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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아라

기사승인 2022.09.27  14: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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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마태복음서 13:18-23)

▲ 내가 어떤 밭인가에 대한 사실은 모를 뿐더러 중요한 것도 아니다. ⓒGetty Image
“너희는 이제 씨를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무슨 뜻을 지녔는지를 들어라. 누구든지 하늘 나라를 두고 하는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가에 뿌린 씨는 그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또 돌짝밭에 뿌린 씨는 이런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곧 기쁘게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그 속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 가지 못하고,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걸려 넘어진다. 또 가시덤불 속에 뿌린 씨는 이런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막아,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런데 좋은 땅에 뿌린 씨는 말씀을 듣고서 깨닫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인데, 이 사람이야말로 열매를 맺되, 백 배 혹은 육십 배 혹은 삼십 배의 결실을 낸다.”(마태복음서 13:18-23)

1.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농부가 씨를 뿌립니다. 그 씨가 네 가지 땅에 떨어집니다. 길가에, 돌짝밭에, 가시덤불에, 그리고 좋은 밭에 떨어집니다. 각각 그 땅의 상태에 따라 그 결과가 천차만별로 달라집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는 새들이 와서 다 쪼아 먹어 버려서, 열매는커녕 싹이 나고 자라는 일이 시작도 못합니다. 돌짝밭에 떨어진 씨는 겨우 싹은 틔웠지만, 뿌리가 깊지 않아서 말라 버립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도 겨우 싹은 틔웠지만, 가시덤불이 햇빛을 막고 있어서 제대로 자라나지 못합니다. 그런데 좋은 땅에 떨어진 씨들은 잘 자라나서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듣고 ‘좋은 땅이 되어야지!’ 하고 결심합니다. 18절 이후에 예수님이 비유를 설명해주시는데, 그 말씀대로 ‘누가 나에게서 말씀을 뺏어가지 못하게, 악한 사람이 틈타지 못하게 해야지, 내 주변을 잘 살펴야지’ 한다. 또 ‘환란과 박해가 닥쳐와도 잘 이겨내야지’ 합니다. 또 ‘세상의 염려나 재물의 유혹이 와도 잘 이겨내야지’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 말씀의 뜻을 잘 깨달아야지’ 합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의도는 그렇지 않은데,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면, 이 모든 것이 내 문제가 아니라, 외적인 문제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할 일은 단 하나, 깨달음만 남게 됩니다. 나머지는 세상의 염려나 재물의 유혹, 환란과 박해고, 나에게 다가오는 악한 자들의 몫입니다. 물론 내 마음의 문제이지만, 모든 원인이 나와는 상관없는 나의 밖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변명하게 됩니다. ‘나 잘 알아. 잘 깨달았어. 그런데 나 말고 세상이 밖이 문제야. 그래서 어쩔 수 없어. 나는 잘 하려고 하는데, 깨달은 대로 살려고 하는데, 세상이 막는데 어떻게 해. 환란과 박해를 이겨내고 유혹과 시험을 극복하는 것도 한 두 번이지, 내가 어떻게 해? 하나님이 나머지는 다 해 줘야지.’

‘하나님, 나를 왜 돌짝밭으로 만들었습니까? 왜 좋은 땅으로 안 만들었습니까? 가시덤불 길가 땅으로 나를 그렇게 만들어놓고 왜 열매를 못 맺느냐 하시면 됩니까? 하나님이 농부라면, 나를 잘 개간하고 일궈서 좋은 땅을 만드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하고 하나님께 따지고 듭니다. 말씀을 오히려 오해하고 ‘나의 역할은 다했다. 하나님이 나머지는 해야 한다. 하나님이 하나님 역할을 제대로 안 하시는 거 아니냐?’ 합니다.

이런 반응들은 전적으로 예수님을 오해한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비유의 의도는 ‘말씀을 제대로 깨달아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비유를 해설해 주시는데, 그 처음과 끝에 “깨달음”이 있습니다.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말씀을 빼앗아 갑니다.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기쁘게 받아들인 말씀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세상 염려 유혹이 말씀을 막습니다. 포인트는 ‘깨달음’입니다. 모든 것이 말씀을 깨닫는 것과 연관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러이러한 것들이 있는데, 이런 문제가 있는데, 그걸 이겨내지 못하면 안 된다. 그거 못 이기면 너는 나쁜 땅이야, 실패한 거야’ 그런 말이 아닙니다. 모든 실패, 좌절, 무너짐, 이런 것들이, 나와 상관없이 외부에서 나를 무너지게 하는 그런 것들이, 사실은 나의 깨달음과 하나 되어 있는 연관되어 있는 그런 일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깨닫는 것과 박해를 이겨내는 것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깨닫는 것과 세상 염려 유혹을 이겨내는 것이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깨닫는 것과 악한 자가 우리 삶에 침투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 아닙니다.

