179쪽.
(미주 6) 이은선, “세월호 참사와 우리 희망의 근거: 세월호 1주기, 몸의 끝이 모든 것의 끝인가?”, “부활은 명멸(明滅)한다: 4.16 세월호 2주기의 진실을 통과하는 우리들”, 『세월호와 한국 여성신학』, 117-128; 129-164.
(미주 7) 셰리 램보 지음, 『성령과 트라우마-죽음과 삶 사이, 성토요일의 성령론』, 214쪽.
(미주 8) 같은 책, 234쪽.
(미주 9) 같은 책, 235쪽.
(미주 10) 같은 책, 228쪽.
(미주 11) 같은 책, 286쪽.
(미주 12) 같은 책, 229쪽.
(미주 13) 같은 책, 252쪽.
(미주 14) 같은 책, 266쪽.
(미주 15) https://m.facebook.com/이규원, 4월 10일.
(미주 16) 이은선, “세월호, 고통 속의 빛, 영생에 대하여”, 『세월호와 한국 여성신학』, 104-111쪽.
(미주 17) 이은선, “종교문화적 다원성과 한국 여성신학”, 『한국 생물生物여성영성의 신학: 종교聖․여성性․정치誠의 한몸짜기』,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29쪽 이하.
(미주 18) 이은선, “한국 천지생물지심(天地生物之心)의 영성과 기독교 영성의 미래”,『다른 유교, 다른 기독교』, 도서출판모시는사람들, 2016, 179쪽 이하.
(미주 19) 이은선, “여성으로 종교 말하기”,『한국 여성조직신학 탐구-聖․性․誠의 여성신학』, 46쪽.
(미주 20) 셰리 램보, 같은 책, 214쪽.
(미주 21) 같은 책, 258쪽.
(미주 22) 같은 책, 299-304쪽.

이은선 명예교수(한국 信연구소, 세종대) leeus@sejo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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