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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이냐, 예술이냐?

기사승인 2024.08.31  13:2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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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흐와 산책하기 (52)

▲ <씨뿌리는 사람> (1889. 10~11, 캔버스에 유채, 64×55cm, 크뢸러-뮐러 박물관, 오테를로)

세상을 기술로 사는 사람이 있다. 남을 속여서라도 명예를 탐하는 이들, 인기와 명성, 또는 물질로 사는 사람이 세상에 차고 넘친다. 그런 이들은 상식과 양심을 따르지 않는다.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거짓말을 예사로 하고 물욕을 충족하기 위해서 사기와 협잡을 일삼는다. 권력을 얻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우격다짐으로라도 목표를 이루려고 한다.

한마디로 잔재주로 세상을 살아내는 이들이다. 그들의 가벼운 언행과 무모하고 무책임한 행동이 보편적 삶을 사는 소시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정치계와 경제계는 물론 사회·문화·교육·언론·종교 등 모든 영역에 그런 이들이 판을 치고 있다. 한마디로 세상이 개판이다. 그런 이들이 자유를 설파하고 정직을 설교하고 성실을 교훈하는 세상이 되었다.

빈센트는 화가가 되기 전에 화상을 하였다. 열일곱 살 때 첫 직장이 헤이그의 구필화랑 점원이었다. 구필화랑은 성공한 화상으로 평가받는 빈센트와 이름이 같은 삼촌 센트가 파리의 화상 아돌프 구필과 동업하여 세운 화랑이다. 빈센트를 아들처럼 아꼈던 센트 삼촌은 대물림할 생각을 가지기도 하였다. 빈센트는 런던 지점을 거쳐 파리 지점에서도 근무하였다.

그런데 그림을 보는 자신의 관점과 그림을 사러 오는 손님의 생각이 부딪칠 때가 있었다. 사소한 생각 차이가 종종 논쟁으로 번지기도 하였다. 손님의 생각을 존중하고, 때로는 적당히 아부도 하면서 작품을 상품화하여야 화상으로 성공하는 법인데 정직하고 착하기만 한 청년 빈센트는 그 기술을 채 습득하지 못했다.

빈센트가 구필화랑에서 일할 때 밀레의 그림을 접하였다. 밀레의 작품을 판화로 제작하여 판매하며 예술 세계의 진가를 맛본 그는 단번에 밀레를 존경하게 되었다. 밀레의 작품들은 대개 파리 근교의 농촌 바르비종 농부의 고단한 삶을 다루었다. 빈센트는 젊은 화가들에게 밀레가 ‘아버지’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였다. 작품 속 농부의 표정이 섬세하지는 않지만 농부의 얼굴에 드리운 정직한 묘사는 피폐한 농촌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였다. 빈센트는 밀레의 작품들을 통하여 예술의 깊이를 터득하는 계기가 되었다.

1876년 빈센트는 구필화랑에서 해고된 뒤 목사의 길을 모색하였다. 기술로 살기보다 거룩으로 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길도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결국 보리나주 탄광촌 전도사역을 그만두고 화가의 길을 결심하였다. 1880년 8월의 일이다.

빈센트가 구필화랑에서 화상의 길을 걸으며 잔기술로 살았다면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얕고 천박한 기술보다 깊고 높은 예술의 길 걷기를 원했다. 예술로 사는 삶이란 날마다 ‘하늘을 날아가는 기분’이다. 그것은 남이 알 수 없는 기쁨이지만 예술로 사는 사람은 누구나 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감사를 드립니다.”(고전 15:57)

최광열(기독교미술연구소 연구원)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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