오늘 비유만이 아닙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 사두개인들, 당시의 모든 종교인들에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똑같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 율법을 아는 것, 그것하고 내 삶을 살아가는 것이 왜 분리되어 있습니까? 왜 하나 되지 못했습니까? 그거랑 그거랑 사실 똑같은 겁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하고, 회사에 가서 일하는 것이 다른 일이 아닙니다. 길거리에서 이웃을 만나고, 시장에 가고, 경제활동을 하고 하는 세상일과 다른 일이 아닙니다. 말씀을 읽고 그대로 산다고 하는 것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정치 경제 문화와 다른 일이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 안다고 잘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에 나갈 때는 그 마음 딱 저 속에 묻어놓고, ‘세상살이는 다른 거야. 집에 와서 교회 와서나 하나님 말씀 잘 믿으면 되는 거야.’ 그런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나는 하나다(요10:30)’ 하시는데, 그 말씀은 그냥 종교적인 교리가 아닙니다. 성부·성자·성령 삼위일체 따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라고 하는 진리, 말씀, 종교와 ‘나’라고 하는 세상 속의 구체적인 존재가 다르지 않다는 겁니다. 하나라는 겁니다. 그리스도 예수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7장 11절을 보면, 십자가를 앞둔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가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요17;11).”

말씀을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글씨로 쓰여져 있는 그 말을 그 언어를 해석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이 나와 하나가 되어서 나의 삶이 되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렇게 말씀이 온전히 내 삶이 되면, 악한 자가 나에게 닥쳐오지 못합니다. 환란과 박해가 나를 넘어뜨리지 못합니다. 세상 염려 유혹이 나를 막지 못합니다.

3.

이 말씀을 또 오해하면 안 됩니다. ‘말씀을 깨달으면, 악한 자가 닥쳐오지 않는다.’ 그런 말이 아닙니다. ‘말씀을 깨달으면, 환란 박해가 없다.’ 그런 말이 아닙니다. ‘말씀을 깨달으면, 세상 염려 유혹이 말끔히 사라진다.’ 그런 말이 아닙니다.

말씀을 깨달으면 그 말씀으로 인해, 환란과 박해가 나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으로 인해, 그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려는 내 영의 힘으로 인해, 세상 염려 유혹이 나를 지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매번 강력한 내적인 힘으로 다 이겨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리저리 흔들리고 시달리고 고민으로 가득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환란과 박해를 겪고 있는 내 안에 말씀과 말씀의 깨달음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깨닫는다는 것은 삶의 태도를 정하는 것입니다. 내 삶의 자세를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는 겁니다. 무슨 사차원의 축복이 와서 하는 일마다 잘 되고 만사형통하고 대박 나고… 그런 게 아닙니다.

내 삶에 가득한 악과 환란과 박해, 세상 염려 유혹 앞에서, 어떤 삶을 사느냐? 그 일들을 놓고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떤 갈등을 겪고, 어떤 선택을 하느냐? 그 일들로 인해 하나님과 어떤 교제를 나누는가? 하나님과 어떤 영적 씨름을 하느냐? 그것입니다.

4.

제가 금년에 개인적으로 장기 프로젝트를 하나 진행하고 있는데요. 조정래 씨의 대하소설 3부작을 독파하는 것입니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전부 32권입니다. 지금 태백산맥과 아리랑을 다 읽고, 이제 한강을 시작하려는 중입니다.

일제강점기부터 우리나라 근대사의 큰 줄기를 꿰뚫는 엄청난 대작인데요. 대하소설답게 등장인물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수 십 명 정도가 아니라 수 백 명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인물들을 관통하는 주제가 있습니다. 사람들을 묘사하는 일관된 시점이 있습니다.

똑같이 착하고 선한 사람이고 해도, 어떤 사람은 비참하게 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성공해서 떵떵거리며 살기도 합니다. 똑같이 나쁘고 악독한 사람이라고 해도, 어떤 사람은 인과응보 망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하늘이 원망스럽게도 승승장구합니다.

