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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군의 분열과 해체

기사승인 2022.05.14  16:5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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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용대, 조선의용군, 동북조선의용군 그리고 조선인민군 (2)

▲ “중한 양민족이 연합하여 일본 강도를 타도하자 – 조선의용군” 일본군 점령 지역에 침투해 폐허가 된 사찰의 담장에 항일 표어를 쓰는 조선의용군 화북 지대 선전대원 ⓒ위키피디아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화북조선청년연합회는 1942년 7월에 태항산 장하 기슭에서 2차 대표대회를 열고 이름을 화북조선독립동맹으로 개칭하였다. 산하 무장부대인 의용대의 이름도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바꾸었다. 김두봉이 주석으로 중앙상임위원에 무정, 최창익, 채국번, 이유민, 김학무, 박효삼, 김창만이 뽑혔다. 박효삼이 군사부장, 무정이 일본점령지역 공작위원회 회장이 되었다.

화북조선독립동맹 북만주특별위원회는 본부를 산서성 동욕촌에 두고 산하에 진서북, 진찰기, 연안 등 약간의 분맹을 두었다. 이들은 줄기차게 일본의 점령지역과 미점령지역에 공작원을 파견하여 분맹을 세워 선전활동을 강화하며 반일통일전선을 광범위하게 구축하였다. 동북만주로 파송된 이상조는 화북조선독립동맹 북만주특별위원회를 세워 연수, 바얀 등지에서 유격구를 창건하고 항일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였으며 김창만과 문정일은 점령구인 북평, 천진, 할빈, 서울 등 일본군의 점령구에 분맹을 세웠다. 당시 만주와 산동, 산서, 화북 등지의 도시에는 독립동맹의 지하공작대가 있었다.

화북조선독립동맹은 태항산 근거지에 무정을 교장으로 하고 김학무를 교무주임으로 하는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를 세워 조직적으로 맑스-레닌주의와 군사지식을 학습시켜 많은 조선족 정치, 군사 인재를 양성하였다. 1943년에는 군사인재를 심도 있게 양육하기 위해 12월에 학교 이름을 조선혁명군정학교로 바꾸고 군사와 정치 두 과목을 설치하고 학생들의 수준에 따라 대를 편성하여 집중적으로 학습을 시켰다. 김두봉이 교장, 박일우가 부교장, 주덕해가 총무과장을 맡았다. 조선독립동맹과 의용군의 본부를 연안의 근교지 라가평으로 옮긴 후 라가평에서도 조선혁명군정학교가 진행되었는데 주덕해, 전우, 장복 등의 맹원들이 개교 준비를 맡았다.

화북조선독립동맹은 일제나 친일파가 경영하는 공장과 광산 등에서도 선전공작을 벌였다. 당산제강소, 승홍밀광산, 대동에서 당고에 이른 철도 부설 현장의 노동자들을 훈련시켜 선전공작에 종사하게 만들었다. 해방구의 조선독립동맹에서는 황무지개간에 참가하는 외 병원, 상점, 이발소, 방사공장, 화물점, 운수대, 타면소 등을 경영하였으며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운영비를 해결하였다.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는 박효삼이 지대장을 맡고 팔로군과 함께 적후에 가서 정치공세를 벌이는 일을 주로 담당하였다. 평한철도와 등포철도 일대에서 화북지대의 적후선전공작은 부족한 한어로 열정적으로 선전한 일로 주민들에게 크게 공감을 얻어 유명해졌다. 또한 일본 군인들을 향한 선전활동도 뛰어나 일본인들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조선 적을 가진 군인들로 하여금 부대에서 이탈하도록 선동하였다. 이들의 활동으로 조선 군인들이 끊임없이 팔로군과 조선의용군 쪽으로 넘어왔다. 기열로변구의 조선독립동맹은 1943년에 숫자가 200여명으로 대폭 늘어났고 그들이 팔로군과 함께 유격전을 벌여 일본군 속에 있는 조선인 군인 150여 명을 포로로 잡기도 하였다.

