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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거룩하게 하심이니!(삼하 20:1-2, 14-22 살전 4:1-12 막 15:1-20)

기사승인 2023.03.24  02: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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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순절 다섯째 주일(3월26일)

1. 대제사장과 그 무리, 그리고 본디오 빌라도

사순절 셋째 주일부터 우리는 계속해서 예수님의 적대자와 배신자들을 주제로 살펴보았습니다. 이런 불의한 자들과는 함께 멍에도 매지 말고, 그들을 삼가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대표자가 바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장로들과 바리새인, 그리고 헤롯당과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대부분 종교 지도자들이거나 지역 유지(有志)인 장로들, 그리고 정치인들입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은 여기에 산헤드린 공회와 유대 백성들, 그리고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추가됩니다.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을 팔거나, 부인하고 떠났죠? 어떻게 보면 당시 모든 이들이 예수님을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에 의해 철저히 버림을 당합니다. 아마 지금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도 같은 경험을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자들은,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린 것이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인데, 이렇게 그들은 사랑 대신 시기와 질투, 그리고 미움과 분노에 휩쓸려 형제를 해하는 데 앞장섰기 때문입니다. 구약 말씀에는 이러한 인물의 예로 세바를 소개합니다. 다윗 왕 때, 쿠데타를 일으킨 인물입니다.

이렇게 인간 세상은 배신이 끝없고, 진리의 적대자들이 늘 존재하며 참 평화가 없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하라고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려 하심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서 말씀부터 볼까요?

▲ 미하이 문카치 <이 사람을 보라>(1981)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주니,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 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고발하는지라. 빌라도가 또 물어 이르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발하는가 보라 하되,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으로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놀랍게 여기더라.”(막 15:1-5)

불의한 자들은 자기 손에 피를 묻히기 싫어 산헤드린 공회에서 합의를 보고 예수님을 로마 총독에게 넘겨줍니다.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고발한 것입니다. 여러 가지로 고발했다고 하니, 기가 막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묵비권을 행사합니다. 대답 자체가 꼬투리를 잡히기 때문일까요? 예수님은 침묵하십니다. 아무튼 빌라도는 알았습니다. 대제사장 무리가 예수님을 시기하고 있는 것을!

따라서 예수님을 풀어줄 방법을 생각하여 대제사장 무리에게 조건을 제시합니다. 명절이면 총독이 유대인 범죄자에게 사면권을 행사하는데, 민란을 꾸민 바라바와 예수님 둘 중 한 사람을 너희가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더니,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 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무리가 나아가서 전례대로 하여 주기를 요구한대, 빌라도가 대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막 15:6-10) 

대제사장은 무리를 충동합니다. 결국 우매한 민중들은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소리칩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막 15:11-14)

결국 빌라도도 어떻게 할 수 없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지시합니다.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군인들이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리온(Praetorium, ‘장군의 천막’이라는 뜻으로 로마 총독의 관저)이라는 뜰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경례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희롱을 다 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막 15:15-20)

대제사장 무리의 계략과 우매한 군중들의 분노, 그리고 본디오 빌라도의 우매함이 결국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이렇게 잘못된 분노와 우매함은 결국 계략을 짜는 이들에게 이용당합니다. 만약 유대 백성들이 지혜로웠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이 대제사장에게 이용당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으며 절제하고 상황을 제대로 파악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론 악랄한 대제사장 무리는 더한 방법을 강구(講究)하여 예수님을 죽였을 것입니다. 지난주 말씀에 예수님께서는 ‘이 일은 성경을 이루려는 것(막 14:49)’이라고 합니다. 우리 인간의 죄가 이처럼 추악하다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이 잘 보여줍니다. 아무튼 분노한 무리에 의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됩니다. 

2. 분노하는 인간, 호모 이라쿤두스!

사실 우리 사회(특히 교회)는 분노에 관해 ‘절제’와 ‘순종’을 가르쳐 왔습니다. 로마 시대의 철학자 세네카(BC 4∼AD 65)의 말처럼 “화를 내며 보내기에 우리 인생은 얼마나 짧은가!”인 것입니다. 세네카의 책 『화에 대하여』(사이, 2013)는 인간이 화를 내는 일의 부질없음을 지적한 고전입니다. 사실 세네카가 볼 때 분노는 악입니다. 세네카는 이렇게 말합니다.

“분노에 한 번 사로잡히면 자식이 부모를 죽일 수도 있고, 선왕을 폭군으로 만들기도 하며, 가장 선한 존재에서 가장 사악한 존재로 변하게 할 수 있으므로 분노는 악이다. 그 뿌리까지 제거해야 한다.”

따라서 세네카는 “어떤 경우에도 화를 내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곧 평정심을 유지할 줄 아는 현자(賢者)가 세네카의 이상형입니다. 그러나 ‘분노하는 인간’, 곧 ‘호모 이라쿤두스(Homo Iracundus)’를 우리는 주변에서 너무도 자주 보지 않나요? 왜냐하면 분노는 우리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가장 큰 존재론적 요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자 플라톤은 분노를 “정의를 향한 영혼의 능력”이라고 보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분노의 시작이 어디에 있느냐입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 나라를 위한 거룩한 분노인가? 아니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어리석은 무리처럼 사탄에게 이용당하는 분노인가?

