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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스펙’과 ‘질병 낙인’의 사회에서 아픈 몸을 묻다!

기사승인 2022.07.24  22:4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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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한진희의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어느 페미니스트의 질병 관통기』(동녘, 2019)를 읽고

▲ 조한진희의 책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는 ‘아픈 몸’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한국사회의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정리연

내 몸이 아프다는데, 왜 증명해야 합니까

“요즘 자꾸 머리가 아프네”라고 말하자, 지인은 대뜸 “신경성이야”라고 한다. 뭐,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별로 신경 쓰고 있는 게 없는데? 마스크를 쓰면서 더 그러는 거 같아. 귀도 아프고”라고 했더니, “무의식 안에서 너도 모르게 신경 쓰고 있는 게 있겠지. 난 몇 시간 동안 마스크 껴도 아무렇지 않은데? 너, 너무 민감한 거 아니야?”라고 답한다.

음, 사실인데 믿어주지 않는다. 그래서 더는 얘기를 하지 않게 된다. 듣게 될 대답이 뻔하니까. 이따금 찾아오는 원인 모를 두통이 마스크 때문에 더 심해졌다. 여기저기 후기를 찾아보면서 마스크 유목민 생활을 한 지도 2년이 넘었다. 그나마 요즘엔 좀 편한 걸 찾았다!

나는 분명히 겪는 고통인데, 증명할 수 없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꾀병 혹인 예민한 사람으로 취급받을 때가 있다. 여성에게 대표적인 건 월경통이다. 모든 여성은 아니지만 대부분 월경을 시작하면서 끝나는 4~7일간 복통을 겪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월경증후군부터 복통이 심해서 진통제를 먹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 때가 있다. 그러나 “이것 봐봐. 배 아픈 거 맞지?”라면서 의사 진료나 엑스레이로 찍어서 증명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그래서 아프지만 마음대로 아플 수 없을 때도 있고, 괜히 주변에 미안해지고 일하기 싫어서라는, 억울한 누명을 받기도 한다.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소개는 다음과 같다.

1인 가구이자 페미니스트로서 ‘철인 3종 경기’를 준비할 만큼 튼튼한 몸을 자랑하던 저자가 어느 날 암 진단을 받은 뒤 ‘아픈 나’를 긍정하기 위해 분투했던 치열한 기록.
우리는 누구나 크고 작은 질병을 피할 수 없는데도, 흔히 아픈 몸을 ‘극복’해야 하는 상태로, 아픈 시간을 인생의 ‘낭비’라고 여긴다. 그렇다면 아픈 사람은 ‘건강해질 권리’밖에 없을까? 건강해지기 전에는 온전한 삶을 포기해야 하나? 아픈 몸을 향한 이런 통제의 시선은 결국 아픈 사람뿐 아니라 안 아픈 사람마저 소외시키게 된다.
이 책은 ‘아픈 몸’ 자체를 정면으로 마주본다. 아픈 몸과 살기 시작한 저자가 자신의 변화를 섬세하게 관찰하는 한편, 질병을 둘러싼 편견과 차별, 이를 뒷받침하는 사회구조, 의료제도의 문제를 살피고, ‘건강’과 ‘정상’의 의미까지도 거침없이 질문하며 ‘잘 아플 권리’를 고민한다.

저자인 조한진희의 약력을 보면 “와!”라는 탄성이 나올 만큼 화려하고 활동적이다. 장애인 운동, 팔레스타인 운동(내셔널리즘, 전쟁) 등 연결성을 중시하고, 영역과 형식에 갇히지 않는 활동을 지향했다. 2000년 여성민우회를 시작으로 사회단체들에서 상근했고, KBS 3라디오에서 몇 년간 인권 관련 영화와 책을 소개하는 게스트로 활동, 페미니즘 저널 「일다」와 시사월간지 「워커스」 등에서 ‘반다’라는 활동명으로 칼럼을 연재했다. 아프기 전에는 ‘다큐인’ 영상활동가로서 RTV 시사다큐 〈나는 장애인이다〉를 시작으로 몇 편의 다큐멘터리를 연출한 바 있고, 팔레스타인평화연대에서 동료들과 도서 『라피끄, 팔레스타인과 나』를 함께 썼다.