조선의용군

1944년 초에 태항산 근거지에 있던 조선독립동맹 본부와 의용군 화북지대는 본부를 연안으로 옮겨갔다. 이때로부터 화북조선독립동맹은 조선독립동맹으로 개칭하고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도 조선의용군으로 고쳤다. 김두봉이 조선독립동맹 주석으로 뽑혔고 최창익, 한빈이 부주석이 되고 무정이 조선의용군 사령관이 되고 박효삼, 박일우가 부사령관이 되었다.

독립동맹의 강령의 골격은 반일통일전선을 구축해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고 종국에는 민주공화국을 건설한다는 것이었으며 독립을 위해 중국공산당과 공동전선을 형성하고 조선인 사이의 항일 민족전선을 확대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독립동맹의 핵심 인물은 무정, 한빈, 최창익은 모두다 공산주의자였지만 강령에 공산주의를 담지 않았다.(1)

이런 기본 방침으로 조선독립동맹에 다양한 세력이 참여를 하였으며 훗날에 이들은 연안파로 불려진다. 당시 조선의용군의 숫자는 500여 명의 규모로 알려졌다. 의용군의 구성을 살펴보면 첫째 중국공산당 소속의 조선인으로 무정, 박일우, 이유민, 정율성, 진광화 등 20여 명이다. 중심인물은 무정이며 이들이 화북에서 조선청년연합회 창설을 주도하였다.

둘째 만주 출신으로 모스크바 동방노동자공산대학을 거쳐 연안에 온 사람들로 방호산, 이권무, 주덕해, 진반수, 임해, 이림 등 10여 명이다. 셋째 조선의용대 출신으로 박효삼, 김학무, 김창만, 호철명, 윤공흠, 문정일, 왕자인, 이익성, 주혁, 강진세 등 50여 명이다. 넷째는 조선공산당 출신으로 최창익, 한빈, 허정숙, 김명시, 이화림, 안병진 등 20여 명이다.

어쨌든 조선독립동맹은 연안 인근에서 새로 모집된 80여 명이 참가하게 되어 연안에 머무는 조선독립동맹 관계자는 200여 명에 이르렀고 각 지역에 파견되어 선전, 공작 활동하는 사람들 약 300명을 더하면 500여 명의 규모가 되었다.

연안으로 이동한 조선의용군은 나가평마을에 본부를 두었다. 무정은 조선의용군 사령관인 동시에 팔로군의 포병사령관의 책임자였기 때문에 라가평의 조선혁명군정학교가 사령부 구실을 하였다. 조선의용군은 라가평의 병력 외에도 산동성에 이익성, 산서성에 김세광, 동북만주에 이상조가 이끄는 독립동맹 분맹이 있었으며 그들은 일본군에 종군한 조선인 병사들을 초모해 조선의용군의 병력을 증강하며 정보수집활동을 하였다.

1943년 6월 일본군이 태항산에 일대에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하자 조선의용군은 팔로군과 함께 곳곳에서 전투에 참가하였다. 이 때 중국공산당지도부는 조선의용군에게 연안으로 이동을 명하였다. 추후 중국공산혁명 성공 후에 조선에서도 공산주의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조선의용군을 보호해야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소수의 무리인 조선의용군을 비교적 안전한 지역으로 보내려고 했다는 해석이 우세하다. 그리하여 연안에 도착한 조선의용군의 주요 임무는 선전 활동과 일본군 점령지구에서 조직 공작을 하며 황무지를 개간하여 자력갱생을 도모하는 것과 공산주의 이론을 학습하는 것이 되었다.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였다. 조선의용군 각 부대들은 팔로군과 신사군에 편성되어 일본군의 투항을 접수하고 일본군과 위만군의 잔여세력을 소탕하며 일본군 점령지역에 사는 조선인들의 생명의 안전 보호에 즉각적으로 대처하였다.

8월 11일 팔로군 총사령부 주덕은 연안총부 제6호 명령을 발표하여 조선의용군사령부는 “즉시 산하의 각 부대를 통솔하여 팔로군 및 원 동북군 각 부대들과 함께 동북으로 진군하여 일본군과 위만군을 소멸하라”고 명령하였다. 12일에 기열료변구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군부대는  팔로군을 따라 동북에로 진군하였다. 연안에 있던 조선독립동맹총맹과 조선의용군사령부 및 산하의 부대들은 9월 초에 연안을 떠나 동북으로 진군하였다.(2) 다음은 연안총부명령 제6호이다. 

