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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미친 짓이다

기사승인 2024.06.12  03:5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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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은 脈이고 江은 줄기이다 ③

▲ 채계산에서 바라본 적성강 고원리(관평) 뒤로 펼쳐진 회문산 장군봉 용궐산 전경. 평화롭기 그지 없어 보이지만 그 역사는 피와 아픔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해학

영웅들은 온 산천을 누비며 달렸다. 적들과 마음껏 싸웠다. 인생을 원 없이 소진한 뒤에 갈 곳으로 돌아갔다. 그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진영에 따라 다를 것이다.

방호산은 1916년생의 연안파의 항일투사였다.

그러므로 그는 김일성을 비판한 56년 8월 종파 사건의 보복과 반격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북한은 중국과 소련의 내정 간섭으로 인해, 그해 9월 23일에 열린 전원회의에서 어쩔 수 없이 최창익과 박창옥의 당중앙위원회 위원직을 복권했다. 윤공흠, 서휘, 리필규 등의 당원 활동도 허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후, 소련과 중국이 각자 직면한 문제로 더는 북한 내정에 간섭할 수 없게 되자, 북한은 1958년 고위간부를 중심으로 하여 하급부대에 이르기까지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하였다. 군인 개개인에 대한 사상 검증과 각급 부대에 대한 집중검열사업으로 군대 내의 연안파와 소련파 대부분을 숙청하였으며 그 자리를 만주파 군인들로 채웠다.

거창 농민 학살을 비롯한 제11사단이 저지른 모든 양민학살의 배후에 광복군으로서 독립운동을 했던 제11사단의 사단장인 최덕신 중장이 있다. 산청, 함양 양민학살은 산청군 금서면, 함양군 휴천면, 유림면의 12개 마을 주민들이 빨치산과 내통하는 통비분자의 누명으로 705명이 학살당하였다. 거창군 신원면에서는 719명이 학살을 당했는데 그중에 15세 이하 어린이가 359명, 60세 이상의 노인이 60명이 포함되었다.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 양민학살은 그 지역과 전혀 연고가 없는 사람들로 생존자 유가족이 나타나지 않아 신원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어린이와 아녀자들이 포함된 다 수의 민간인들이 이불과 냄비 등, 세간살이와 함께 11대 버스에 실려 와 외공리 뒷산에서 총살되었다.

전남 함평에서는 1950년 12월 6일부터 그다음 해 1월 14일까지 11사단 20연대 2대대 5중대에 의해 총 6회에 걸쳐 524명의 양민이 학살되었다. 실제로는 1,800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최덕신은 양민학살에 대하여 책임을 지거나 사죄하지 아니하였으며, 1956년에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고 주 베트남공사를 지냈다. 박정희 정권에서는 외무부 장관과 주 서독대사를 역임하였다. 무엇보다 전쟁 기간에 양민 집단학살을 허용하고 은폐한 사람, 민간인의 생명과 인권의 존엄을 마구 짓밟은 자가 새인간연합회 총재와 종교협의회 회장이 될 수 있었던 당시 사회 풍토와 도덕적 불감이 너무 가슴 아프다.

그뿐만 아니라 국토 통일원 고문, 3·1국민회 회장, 유신학술원 회장, 반공연맹 이사 등의 대한민국의 요직을 두루 거친 사람이 월북하여 천도교 청우당 중앙위원장과 조선종교인협의회 회장을 맡아 남한 정부를 강도 높게 비난할 수 있는 그의 극적인 패러독스, 모순적인 정신세계가 여러 개의 가면을 쓰고 사는 인간의 실존이라는 생각에 우울해졌다.

방호산이 역사에서 사라진 것은 북한 권력투쟁에서 연안파가 밀렸기 때문이다. 최덕신이 월북한 것은 전쟁에서 양민학살에 대한 책임 추궁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가 남한 정권의 실세에서 밀려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민간인들에게 저지른 만행과 학살로 인하여 사람들이 여생을 통하여 겪었을 아픔과 슬픔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살인 만행’을 애국애족 사상과 이념에 대한 충성으로 정당화시키고 합리화시켰다. 우리는 산과 강을 넘나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는데, 그들은 남과 북을, 이념과 사상을 편리한 데로 넘나들며 자기화하고 있다.

전쟁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미친 짓’이다.

제국들의 야욕과 독선이 국제적 음모를 통해 전쟁을 합리화한다. 약소국은 참전하고 죽어간다. 그리고는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다 협상한다. 전쟁이라는 타락한 가치가 저지른 인민재판과 학살, 생명의 위협과 정신적인 억압으로 나의 아버지를 죽였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서른여섯 나이에 전쟁미망인이 되었고, 나는 열 살에 전쟁의 복판에 버려졌다. 분노할 새도 없이 세월이 갔고, 복수보다는 인간의 나약함에 대한 처절한 깨달음이 나를 채운다.

순창을 돌아보며, 순창의 역사를 공부하며 내가 겪었던 동족상잔의 큰 전쟁의 심연을 보며 고뇌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너무 억울하고 비참한 죽임을 당한 사람들 앞에서 살아남은 자로서 충격이 작지 않다. 사상과 이념, 애국애족의 이름으로 학살을 지시한 사람들과 학살을 자랑스럽게 자행한 사람들에 대한 실망으로 나는, 내가 사람이라는 사실과 단군의 후손임을 자랑하는 한민족이라는 사실까지도 심히 부끄러워졌다. 동네 사람들의 도망간 송아지를 찾아주기 위해 정성스럽게 가새(가위)점을 치던 이름 없는 조씨 할머니가 전쟁영웅들 보다 더 인간다움으로 느껴진다.

다시 크게 부르짖는다, 전쟁은 미친 짓이다.

이해학 대표(사단법인 겨레살림공동체)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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