고려대 철학과 손병석 교수의 『고대 희랍 로마의 분노론: 분노하는 인간 호모 이라쿤두스 연구』(바다출판사, 2014)는 그리스-로마 시대의 분노를 잘 분석했습니다. 먼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인용합니다. 『일리아드』 첫 대목에서 아킬레우스는 자신이 아끼는 노예 소녀 브리세우스를 아가멤논에게 빼앗기고 분노합니다. 물론 아가멤논도 자신의 소유물인 크뤼세우스를 트로이 장군인 크리세스에게 빼앗겼기 때문에 아킬레우스의 브리세우스를 빼앗아옴으로써 보상을 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그리스 고전문학의 원형으로 평가받는 작품이 분노를 전면에 내세웠던 것이죠? 잘 아시다시피, 『일리아드』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노래하라,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스의 분노를 노래하라.”

손병석 교수는 호메로스의 영웅시대가 기본적으로 티메(τιμή), 즉 ‘명예’를 중시(사랑)하는 ‘필로 튀모스’ 사회였음에 주목합니다.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은 노예 소녀를 잃은 것을 단순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명예를 빼앗겼다고 느꼈기 때문에 분노한 것입니다. 명예를 가장 중시한 사회에서 명예를 빼앗긴 후에 일어나는 분노는 당연하였습니다. 결국 호메로스의 작품에 잇따라 등장하는 분노는 단순히 개인적으로 ‘욱’하고 올라오는 야만적인 감정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회적·정치적 의미의 분노입니다.

손병석 교수는 이 책에서 플라톤의 분노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노를 핵심적으로 다룹니다. 스승과 제자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두 분노의 긍정적인 면에 주목했습니다. 불의에 대해 느끼는 분노는 오히려 마땅하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먼저 플라톤부터 살펴볼까요? 플라톤의 『국가』에 ‘튀모스(thymos)’라는 덕목이 나옵니다. ‘기개’ 혹은 ‘기상(氣像)’으로 번역되는데, 불의에 대해 느끼는 공분(公憤), 곧 분노를 의미합니다. 앞서 언급한 티메와 같은 말입니다.

이러한 튀모스에 관해 손병석 교수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부정의에 대항하여 도덕적 분개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영혼의 능력이며 이기적이기보다 이타적이며, 사적이라기보다 공동선을 지향한다.” 결국 플라톤의 이상 국가, 곧 정의가 올바로 실현되는 국가의 성공은 튀모스를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변영로의 시인은 이렇게 읊었죠?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다.”

플라톤과 비슷하지만, 인간을 ‘이성적인 동물’로 규정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노를 중용(中庸)과 연관시킵니다. 따라서 분노에 깃들어 있는 ‘과도한 폭력성’을 경계하면서도 분노가 중용에 따라 표출되면 괜찮은 감정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또한 마땅히 분노해야 할 일에 분노하지 않는 것은 중용을 지키지 않는 일이라고 보았습니다. 손병석 교수의 결론입니다.

“분노는 한 사회의 건강함을 포착할 수 있는 일종의 도덕적 바로미터다.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분노가 단순히 억제의 측면만이 아닌 ‘이성과의 조화’나 ‘적합한 표출’의 관점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우리 사회가, 또 한 개인이 ‘거룩한 분노’를 제대로 드러내어야 우리 사회가, 또한 한 공동체가 건강해질 것입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예가 바로 다윗 왕 시대 세바의 반란을 제압한 한 지혜로운 여인입니다. 먼저 말씀을 볼까요?

3. 옛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아벨에게 가서 물을 것이라 하고, 그 일을 끝내었나이다.

“마침 거기에 불량배 하나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세바인데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이었더라. 그가 나팔을 불며 이르되, 우리는 다윗과 나눌 분깃이 없으며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우리에게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매, 이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따르기를 그치고 올라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따르나, 유다 사람들은 그들의 왕과 합하여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따르니라.”(삼하 20:1-2)

말씀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진압하고 겨우 한숨 돌렸는데 이번에는 압살롬보다 더 큰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베냐민 지파 출신인 세바의 반란입니다. 이 일은 다윗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모셔오는 의전 문제로 유다 지파와 이스라엘 열 지파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진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삼하 19:40-43 참조). 유다 지파는 강경하게 다윗이 우리의 종친이기 때문에 유다 지파가 중심이 되어 환영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열 지파는 유다 지파가 자기들을 멸시했다고 다윗에게 항의했습니다. 

