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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와 이슬람, 그 충돌의 역사

기사승인 2022.05.31  16:3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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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슬람과 그리스도교 (4)

▲ Jerzy Kossak, 「Battle of Vienna 1683」 ⓒWikipedia

이슬람의 빠른 확산

무함마드 사후, 이슬람은 곧바로 정복전쟁에 들어갔다. 아라비아 반도에서 출발한 이슬람이 1세기도 안 되는 기간에 서남아시아, 중앙아시아, 인도, 아프리카는 물론 남서부 유럽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거대한 세력권을 형성할 수 있었다. 동쪽으로는 파미르 고원을 경계로 당나라와 접경하게 되었고, 710년에는 오늘의 파키스탄과 인도의 펀잡주까지 진출했으며, 751년에는 고구려 출신의 고선지 장군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가 이슬람 군에게 패퇴 당함으로써 중앙아시아 전역이 이슬람화되었다.

서쪽으로는 비잔틴 제국을 공격, 두 차례나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했고, 카르타고를 698년에 함락하면서 이슬람군은 북아프리카 지역을 정복한 후(709년)(1), 711년에는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스페인의 이베리아 반도의 서고트 왕국을 멸망시켰다. 스페인은 그 후 15세기 말까지 이슬람 국가로 유럽에 이슬람 문화를 전파하는 창구 역할을 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모로코와 안달루시아로부터 중앙아시아와 펀잡 지방에 이르는 정주 지역으로 이루어진 군도에 사는 주민들이 단일한 정체 체제 안에서 살게 된 것이다.(2)

이슬람이 빠르게 정복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침체된 아라비아 일대의 상업과 목축업이 늘어나는 이슬람 공동체의 생존에 충분치 못했으므로 이주지와 비옥한 경작지의 획득, 공납지의 확대, 안정된 교역로 확보 등이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외적인 요인으로는 당시 최대의 제국이었던 비잔틴과 페르시아 제국이 오래된 전쟁으로 서로 피폐해져 있었고, 양 제국의 강압적인 통제정책과 과중한 조세수탈로 인한 민심의 이반을 들 수 있다. 이슬람은 정복이 끝나면 공납을 받는 조건으로 자유로운 종교생활을 보장했으며, 간접통치를 통해 민심을 수습함으로써 상당한 정도의 무혈정복사업에 성공할 수 있었다.(3)

이슬람의 확산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반응은 무엇보다 당황 그 자체였다. 그것은 그리스도교 세계가 이슬람에 대하여 아는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두 종교가 만난 시기에는 무지가 지배적이었다.(4) 무함마드 사후 약 100년 후, 오리엔트에서 이슬람과 대결한 최초의 그리스도교 신학자는 다마스코의 요한네스(650?-754 이전)였는데, 그는 이슬람을 이단의 하나로 보았다. 까닭은 무함마드가 특히 아리우스파 수도사로부터 정보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마스코의 요한네스는 꾸란에서 그리스도는 비록 신의 말씀이며 영으로 언급되지만 그리스도의 신성은 부인되고 있다는 것을 그 증거로 삼는다. 이것 때문에 그는 무함마드를 아리우스파의 영향을 받은 이단이라고 간주했던 것이다.(5)

십자군 전쟁으로 깊어진 골

이슬람과 그리스도교의 적대적 관계가 결정적으로 심화된 것은 십자군 전쟁 때문이었다. 그동안 완전히 적대적이지만은 않았던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간의 관계는 이 때부터 유럽의 중세사 전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하나의 전쟁 서사시로 바뀌게 된다.(6) 1187년 7월 4일, 시리아와 이집트, 북메소포타미아의 지배자였던 살라딘 이븐 아이유브가 갈릴래아의 히틴 전투에서 십자군 기사들을 결정적으로 격파하고, 같은 해 10월 2일에 예루살렘을 정복함으로써 교회가 추동하여 서방세계에서 마치 도취경에 빠진 것처럼 추진된 십자군 전쟁 자체가 사실상 끝나게 되었다. 그 후의 십자군 전쟁은 - 역사 기술에서는 흔히 예루살렘 정복을 포함시키지 않고서 모두 7차의 전쟁이 있었다고 하지만 - 오히려 전체적으로 실패한 모험의 에필로그로 간주할 수 있다.(7)

