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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동적 주체

기사승인 2022.08.06  23: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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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기 목사와 함께 하는 <성서와 위로>

▲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곳에서 에스겔은 하나님의 환상을 본다. ⓒGetty Image
그가 내게 말씀하십니다.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너와 말하고자 한다. 그가 내게 말씀하실 때 영이 내게 와 나를 내 발로 서게 하셨고 나는 내게 말씀하시는 분(의 말씀)을 들었다.(에스겔 2,1-2)

이것은 에스겔만의 독특한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경험입니다. 본문을 읽을 때 이 말이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 이미 눈치 채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네 발로 서라고 하시면서 그의 영이 그를 그의 발로 서게 하십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거나 말씀대로 할 수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의 일어섬에는 그의 일어섬과 그를 일으켜 세움이 결합되어 있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작은 일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자기 이해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내가 했음에도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 하게 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겸손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어서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현재가 오직 자기에게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서 오늘의 내가 있게 된 것은 부모님 덕택이라고 하거나 하나님의 은총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겸양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체적 결정이나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경우에도 그것이 온전히 자기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와 도우심이 있어서 그리 할 수 있었음을 인식하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특징입니다. 예컨대 우리는 우리의 그리스도 고백이 우리의 주체적 행동이라고 생각하지만 신약성서에서 우리는 그 고백이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임을 압니다(고전 12,3).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주체적 존재이지만 주체적인 것만은 아니고 피동적 존재이지만 피동적인 것은 아닙니다. 피동적 주체라는 말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우리를 그렇게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에스겔은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10년 전에 포로로 잡혀 바빌론에 왔습니다. 하나님은 제사장인 그를 예언자로 세우시려고 그에게 오셔서 환상을 보여주시고 위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환상은 어쩌면 5년의 세월을 무기력하게 보내고 있었을지도 모를 그에게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주었을 것입니다.

때문에 네 발로 일어서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알았고 그 말씀대로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의 영을 통해 그를 서게 하셨습니다. 그가 예언자로 일하게 된 것은 그의 의지에 반한 하나님의 강제도 아니었고 하나님의 도움 없는 자기결정에 의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를 존중하고 도우셨습니다. 그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를 임의로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능동적 ‘피조물’로 대하십니다. 우리의 관점에서는 위에서 말한 대로 피동적 주체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관계된 존재의 특성입니다.

우리의 결정과 행동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을 보고 감사드리는 오늘이기를. 우리를 존중하시고 보충하시며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날이기를.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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