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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술이냐 하나님이냐

기사승인 2022.02.10  15:3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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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별의 지혜가 필요한 때(미가 5:10-15; 마태복음 7:15-23)

▲ Nikolai Ge, 「Witch of Endor」 (1857) ⓒWikipedia

사람이 미래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지금 계획하는 일이 잘 될 것인지 아닌지, 지금 하는 일들이 잘 안되는데 앞으로 잘 될 것인지, 지금은 뭔가 계속 잘 안 풀리는데 언제쯤 잘 풀릴 것인지, 더 나아가면 사후에 어떻게 될 것인지 등에 대해 물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대부분 미래에 대해 기대와 불안을 동시에 갖고 있기 마련인데, 답답하고 불안한 마음이 클수록 미래를 알고 싶어 하는 마음도 커집니다. 이때 찾게 되는 것이 갖가지 형태의 주술입니다. 그런데 주술로 정말 미래를 엿볼 수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답답함과 불안을 덜기 위해 주술에 매달릴 수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주술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일이 사울에게 있었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이 죽은 후 블레셋인과의 전쟁에 직면합니다. 두렵고 마음이 떨려 그는 하나님께 묻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자 그는 ‘엔돌’의 강령술사를 찾아가 사무엘을 불러올리라고 합니다. 불려 올라온 사무엘의 영은 사울에게 자신이 생전에 그에게 했던 말을 되풀이 하며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은 탓에 이 전투에서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죽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강령술이 있다는 것에 마음이 흔들리십니까? 이를 통해 사울이 알게 된 미래는 패배와 죽음이고, 그것은 하나님이 불순종한 그를 떠나 그의 적이 되셨기 때문임이 분명해졌습니다. 사울의 현재와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현재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사울도 하나님이 그에게 침묵하셨던 이유와 그 의미를 모르지 않았겠지만, 두려움과 떨림 때문에 그는 금지된, 또 그 스스로도 금지했던 다른 길을 찾아갔습니다. 이처럼 그는 하나님께 물으면서도 끝까지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 못했습니다.

그는 사람이 주술을 찾는 이유를 분명하게 보여주었고, 이 사건에서 주술의 한계도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이는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사울의 사건은 정작 사람이 관심 가져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여기에는 물론 그 관계가 의미하는 것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 미가의 본문은 사울의 경험을 이스라엘 전체로 확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11절과 14절 하반절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성읍들을 무너뜨리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를 10절은 이스라엘이 군사력을 의지한 때문이고, 12-14절 상반절은 우상과 주술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더나아가 15절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넘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은 나라들에 대해서도 징벌하실 것을 말합니다. 그 이유를 이스라엘의 경우와 다르게 생각할 까닭이 없습니다.

군사력에 의존하는 것에 대한 비판을 성서에서 우리는 자주 듣습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군사력으로 따지면 세계에서 손꼽히는 강국에 속합니다. 그런데도 부족한 양 엄살을 부리고 계속 군사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심혈을 기울입니다. 무기 생산과 수출도 세계 상위권에 속합니다. 이를 위해 신무기 개발에 여념이 없습니다. 이에 대한 국내의 비판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노력을 성서는 왜 비판하는지요? 그에 대한 성서의 답은 기드온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내 손이 나를 구원했다고 하면서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내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에게 달려 있음에도 사람은 자신의 능력과 지혜로 승리했다고 자만할 수 있고, 그 결과 하나님을 멀리 하게 될 수 있습니다. 군사력 강화는 처음부터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현대에도 통용될 수 있는지 의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강한 군사력이 승리의 관건이 아님은 베트남 전쟁이나 아프카니스탄 전쟁 등에서 이미 확인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버리신 군대라면 사울의 군대든 미군이든 승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군사력을 의지하고 군사력 강화에 힘을 쏟겠습니까? 군사력 비판은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함이며 거기 내포된 군사력의 소규모화 내지 폐지는 전쟁의 폐지를 지향합니다. 군사력이 결코 평화의 길이 아님에도 우리는 안보를 내세우며 평화의 수단이라고 우깁니다. 지금은 세계가 부딪힌 위기 앞에서 군축을 단행하고 성서가 말하는 평화의 시대를 향해 노력해야 할 때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전쟁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태도입니다.

우상은 하나님을 대체하는 것이며 주술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최대 우상이 맘몬/돈임은 누구나 다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부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삼고 있는 세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음을 위에서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부는 거기에 더해 주실 수 있는 것이지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이를 뒤바꿈으로써 사람은 하나님을 주변화시키고 최종적으로는 완전히 밀어내게 됩니다.

만나 사건(출 16장)이나 포도원 품꾼 비유(마 20장) 또는 새 하늘과 새 땅 비전(사 65장)은 부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해방된 삶을 사는 평등한 세상을 그립니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으니 무가치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비전 자체는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돌아보게 하며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합니다. 그 점에서 그것은 이미 비판적 기능을 수행하며 우리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우리 속에 그 세계를 향한 꿈을 심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꿈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꿈꾸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알맹이 없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꿈을 삶으로 옮기는 실천이 어떤 형식으로든 우리에게 있기를 빕니다.

주술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 왔고 우리 사회의 경우 근래에는 TV의 오락프로에서도 심심찮게 등장할 만큼 널리 퍼져 있고 심각한 것은 그것이 정치권에도 그 영향력이 미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거짓 미래가 정책으로 채택된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겠습니까? 그 예를 예언자 미가야와 거짓 예언자들의 예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야훼의 이름으로 전쟁을 부추기고 승리를 장담합니다. 반면에 미가야는 그들이 거짓말 하는 영 때문에 그렇게 예언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일이 지금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선제타격이니 이런 소리가 주술적 판단에 의해 강화될 수 있습니다. 주술의 영향 아래 있는 정치인들이 득세한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군사력과 우상과 주술을 폐지하시려는지 그 의도를 이러한 비판에서 조금이나마 확인해볼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 뜻을 받아들이고 우리 삶의 방향을 그에 따라 정향시키고 그에 부합하는 행동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산상수훈의 말씀은 주님의 이름이 어떻게 도용되는지, 주술적 세력들이 어떻게 교회 안에 있을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했다고 주님에게 말합니다. 우리 교회 현실을 보면 그러한 자들은 당연히 칭찬받을 일을 한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들에게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일갈하시며 나는 너희를 모르니 내게서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 때문에 그들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로 불렸을까요?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그러한 일들을 이익의 수단으로 삼았고, 다른 하나는 자기를 자랑하고 과시하며 하나님보다 자기를 높이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것은 주님이 그들의 잘못을 탓한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모른다고 하신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교회 안에서 주님의 이름을 달고 살며 많은 기적들을 일으켰지만 주님과 관계가 없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 관계없는 주술사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교회 안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볼 때에만 주님의 말씀이 이해될 수 있습니다. 나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바로 그러한 자들이 놀라울 만큼 큰 능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큰 종이라고 생각한다 해도 주님은 그들을 모른다고 하십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주님과 관계없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종교적 영향력을 이용하여 악한 세력을 지지하고 자신들의 안전과 이익을 챙기기에 바쁩니다. 주님의 옷을 입고 주님의 이름으로 악에 종사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한 모습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어떻게 그들을 분별하고 그들을 멀리하며 주님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려면 그들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것과 일치하는지 판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정의를 행하고 인자(헤세드: 여기서는 공의로 이해해도 좋을 것입니다)를 사랑하고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미 6,8). 정의와 공의와 사랑 없이 하나님과 함께 가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마음을 마음으로 알고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빕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를 위협하는 교회 안팎의 세력을 분별할 수 있고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가기를 빕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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