나도 모르게 사용하는 차별의 말들

사람들은 흔히 “건강하세요”라는 인사를 덕담처럼, 습관처럼 내뱉곤 한다. 무난한 말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특히 요즘 같은 감염병의 시대에는 더욱 많은 사람이 이런 인사를 건네곤 한다. 건강하라는 데 기분 나쁠 것 없으니까, 나 역시 생각 없이 내뱉곤 했다.

그러나 이 인사가 누군가를 배제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건강을 잃으면 무언가 잘못된 것이라는 전제, 건강하지 않음(혹은 못함)을 극복해야 할 무언가로 대하는 시각이 그 말에 깔려 있음을 이 책을 읽고서 깨달았다. 저자는 책을 통해 질병을 왜곡해 바라보는 차별의 언어들을 하나씩 보여준다. 지면상 에필로그 위주로만 서술하고 중간의 많은 사례는 넘어가겠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생각할 거리를 주는 거 같다. 당연히 더 깊은 이해를 위해서는 일독을!

질병과 장애 사이

소나기를 만난 교복 입은 아이들이 뛰기 시작했다. 그중 “현기증 때문에 빨리 못 뛰어”라고 말하며 뒤처진 아이에게 다른 아이가 말한다. “병신같이 왜 못 따라와!” 그러고는 다 같이 깔깔거린다. ‘병신’이라는 단어는 질병이 있는 몸을 비하하는 의미로 쓰이거나, 좀 더 직접적으로는 장애가 있는 몸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요즘에는 아이부터 어른까지 웃으면서도 화내면서도 사용하는 보편적인 멸시의 표현이 되었다. 또한 이만큼 강력하고 배타적이지는 않더라도, 아픈 몸을 차별하는 말들이 일상에서 흔하게 돌아다닌다. 저자는 아픈 사람을 차별하는 표현에는 4가지 유형이 있다고 한다.

첫 번째 유형은 정체성에 대한 부정적 수용이다. “긍정적이네, 아픈 사람 같지 않아”라는 식의 말이 여기에 속한다. 이런 표현을 칭찬으로 수용하려면 아픈 사람은 부정적 태도를 보인다는 전제를 수용해야 한다. 이때 아픈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적으로 수용해야 ‘칭찬’을 긍정할 수 있게 된다. 마치 “의리 있네. 여자 같지 않아”라는 말을 칭찬으로 수용하기 위해서 여자는 의리 없는 존재라는 전제를 수용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66, 이하 괄호 안의 숫자는 조한진희 책의 쪽수)

‘흑인치곤’, ‘아시안치곤’이라는 말이 생략된 것 같은 수많은 말들은 칭찬의 가면을 쓴, 사실상의 차별과 공격이었다고 「인종토크」의 작가 이제오마 올루오는 말한 바 있다. 유색인종들이 겪어온 수많은 micro aggression들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두 번째 유형은 질병에 대한 희화화다. “난독증 있냐?”, “암 걸리겠네!” 같은 말들이 이에 속한다. 자신의 고통이 인터넷을 돌아다니는 ‘농담’이나 한없이 가벼운 비유가 되었을 때 당사자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모두가 웃음으로 받아치는데 당사자가 당혹스러움과 불쾌감을 표하면 비웃음을 사거나 고립되기 쉽다. (중략) 자주 쓰이는 “지랄병 도졌네!”라는 식의 말도 마찬가지다. ‘지랄병’은 외전증(과거에 ‘간질’)을 비하하는 표현이다. 뇌전증의 증세인 발작을 희화화하는 사회에서 그 환자들의 인권은 요원하다.(67~68)

김지혜의 책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 지적된, 대중이 쉽게 내뱉는 차별의 말들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결정장애’, ‘안 본 눈 삽니다’ 등 차별하려는 의도 없이 사용했다고 해도 누군가는 분명히 배제되고 있는 말들, ‘어제의 내’가 했지만 ‘오늘의 나’는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이 떠오르는 대목이었다.