연안총부명령 제6호(신화사 연안 12일발 급전)

연안총부명령 제6호

중국 및 조선 경내에 진군하여 싸우는 쏘련 붉은 군대에 배합하고 조선인민을 해방하기 위하여 나는 지금 화북에서 대일작전을 벌리고 있는 조선의용대 사령원 무정, 부사령원 박효삼, 박일우에게 즉시 소속부대를 통솔하여 팔로군 및 원 동북군 X부대와 함께 동북으로 출병하며 적과 괴로군을 소멸함돠 아울러 동북의 조선인민을 조직하여 조선을 해방하는 임무를 완수할 것을 명한다.
총사령 주덕중화민국 34년 8월 11일 12시

- 연안 ❮해방일보❯ 1945년 8월 12일)(3)

조선의용군은 팔로군 총사령 주덕의 전보를 받고 동북으로 달려가며 해방된 조국 조선에 입국할 꿈에 부풀었다. 그러나 조선은 이미 조선인 부대가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남한에서 임정요인들이 개인의 자격으로 입국이 허락된 것처럼 북한에서도 무장 독립운동가들은 환영받지 못하였다.

동북조선의용군

팔로군 총사령 주덕의 명령에 따라 무정은 조선의용군을 이끌고 9월 5일에 만주를 향해 출발하였다. 당시 그와 함께 3개의 그룹이 출발하였다. 첫째는 조선의용군 300명 정도였고 둘째는 중국공산당 동북 파견되는 간부대가 270명이었고 셋째는 두 그룹을 경호하는 경호단으로 1,000명 정도였다.

조선의용군 대원은 도보 여행을 하였고 마차 두 대에 짐과 무기를 실었다. 무정과 김두봉은 말을 탔다. 산서성 연안을 출발해 내몽골자치구, 하북성을 거쳐 요녕성에 이르는 4천리 장정이었다. 장개석이 팔로군의 이동을 금지시켰기 때문에 그들은 국민당군을 피해 움직여야 했다. 하북성 장가구에 도착해서 기차를 이용해서 북경까지 가려 하였으니 국민당군이 선점을 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검거를 피하기 위해 회래에서 내려 승덕을 거쳐 금주에 도착하여 김웅의 인솔로 태항산에서 출발한 조선의용군 300명과 합류하였다. 그들이 심양에 도착한 것은 11월 초였다.

심양에는 하북성 동북지역의 기동지대 소속 조선의용군 400명이 부지대장 이대성과 지도원 주연의 인솔 하에 먼저 도착해 있었다. 여기에 연안에서 출발한 조선의용군 본대 300명과 김웅이 인솔한 태항산 의용군 300명, 1945년 10월 무장입국을 시도했단 실패하고 돌아온 선견종대 1,500여 명 등이 합류하여 당시 심양에 모인 조선의용군은 2,500명 이상이었다. 심양에서 무정은 모스크바에 있던 일본 공산당 지도자 노사카 산조를 통해 소련 측에 조선의용군의 북한 입국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허락하지 않았다.(4)

중국공산당과 협의 끝에 조선의용군은 조선의용군을 동북조선의용군으로 개칭하고 만주에 남겨두고, 간부들만 입국하기로 하였다. 그들은 동북조선의용군을 3개의 지대로 새로 편성하고 지원자들을 계속 받았다. 1지대는 김웅을 지대장, 방호산을 정치위원, 안빈을 참모장, 주연을 정치주임으로 만들어 남만주에서 중공군을 돕게 하였다. 무장 입국에 실패한 조선의용군 선견종대도 1지대에 배속하였다. 3지대는 지대장 이상조, 정치위원 주덕행, 부지대장 이덕산, 참모장 김연, 정치주임 이근산, 공급처장 관건을 중심으로 북만주에서 활동하게 하였다. 5지대는 이익성을 지대장, 박훈일을 정치위원, 부지대장을 이권무, 참모장을 전우, 정치주임을 조열광으로 하여 동만주를 거점으로 활동하게 하였다. 아울러 5지대는 박일우의 총 지휘를 받도록 만들었다.(5)

