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의용대, 조선의용군, 동북조선의용군 그리고 조선인민군 (1)
▲ 조선의용대 창설 기념사진 ⓒ위키피디아 |
6·25 전쟁기념 72주년이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다. 정전협정을 종전협정으로 바꾸자는 캠페인을 벌이며 100만인 서명운동을 벌였던 것도 아득한 옛날 일처럼 희미하다. 어느 책에선가 한 가지 이념으로 세상을 평정하기 위한 전쟁은 용납될 수 있다는 말을 읽었다. 보다 나은 이념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는 전쟁,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한 정의로운 전쟁은 선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 이념으로 획일화된 위험한 세상을 이미 보았고, 겪었고 인류가 추구하는 보다 나은 이념과 보다 나은 세상은 고정된 것이 아니며 사회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도 체험하였다. 어떤 이유로도 대량학살과 파괴를 위한 파괴, 반생명적이고 악마적인 전쟁은 미화되거나 정당화될 수 없다.
작년 2월 1일에 일어난 미얀마쿠데타에 저항하는 시위가 내전으로 치닫게 되자 세계 인권과 세계평화에 관심이 많은 한국인들의 단톡방에서 쿠데타세력을 성토하며 반쿠데타, 시민군을 지원하는 응원과 관심이 세차게 일어났다. 그 때 미얀마의 정통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문건 하나가 돌았다. 그 문건의 핵심은 쿠데타군은 항영독립운동을 벌인 미얀마의 정통세력이며 법통이고 그 반대편의 정권은 국제 자본주의 세력에게 조종당하는 하수인이라는 주장이었다.
글쓴이의 역사적 사실에 관한 기술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는 이미 7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그 정통세력이 정치 독점을 하면서 타락하고 부패하여 제국주의보다 더한 폭력을 휘두르는 반국가적 이기적 집단으로 전락하여 미얀마인들에게 증오와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미얀마의 해방과 독립을 가져온 정통 세력이 권력을 자기 후손들에게 승계하면서 정통과 정의에서 벗어나 부정과 부패의 온상이 되어 미얀마의 적폐세력이 되었지만 그들은 독립운동, 건국의 주역이라는 명분으로 자신들을 절대화, 합리화시키며 국민들을 70년 전의 역사적인 상황, 그 울타리에 가두어 버렸다.
그들의 정권욕으로 시작된 미얀마 내전이 주종족인 버마족과 소수민족들과의 투쟁의 양상으로 전개됨으로서 샨족, 카친족, 몬족들이 북부 산악지대로 피난하여 숨어들었고 친족은 인도 국경지대 미조람으로 카렌족은 태국 국경 쪽으로 피난하여 난민 캠프를 형성하고 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고향과 일터를 떠나 기아와 질병과 죽음에의 공포에 부딪히고 있는 현실이 악의 실체, 전쟁의 실체를 보여준다. 친(CHIN)족 피난민 캠프에서 일하는 어느 지도자가 가장 두려운 것은 굶주림과 종족간의 대량 학살을 야기하게 만드는 내전의 장기화라고 하였다. 굶주림으로 죽느냐? 학살로 죽느냐의 마지노선에서 유령처럼 헤매는 난민들의 마음을 느끼며 마냥 운다.
6·25전쟁은 3년이라는 긴 세월의 내전이었다. 38도선에서 동시에 침공함으로 내전을 일으킨 조선인민군의 전체 21개 연대 병력 가운데 47%인 10개 연대의 병력이 무정, 김두봉, 박효삼, 최창익 등으로 유명한 조선의용군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경악하였다. 일제에 총칼을 겨누었던 우리의 독립군이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남한 동포에게,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총을 겨눌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정황이 너무 슬프다.
김구 주석을 중심으로 하는 임시정부가 1940년 9월 17일, 중경 가릉빈관에서 창설한 광복군은 귀국 후 안타깝게도 해방정국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한국군 부대 창립에도 큰 기여를 하지 못하였으나 북한에서는 그 사정이 달랐다. 거의 절반의 군인들이 연안파라고 불리는 항일독립운동과 중국의 국공내전에 참가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론과 실전을 겸비한 군인들로 인민군 5사단, 6사단 12사단을 만들었으며 기타 부대로 배속되어 동족을 살상하는 일에 깊이 관여를 하였다. 감당할 수없는 역사의 아니러니!