▲ 조한진희 ⓒ참여연대
세 번째 유형은 건강에 기준을 둔 차별이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거야”라는 식의 표현이 여기에 속한다. 건강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협박성 예방 표현을 말한다. 그런데 건강이 삶의 모든 전제 조건이며, 건강하지 않으면 다른 것은 무의미하다는 사고는 위험하다. 건강하지 않아도 삶은 계속되고,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리기도 하며, 계속 꿈을 꾼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만약 아픈 사람도 아픈 대로 공동체 안에서 돌봄을 주고받으며 나름의 역할을 해내고 존중받으며 살 수 있는 사회라면, 이러한 예방 표현은 그저 건강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표현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질병에 차별과 낙인이 붙어 다니는 사회에서는 위험해 보인다. 건강하지 않으면 모든 걸 잃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 건강하지 않아도 함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68~69)

이후 작가의 문제의식은 질병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는 시각으로 향한다.

네 번째 유형은 질병의 개인화다. “저렇게 살았으니 아프지”라는 식의 말이 여기에 속한다. 질병의 원인을 개인의 성격이나 생활 습관에서 찾고 자기 관리의 실패로 보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앞에서도 지적했듯 질병의 귀책을 철저히 개인에게 돌린다. (중략) 건강은 사회적 권력이나 차별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빈곤층일수록, 다양한 차별을 겪는 소수자일수록 더욱 아프기 쉽다. 사람들도 그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런데도 질병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문화에 너무나 익숙하다. 때로는 아픈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선을 긋고 자신은 그들과 다르다는 우월감이나 안전감을 느끼고 싶어 한다. (중략) 질병을 개인의 책임으로 몰아갈 때 건강 불평등을 만드는 사회구조는 휘발되기 쉽다. 정부가 산재, 야근, 성폭력, 가정폭력, 소수자 차별 같은 사회적 건강 위해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새삼 또 생각하게 된다.(69~70)

과연 질병의 원인은 개인에게 있다고만 할 수 있을까? 자기 관리가 부족해서, 생활 습관이 좋지 않아서 혹은 전생에 죄를 지어서 아프게 되는 것일까? 애초에 이 거대한 사회라는 시스템 안에 살면서 내가 하는 행동과 선택 중에 외부요인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개인을 둘러싼 사회 구조적 문제에는 눈 감은 채 이뤄지는 질병에 대한 논의는 개인에게도, 공동체에게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촘촘한 사회 그물망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에게 몸만큼은 네가 알아서 돌보라 하는 일은 분명 부당한 측면이 있다. 우리는 의료의 공공성을 무시한 채 의료 민영화를 강행해 온 국가들이 코로나19 확산에 의한 팬데믹이라는 전 지구적 위기 상황에서 어떤 희생을 치르고 있는지 목도하고 있기도 하다.

질병보다 위험한 질병 이미지

그는 “내가 상처 입은 것을 발병 때문이 아니라, 질병에 대한 우리 사회의 태도 때문이고, 아픈 몸이 되고서야 비로소 우리 사회가 건강 중심 사회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과정이 짧지도 쉽지도 않았겠지만, 질병이 몸의 일부일 수 있음을 인정하자 세상이 다르게 읽혔다는 것이다. 비장애인 중심 사회가 장애인들을 배제하듯이, 건강 중심 사회는 아픈 몸들을 배제하며 아픈 몸들을 자책감의 나락으로 밀어내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볼 문제다.