조선의용군은 총사령관 무정이 동북지역에 도착하기 전에 두 차례 입국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두 번 다 실패하였다. 첫 번째 무장 입국시도는 선견종대가 10월 중순에 시도하였다. 선견종대는 심양에서 조선의용군 지하공작활동을 하던 한청이 해방 직후 한인들을 모아 조직한 조선 입국을 위한 부대였다. 연안을 출발한 조선의용군 지도자들이 국민당군과 일본군의 방해로 도착이 늦어지자 소련군과 함께 입국할 생각으로 꾸린 부대였다. 그들은 만주지역에 파견되어 조선의용군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던 이유민의 지도와 지휘를 받았다. 김두봉은 “조선독립동맹의 회고와 전망”에서 입국을 시도한 부대가 “무장해제까지 당했다가 부득이 도로 출국하게 되었다” 고 밝히고 있다. 이 부대의 부대장은 한청이었고 정치주임은 주연이었으며 규모는 1,500명 정도였다. 그들은 소련군과 상의를 하고 신의주에 들어갔으나 10월 12일 소련군과 보안대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였고 쫓겨나왔다.

두 번째 무장 입국시도는 1945년 10월 하순 압록강지대에 의한 것이었다. 규모는 2천여 명, 지대장은 ‘김호’, 정치위원은 ‘김강’이었다. 압록강지대는 10월 하순에 안동에 도착하였다. 신흥학교에 자리를 잡고 3개 대대를 편성해 압록강을 건널 준비를 하였다. 김호와 김강은 소련군 평북경비사령부와 접촉하면서 도강을 시도하였다. 11월 초 소련군이 김호와 김강을 면담하고 입국을 허가했다. 그들이 압록강 철교를 걸어서 넘게 되었을 때 자원입대한 만주 한인들로 말미암아 조선의용군은 4천 여 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그들은 시가행진을 하였고 열렬히 환영을 받았으나 신의주 역 앞의 동중학교 거처하는 첫날밤에 기습을 당하였다. 그들을 기습한 것은 한웅의 부대였는데 한웅은 무장 해제 사건 얼마 후에 체포되어 평양형무소의 해방 후 제1호 사형수로 처형되었다. 조선의용군의 무장해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소련군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그 계획 속에서 한웅이 행동대원으로 이용당한 것이었고 소련은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한웅의 친일전과를 문제 삼아 사형에 처하였다. 압록강 지대는 무기를 잃고 바로 추방을 당해 만주로 돌아 왔다.

소련은 자신들이 지원하는 만주파의 권력 장악을 위해 조선의용군의 입국을 불허하였다. 그러나 해방직후 각 계파 간의 권력 투쟁을 의식한 김일성의 만주파는 우선 국내파 제거를 위해 연안파의 협력을 구해야 하므로 무장해제 사건을 국내파가 저지른 일로 몰아갔다. 소련은 조선의용군과 독립동맹의 지도자들의 무장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독립동맹이라는 이름사용도 허락하지 않고 개인의 자격으로 기차를 타고 입국하는 초라한 무명의 귀국만 허락하였다.

1945년 11월 7일 심양에서 동북조선의용군으로 개칭되고 3개의 지대로 나누어진 지대들은 자체 증원 작업을 계속하며 팔로군을 도와 국민당군과 싸웠다. 전투과정에서 제1지대는 1948년 11월 동북인민해방군 보병 제 166사로 발전하였다. 3지대는 3월 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보병 제164사로 발전하였으며 제5지대는 동북항일연군교도려와 합하여 1950년 2월 인민해방군 중남군구 독립 제15사가 되었다. 조선의용군은 동북에 머무는 4년 정도에 크게 성장하여 6만의 대군이 되었다.

미주

(미주 1) 안문석, 『무전평전』 (서울: 일조각, 2019), 95.

(미주 2) 양수천·차철구 외 3인 공저,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 (중국 길림성 연길: 연변인민출판사, 2009), 562.

(미주 3) 최삼룡, 『승리의 기록』 (중국 길림성 연길: 연변인민출판사, 2015), 41.

(미주 4) 안문석, 『무전평전』 (서울: 일조각, 2019), 114-115.

(미주 5) 앞의 책, 115.

이이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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