5년 전 만해도 우리는 하나가 되어 독립을 부르짖는 한 형제자매였다. 그런데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북은 소련 군정이 남은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우리는 서로를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다. 남침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25일 만에 전주를 점령한 6사단의 뿌리 더듬어 보니 그들이 조선의용대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중국 관내에서 최초로 세워진 한국인 무장부대가 이율배반적이게도 남침의 선봉에 섰던 조선인민군 절반의 뿌리였다. 역사는 물이라서 담는 그릇에 따라 달라지는 것인가!
아픈 마음을 싸매며 조선의용대, 조선의용군, 동북조선의용군 그리고 조선인민군의 연관성을 고찰해보았다.
조선의용대
1937년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킨 해, 11월 12일 남경에서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단체인 조선민족혁명당(김원봉), 조선민족해방동맹(김성숙), 조선혁명자연맹(유자명), 조선혁명청년연맹(최창익)이 모여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조직하였다.(1) 김원봉, 김성숙, 유자명, 최창익은 의용대 창설에 앞서 중국군사위원회 정치부에 창설계획안을 제출하였다. 당시 중국군사위원장은 장개석, 부장은 진성, 부부장 주은래였는데 주은래는 김원봉의 황포군관학교 시절의 은사로서 정치부를 움직여 창설을 승인받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2)
그러나 군사위원회는 조선의용대를 산하 정치부 관리 하에 두는 조건으로 창립을 승인하였다. 그리하여 1938년 10월 10일 조국으로부터 이역만리 떨어진 중국의 한 도시 무한에서 조선인들이 만든 조선민족전선연맹 산하에 조선인 무장부대인 조선의용대가 항일무장독립전쟁을 목표로 하여 창립되었다.(3)
의용대 대장은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원봉이 되었으며 의용대 본부에는 기요조, 총무조, 정치조를 두었으며 조장은 각각 신악, 이집중, 김규광이 맡았다. 본부 산하에 2개의 구대(區隊)를 두었는데 1구대 구대장은 박효삼 이었으며 산하에 4개의 분대를 두었고 2구대의 구대장은 이익성 이었으며 산하에 3개 분대를 두었다. 각 분대는 12명으로 편성되었고 전 대원은 도합 89 명 정도였다.(4)
조선의용대는 건립 후 바로 무한 보위전에 참가하였다. 대원들은 국민당 사령부를 따라 전선에 나가 일본군에게 반전 선전활동을 벌였으며 적의 정보를 수집하고 중국어로 번역하였으며 위문단을 조직하여 병사들을 격려하고 중국인들의 항일정서를 고무, 추동시켰다. 그러나 무한보위전은 패배하였고 조선의용대는 무한을 떠나 일본의 미점령지역으로 분산되었다. 본부 인원들은 계림으로 옮겼고 가족들과 총무부는 중경으로 옮겼다. 각 구대가 본부와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김원봉은 자주 해당 지구에 가서 각 구대의 활동을 시찰하였다.
중일전쟁이라는 일본의 침략 앞에서 중국국민당과 공산당이 거국적인 항일 여론에 따라 37년 9월에 국공연합을 하였으므로 조선의용대는 출범할 때부터 국민당 정부의 군사위원회 정치부 산하에 속해 있으면서 동시에 중국공산당과 공산당의 무장부대인 팔로군과도 관계를 맺었다. 국공합작 이후 공산당은 무한, 중경에 팔로군 사무소를 설치하였으며 주은래, 동필무, 등영초 등이 사무를 관장하면서 조선의용대를 지지하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조선의용대 본부는 중경에서 주간 모임, 전시회, 좌담회를 열었으며 다양한 항일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조선의용대의 선전활동은 거리에 반전 만화 그리기, 벽보와 표어 부착 그리고 삐라 살포였으며 유동선전대를 조직하여 노래와 연극을 통하여 항일 무드를 조성하였고 라디오방송을 통하여 국내외 한인들에게 항일투쟁에 참여하기를 부추겼다. ❮조선의용대 통신❯이라는 소식지를 발간하였으며 국민당군대 제2포로수용소에서 조선인 포로에 대한 교양공작으로 그들에게 반전항일교육을 실시하였다.