16-17세기 유럽에서는 지독하게 반이슬람적인 책들이 출판되었는데, 그리스도교의 이슬람에 대한 끝없는 증오는 동유럽에 대한 투르크의 정치적, 군사적 압력과 관계된 것이었다. 그리스도교의 이슬람에 대한 왜곡은 당시 그리스도교 서구의 열등감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수학, 화학 등 과학 분야에서는 물론 문학과 예술 면에서도 이슬람 세계는 서방세계의 모델이었다. 중세 유럽인들이 이슬람이 지배하던 세계를 동양(Orient)으로 표현한 것도 그들의 동양 지향성을 나타낸 것이다. ‘오리엔테이션’이라는 말에 함축된 ‘새로운 사조나 문화에 대한 적응’이라는 의미도 이로부터 유래했기 때문이다.(8)

타종교에 대하여 이슬람이 더 배타적이고 공격적이라는 이야기도 사실은 역사적 근거가 없다. 이슬람은 오히려 타종교에 대하여 관용적이었다. 1453년 이스탄불을 종교적 코즈모폴리턴 도시로 만들고자 했고, 패전국의 그리스도교 문화까지도 관대하게 수용하는 정책을 폈다. 이스탄불에 지금까지 그리스 정교회 본부가 존속하고 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다.(9)

1096년 십자군이 시작되고 진행되면서 라틴 세계는 이슬람과 창시자 무함마드에 대한 정보를 점점 더 많이 얻을 수 있었다. 무함마드가 이단적인 그리스도교 수도사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전설은 그 후 수백년에 걸쳐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며 나타났는데, 예를 들면 클뤼니 수도원장이며 서구의 이슬람 연구의 발안자이기도 한 페트루스 베네라빌리스(Petrus Venerabilis, 1094-1156)는 세르기우스라는 이름을 가진 네스토리우스파 수도사가 무함마드에게 정보를 주었다고 밝혔다. 세르기우스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면서 이런 신념을 위해 무함마드를 얻었다는 것이다.(10) 무함마드와 이슬람의 탄생에 대한 이 시기의 대중적 상상은 모두 새로운 종교를 독창적이고 자생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이단적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으로, 그리하여 사이비 종교로 낙인찍으려는 목적을 가졌다.(11)

이슬람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적대적인 태도는 십자군 전쟁에서부터 1453년5월 29일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에 이르는 일련의 군사적 패배에서 기인한 것이었다.(12) 그 후 오스만 제국은 1529년 비엔나를 포위하기까지 했고, 마침내 이슬람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두려움은 적대감으로 변하게 되었다.(13)

현대에 와서 이슬람과 그리스도교의 적대적 관계가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은1918년 오스만 제국의 패전에 따른 전후 문제 처리과정에서 영국, 프랑스 등 유럽의 강국들과 아랍 국가들 사이에 빚어진 유다인의 국가건설을 둘러싼 갈등이었다. 그 후 냉전체제 아래에서 강화된 서방의 친 이스라엘 정책이 결국 오늘의 이슬람 국가들과 그리스도교 서구 국가들 사이의 갈등을 심화시킨 것이다.(14)

미주

(미주 1) 루드비히 하게만, 『그리스도교 대 이슬람』, 채수일 역 (서울: 심산, 2005), 40.

(미주 2) 피터 브라운, 『기독교 세계의 등장』, 이종경 역 (서울: 새물결, 2004), 280.

(미주 3) 이희수, “공존과 충돌의 역사를 통해 본 이슬람”, 「신학사상」 제51호 겨울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2001), 24-25.

(미주 4) 루드비히 하게만, 『그리스도교 대 이슬람』, 46.

(미주 5) 루드비히 하게만, 『그리스도교 대 이슬람』, 46.

(미주 6) 조셉 폰타나, 『거울에 비친 유럽』, 김원중 역 (서울: 새물결, 1999), 84.

(미주 7) 루드비히 하게만, 『그리스도교 대 이슬람』, 58.

(미주 8) 안네마리 쉼멜, 『이슬람의 이해』, 김영경 역 (경북 왜관: 분도출판사 1999), 13.

(미주 9) 서재만, “아랍-이스라엘 분쟁은 종교전쟁 아니다”, 이슬람연구소 편, 『이슬람의 이상과 현실』 (서울: 예영커뮤니케이션, 1996), 77.

(미주 10) 루드비히 하게만, 『그리스도교 대 이슬람』, 48.

(미주 11) 루드비히 하게만, 『그리스도교 대 이슬람』, 49.

(미주 12) 스티븐 런치만, 『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 이순호 역 (서울: 갈라파고스, 2004), 209-225 참조.

(미주 13) 안네마리 쉼멜, 『이슬람의 이해』, 38-40 참조.

(미주 14) 서재만, “아랍-이스라엘 분쟁은 종교전쟁이 아니다”, 85.

채수일(전 한신대 총장) sooilchai@hanmail.net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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