이 소설이 보여주는 것은, 그 사람들의 성공 실패 이야기가 아닙니다. 겉으로 보이는 결과가 아닙니다. 수많은 그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고 있는 진실함, 그 사람들이 품고 고민하는 진리입니다. 내 맘대로 안 되는 것이 이세상인데, 그런 세상 속에서 어떻게든 진리를 품고 진실하게 살아내려는 노력! 소설은 끊임없이 사람들의 마음의 중심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그 중심을 지켜내고 붙들고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인간의 모습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역사의 비극을 그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밀한 속사정은, 우리 역사가 가진 궁극적인 힘, 우리 역사가 품고 있는, 우리네 사람들이 품고 있는 진실의 힘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삶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습니다. 착한 사람이 망하기도 하고, 악한 사람이 흥하기도 합니다. 그럼 뭐가 정의고 뭐가 진리입니까? 현상에 굴복하는 사람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전부라고, 그저 잘 살면 되는 거라고 그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키려고 해 봐야, 세상에서 실패하고 몰락하면 말짱 헛일이라고 합니다. 그게 뭐냐고, 그렇게 살기 싫다고 합니다. 그건 신앙이 아닙니다. ‘난 하나님 말씀 깨달았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했는데, 안되네, 세상 유혹이 강하네, 환란이 박해가 너무 심하네, 어쩔 수 없네.’ 그건 신앙을 허투루 배운 사람들의 변명입니다.

진짜 신앙은 겉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말하는 성공 실패?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진짜 성공과 진짜 실패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 그 말씀을 깨달은 나의 마음, 그 마음을 지켜 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태백산맥》, 《아리랑》 그 소설에 나오는 수많은 필부들은 겉으로 보면 다들 찌질 하고 아무것도 아니고 실패한 인생들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의로움을 정의를 붙들고 살고 있습니다. 누가 실패자입니까? 그들은 아무것도 아닌 모습으로 죽어가지만, 실은 역사의 승리자들입니다.

우리 신앙의 언어로 말하면, 하나님과 하나 되어 그 삶을 아름답게 돌파해 내는 승리자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환란과 역경을 이겨내느냐 이기지 못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어떤 각오로 그 앞에 서는가에 있다. 세상 염려 유혹에 넘어가느냐가 아니라, 그 염려 유혹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가? 그 고민을 올바르게 붙들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그 진짜 신앙의 전형을 보여주십니다. “십자가에서 실패했으니까 내 삶이 실패냐? 아니다. 내 삶을 가득 채우고 있는 고민을 봐라. 그 영적인 투쟁을 봐라. 그 영적 투쟁 속에서 마침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하나된 것을 봐라. 그 고민을 버려버리지 않고, 끝까지 붙들어서 십자가에 죽은 것 아니냐? 그것이 구원이고, 그것이 참된 삶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우리의 모습이다. 환란 박해, 세상 염려 유혹, 그런 것들은 우리에게 다가오는 세상의 물음일 뿐이다. 물음에 어떻게 대답하느냐가 신앙의 승리를 좌우한다. 세상의 문제에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지만, 세상에서 이기기 위해 신앙에서 지는 사람이 되지 말아라, 신앙에서 이기기 위해 기꺼이 세상에서 지는 사람이 되어라.”

5.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확신입니다. 어떤 신뢰와 확신일까요? 농부는 절대로 길가에 씨를 뿌리지 않는다는 확신입니다. 농부는 절대로 돌짝밭에 씨를 뿌리지 않습니다. 농부는 절대로 가시덤불에 씨를 뿌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무책임한 사람은 농부가 아닙니다. 우리 아버지는 선한 농부입니다. 사랑이 가득한 농부입니다. 우리가 혹시라도 잘못될까 오매불망 전전긍긍 돌보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그런 분이어서 절대로 아무 데에나 씨를 뿌리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가장 좋은 땅으로 일구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가장 좋은 땅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렇게 창조하셨고, 그렇게 가꾸고 계십니다.

‘우리는 날 때부터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어서 필사적으로 노력해서 선해져야 한다?’ 교리적으로는 그런 고백이 올바를 수도 있겠습니다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펼쳐주시는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선하게 창조되었고, 우리는 좋은 땅이요, 우리에게는 좋은 씨가 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친히 농부가 되셔서 우리 삶을 가꾸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하나입니다. 말씀을 깨닫기 위해 주님 앞에 엎드립시다. 그렇게 엎드러져서 주님과 대화합시다. 환란과 역경, 세상 염려와 유혹, 뭐 질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앞에서 주님을 붙듭시다. 주님과 상의합시다. 주님과 함께 고민합시다. 주님께 토로하고, 주님께 투정부리고, 주님께 떼쓰고, 주님께 화냅시다. 그러나 주님이 대답하시면 순종합시다. 그 외적 모습이 무엇이든 우리에게는 가장 선한 길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백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는 우리 눈에 보이는 열매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셀 수 있는 열매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좋은 열매구나‘ 하고 판단할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아니, 그 환란과 박해가 열매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저 주님과 하나 되어, 나를 좋은 땅으로 가꾸고 계신 주님과 교제하며, 함께 한 발 한 발 살아가면 될 뿐입니다.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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