제1구대는 박효삼의 인솔 하에 1938년 10월 23일 한구를 떠난 후에 장사에 이르러 장사의 대화재 복구사업과 이재민 구호를 펼쳤다. 그 후 평강전선에 나가 평강, 통성, 막부산, 신장하 등지에서 싸워 큰 전과를 올렸으며 39년 2월말에 진지선전대와 유격선전대로 나누어 전선과 유격구로 각기 떠났다.
제1구대 선전대는 39년 3월에서 5월에 이르기까지 호북성에서 십여 차례 전투에 참여를 하였다. 또한 십여 차의 매복습격전에서 통신시설을 파괴하고 탱크를 폭파하는 등의 전과를 올려 이름이 널리 알렸으며 따라서 조선의용대의 정치적 영향력도 커졌다. 특별히 김세일이 거느리는 제3지대는 형양에서 8백리가 넘는 강서전선에 도착하여 국민당군대와 함께 봉산, 건주가전투와 서산 유격전에 참여하였으며 전투 후에 일본군 배후에 들어가 삐라 살포와 표어 부착을 하기도 하였다. 40년 초에는 고우, 금하 전선에 나가 유가도와 경강령, 사가령 등지에서 함화선전(5)을 하였으며 만산전역에 참가하였으며 항주시내에 들어가 군사시설을 파괴하였다.
제2구대는 무한이 함락되고 있을 때도 한구에서 항일표어를 부착하였다. 그들은 후퇴하는 국민당군대를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였다. 제5전구에서 벽보작업, 만화그리기로 선전활동을 펼치면서 여러 전투에 참가하였다. 그들은 39년 2월에 두 부대로 나누었고 일부는 제1전구로 갔고 대부분의 대원들은 5전구에 남아서 전투와 선전활동을 병행하였다. 2구대는 10월에 총회를 열고 구대를 4개조로 나누어 화북과 화중으로 진군하기로 하고 국민당군대와 함께 평한철도의 급현으로부터 고교촌까지의 50리 철길과 전화선을 파괴하며 삐라를 살포하고 표어를 부착하였다. 3일 동안에 15 곳의 철길을 폭파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하였다.
제2구대는 11월에 조선의용대 제2지대로 이름을 개칭하였고 지대장은 이익성, 정치지도원은 임평이 맡았으며 대원은 73명으로 늘어났다.(6)
조선의용대는 중경에서 40년 10월 10일에 창립2주년 행사를 가졌다. 11월 4일에는 확대간부회의를 열어 많은 격론 끝에 조선의용대의 화북행을 결정하였다. 당시 조선의용대가 후방에서 선전활동만을 하기에는 중국 내 정세가 급변하고 있는데 국민당 정부는 일제와 싸우기보다는 공산당 세력타도에 전력을 쏟고 있어서 젊은 의용대원들은 염증을 느꼈으며 화북지역으로 가서 일제와 치열하게 싸우기를 원하였다.
간부회는 지난 2년의 활동을 평가하고 자체 무장 결여, 자력갱신의 문제를 검토하면서 조선동포 다수가 거주하는 지역으로 진출할 것, 대원들의 무장화를 통한 항일무장대오를 건립할 것, 정치선전 공작으로부터 전투공작으로 방향을 전환할 것, 국민당 정부군 지원활동은 대일선전 간부의 훈련에 치중할 것 등을 결정하였다.