이런 혼란한 틈을 타서 세바가 이스라엘 열 지파를 선동하여 다윗에게 등을 돌리게 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열 지파는 다윗을 버리고 세바를 좇아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특별히 세바의 반란은 압살롬의 반란보다 더 광범위한 것으로 궁중 내부의 쿠데타가 아니라, 궁 밖의 쿠데타입니다. 그러나 이 쿠데타는 다윗의 심복 요압 장군에 의해 진압당합니다(물론 요압은 당시 진압군 사령관이었던 다윗의 조카 아마사를 죽이고 자신이 그 진압군의 사령관이 됩니다. 이것은 다윗이 압살롬의 군대 장관이었던 아마사를 벌하기보다 오히려 다윗의 군대 장관으로 삼았던 것에 대한 반발로 볼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다윗은 요압을 불신하게 됩니다. 아무튼!). 세바는 이제 도망갑니다. 이어지는 본문의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세바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 두루 다녀서 아벨과 벧마아가와 베림 온 땅에 이르니, 그 무리도 다 모여 그를 따르더라. 이에 그들이 벧마아가 아벨로 가서 세바를 에우고, 그 성읍을 향한 지역 언덕 위에 토성을 쌓고 요압과 함께 한 모든 백성이 성벽을 쳐서 헐고자 하더니, 그 성읍에서 지혜로운 여인 한 사람이 외쳐 이르되, 들을지어다. 들을지어다. 청하건대, 너희는 요압에게 이르기를, 이리로 가까이 오라. 내가 네게 말하려 하노라 한다 하라.”(삼하 20:14-16)

세바는 자기를 따르는 이들을 이끌고 북방의 견고한 성인 ‘아벨’과 ‘벧 마아가’로 들어갔습니다. 이 두 마을은 납달리 지파의 최북단에 있는 요새지로 서로 인접한 마을이었기 때문에 두 지명을 연결하여 함께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자 요압이 군대를 이끌고 세바가 은신해 있는 아벨 성을 에워싸고 토성을 쌓았습니다. 이제 성벽을 헐고 성을 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성읍에서 한 지혜로운 여인이 요압에게 대화를 요청합니다. 저는 이것을 거룩한 분노로 보고자 합니다. 자신의 성읍을 구하고자 불의한 세바에게 품은 분노입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요압이 그 여인에게 가까이 가니, 여인이 이르되, 당신이 요압이니이까? 하니 대답하되, 그러하다 하니라. 여인이 그에게 이르되,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하니, 대답하되, 내가 들으리라 하니라. 여인이 말하여 이르되, 옛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아벨에게 가서 물을 것이라 하고, 그 일을 끝냈나이다. 나는 이스라엘의 화평하고 충성된 자 중 하나이거늘, 당신이 이스라엘 가운데 어머니 같은 성을 멸하고자 하시는도다. 어찌하여 당신이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고자 하시나이까 하니”(삼하 20:17-19)

여인은 “옛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아벨에게 가서 물을 것이라 하고, 그 일을 끝내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옛날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벨 성에 있는 선생들에게 지혜를 빌려 인생의 해결책을 찾았다. 그만큼 아벨 성에 지혜자들이 많이 살고 있기에 이 성을 파괴해서는 안 된다’라는 뜻입니다. 아무튼 요압은 이 여인과의 대화에서, 아벨 성의 포위를 풀기 위한 조건으로 반역자 세바를 양도하라고 요구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 요압에게 세바의 머리를 넘겨주는 여인

“요압이 대답하여 이르되,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다.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다. 삼키거나 멸하거나 하려 함이 아니니, 그 일이 그러한 것이 아니니라. 에브라임 산지 사람 비그리의 아들, 그의 이름을 세바라 하는 자가 손을 들어 왕 다윗을 대적하였나니, 너희가 그만 내주면 내가 이 성벽에서 떠나가리라 하니라. 여인이 요압에게 이르되, 그의 머리를 성벽에서 당신에게 내어던지리이다 하고, 이에 여인이 그의 지혜를 가지고 모든 백성에게 나아가매, 그들이 비그리의 아들 세바의 머리를 베어 요압에게 던진지라. 이에 요압이 나팔을 불매, 무리가 흩어져 성읍에서 물러나 각기 장막으로 돌아가고 요압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왕에게 나아가니라.”(삼하 20:20-22)

이 여인의 지혜로 성을 구했습니다. 아니, 이 여인의 거룩한 분노가 성안 백성들에게 통했습니다. 결국 불의한 자, 세바를 처단한 것입니다. 결국 요압은 여인과의 약속대로 성에 대한 포위를 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렇게 형제를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움 속에서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위한 분노,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분노가 세상을 살리고, 우리 사회를 살리고 공동체를 살립니다. 오늘 이 땅에 나라와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바로 이러한 여인의 거룩한 분노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큰 것을 요구합니다. 분노를 넘어 거룩함을 취하라는 것입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그것을 요청합니다. 이것은 비단 데살로니가 교인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기도 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4.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거룩하게 하심이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끝으로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언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라.”(살전 4:1-6)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입니다. 이것은 형제를 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제사장 무리와 세바와 같이 불의의 길을 따르지 말고, 형제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에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욱 그렇게 행하고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살전 4:10-1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부르신 것은 거룩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룩한 분노’와 더불어 ‘형제 사랑’이라는 그리스도인의 본질을 잘 조화하여 조용히 자기 일을 하며 단정히 행하고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따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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