또한 건강을 추구해야 할 선(善)으로, 질병은 퇴치해야 할 악(惡)으로 규정하는 이분법적 사고를 하는 우리 사회에서 질병과 함께 살아야 하는 아픈 몸은 열등한 몸일 수 밖에 없다. 아픈 몸이 언제나 언제나 건강을 향해 달리고 있지 않아도 괜찮고, 건강을 다소 잃었더라도 열등한 몸이 아니다. 아픈 몸에 대한 사회적 태도와 환경적 조건이 변하면 아픈 몸도 ‘정상’적으로 온전히 살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저자가 제기한 문제의식 가운데 차별의 언어와 아플 권리 외에 눈에 띈 부분은 바로 ‘의료 가치관’이다.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권을 전적으로 의학에 맡기는 이른바 메디컬리제이션(medicalization)에 대한 논의는 꾸준히 이어져 왔다. 다시 말해 몸이 아파 찾아간 병원에서 다양한 정보와 그것이 바탕이 된 선택의 여지 없이 의사의 처방에만 오롯이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의미한다.

설령 결론이 처방된 의료 서비스를 받는 것으로 날지언정, 그 결론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환자가 의료에 대한 가치관을 정립하고 스스로 자신의 몸에 내려질 처방을 선택할 수 있는 일은 중요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의학적 전문 지식의 공유, 의사와의 권위적이지 않은 원활한 소통, 내가 내 몸을 이해하는 방법 등은 훨씬 더 자주 그리고 깊이 논의되어야 할 생각거리이다.

내가 보기에 현대의학은 정밀한 검사와 뛰어난 외과 수술 능력은 있지만, 몸을 총체적인 유기체로 보는 일에는 상대적으로 취약한 것 같았다. 그래서 큰 병이 오면 ‘몸의 조화가 깨져 질병이 오는 것으로 인식’하는 한의학적 관점도 필요해 보였다. 적절한 생활 습관을 만들고 면역력을 높이며 최소한의 수술을 받는 방법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아울러 의료도 시스템 안에 놓여 있고,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나는 환자들이 “의사가 전문가인데 가장 잘 알겠지”라며 무조건 의존하는 것이 반드시 좋은 선택은 아니라고 본다. 물론 의사는 환자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한다. 하지만 의사마다 그 최선의 ‘선택’에 조금씩 차이가 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수술 이후에 후유증이나 합병증을 안고 살아갈 이는 환자 본인이며, 몸이 여러 개가 아니니 후회하거나 원망한들 돌이킬 수 있는 방법도 없다.(243)

떳떳하게, 잘 아파도 되는 사회

아픈 몸을 통제해 정상적 몸을 만들려는 게 뭐가 문제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아픈 몸을 통제하고 극복해서 정상의 몸을 만들려다 보면 계속 실패자가 될 수밖에 없고, 자신을 미워하는 일이 반복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어서 말한다. “좀 더 설명하자면, 인간이 몸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위험한 발상이다. ‘누구나 노력하면 암을 극복할 수 있다’라는 식의 환상을 만든다. 이는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계속해서 암과 함께 사는 사람을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으로 나누는 사고가 형성된다.”

에필로그에서 작가는 기억해야 할 이들을 꼽았다.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홈리스와 장애인의 벗으로 불렸던 영상활동가 박종필 감독”, 화재로 세상을 떠난 “중증 장애 여성 김주영”, “돈 때문에 치료를 미루다 맹장염으로 세상을 떠난 기초생활수급권자이던 청년 김준혁”이 그들이다. 이들의 죽음을 기억하고자 하는 저자의 마음에서 우리가 ‘건강의 정상성’을 견제하고 질병의 만연함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를 깨닫는다. “질병과 아픈 몸에 대한 혐오를 뚫고, 상처조차 자원으로 삼으며, 우리 언어에 함께 힘을 실어 갈 수 있기를 바란다(p.385)”라는 저자의 말이 마음에 오래 남는다.

정리연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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