조선의용대의 화북 이동의 이면에는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김원봉의 지도력에 도전한 최창익의 집요한 공작과 공산당과 국민당 세력의 관계 악화와 조선의용대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자하는 공산당의 전략의 결과이기도 하였다.(7) 실제로 의용대가 화북 행을 결정한 이유는 단순히 국민당과의 본질적 이념 차이, 국공합작의 약화에 따른 화중·화남에서의 활동기반 약화, 국민당군 장교들의 부패한 행태와 행패에 대한 실망 때문만은 아니었다. 중국공산당은 조선의용대를 화북으로 유인하기 위하여 간부들이 갈등을 부추겼으며 김원봉의 비서인 사마로에 의하면 쓰마라는 당원을 조선의용대에 심어서 의용대의 활동을 매주 보고받았으며 그들에게 화북행을 권하게 만들었다고 한다.(8)
의용대 본부는 중경에 남겨두고 나머지 부대는 하남성 낙양으로 집결하여 41년 3월에 황하의 맹진나루를 건너 화북으로 이동하였다. 41년 6월 화북조선청년연합회의 인도로 대부분의 대원들이 팔로군의 태항산 근거지에 도착하였다. 중국 팔로군들은 대대적인 환영대회를 열었으며 팔로군 부총사령인 팽덕회가 열렬한 환영사를 하였다. 그 해 7월 10일 임현에서 신악, 윤세주, 박효삼, 감창만 등을 중심으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결성하였다. 본부를 동욕진 상무촌에 두었으며 지대장에 박효삼, 정치지도원은 김학무가 맡았으며 제1대장에 이익성, 제2대장에 김세광, 제3대장에 왕자인이 임명되었다. 그러나 아직은 중경에 있는 본부와 결별하지는 않았다. 이때부터 조선의용대는 팔로군과 함께 편성되어 항일전에 뛰어 들었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건립된 후 팔로군과 함께 여러 무장선전대로 나뉘어 태항산, 진찰기변구, 진중, 산동 등지에서 활동을 하였다. 그들은 1941년 7월부터 1942년 8월 사이에 중국어, 한국어, 일어로 만든 삐라 3만 장, 만화 4만여 장을 살포하였으며 팔로군과 함께 40여차의 전투를 진행하였다. 가장 유명한 전투는 관대전투, 호가장전투, 마전전투 등이다.
호가장 전투는 41년 12월 26일에 조선의용대 대원 30명이 무장선전대를 편성하여 일본군 점령 하에 있는 마을에 들어가 항일선전공작을 수행하고 본대로 돌아가던 중 호가장 마을에서 일본군 500여 명에게 포위를 당하여 항복하지 않고 죽기를 각오하고 분전하여 탈출에 성공한 전투이다. 4명의 대원이 전사하고 2대장 김세광이 부상을 당하였고 김학철이 포로로 잡혀서 일본으로 끌려갔다.
마전전투는 일본군 6만여 명과 팔로군과 조선의용군 화북지대의 기천 명이 태항산맥 마전에서 벌인 전투이다. 일본군은 태평양전쟁 도발 이후 대대적인 팔로군 소탕작전을 벌였다. 팔로군 사령부는 박효삼 지대장에게 일본군이 점령한 양산마루를 취하여 퇴로를 열라고 명하였고 의용대원들은 일본이 점령한 양산마루를 취하여 팔로군을 구출하였다. 그러나 팔로군총부 참모장 좌권장군이 죽었으며 윤세주와 전광화도 전사하였다.
1941년 4월 조선의용대 주력이 화북으로 떠난 뒤 김원봉은 민족혁명당 제5기 제4차 당중앙회를 열어 임시정부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 김두봉은 조선의용대 본부가 광복군에 편입되는 것을 반대하다가 41년 가을 중경에서 태항산으로 떠나 그 다음 해 4월에 도착하였다. 김원봉은 더 이상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장악할 수 없음을 깨닫고 조선의용대 본부를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시키고 군무부장에 취임하였다. 이로써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공산주의 진영으로 본부는 민족주의 진영으로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이는 참으로 뼈아픈 결별이었다.
미주 |
(미주 1) 최삼룡, 『승리의 기록』 (중국 길림성 연길: 연변인민출판사, 2015), 84. (미주 2) 김삼웅, 『약산 김원봉 평전』 (서울: 시대의 창, 2016), 382-383 (미주 3) 양수천·차철구 외 3인 공저,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 (길림성 연길: 연변인민출판사, 2009), 551. (미주 4) 최삼룡은 『승리의 기록』 84쪽에서 창립 시 대원이 120여 명 정도였다고 한다. 김삼웅은 『약산 김원봉 평전』, 390쪽에서 97명으로 밝히고 있다. (미주 5) 함화선전의 뜻을 구체적인 뜻을 모르겠으나 당시 조선의용대가 맡은 임무가 대일본선전공작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때 이는 일본군 병사들에게 반전, 염전의 정서를 주입하고 사기를 저하시켜 투항을 유도하는 선전활동으로 이해할 수 있다. (미주 6) 양수천·차철구 외 3인 공저,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 554. (미주 7) 김삼웅, 『약산 김원봉 평전』, 450-451. (미주 8) 앞의 책, 455-4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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