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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권세 확장 시험’(신 4:20-24; 갈 4:12-16; 마 4:8-11)

기사승인 2022.01.27  19:2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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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현절 넷째 주일/설 주일(1월30일)

1.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네게 주리라!

주현절 넷째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받으시는 마지막 시험입니다. 이번 시험도 목회 현장에 적용하면 ‘권세 확장의 시험’이 됩니다. 이것은 풍요와 성장, 그리고 안정을 추구하는 시험입니다. 바로 말씀을 볼까요?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 4:8-9).”

▲ 세 번째 높은 산 시험

마귀는 이번에는 높은 산으로 예수님을 데리고 가서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여주고 이 모든 것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기에 천하만국의 영광이 이미 주님의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시험은 예수님에게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단순한 통과의례죠? 공생애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메시아 통과의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시험은 결국 예수님을 따르는 오늘 우리에게 임하는 시험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높은 산은 최고의 풍요와 성장을 뜻합니다. 마귀가 주는 그 풍성함과 권세를 안정적으로 누리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유혹입니까? “교회 성장하게 해주겠다.”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해주겠다.” 또한 “그 영광과 권세를 안정적으로 해주겠다.” “자자손손 그 영광을 물려주겠다.” 정말 “마귀 천국, 불신 지옥!”입니다. 다만 이 모든 것은 마귀에게 엎드려 경배할 때만 가능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2. 신의 경지에 오르고자 악마에게 영혼을 판 인간, 파우스트!

인류의 필독서라는 명성에도 불구하고, 모호한 상징과 비유 때문에 난해하다는 꼬리표도 붙어 있는 책이 있습니다. 바로 괴테의 『파우스트』입니다. ‘신의 경지에 오르고자 악마에게 영혼을 판 인간 파우스트’와 ‘파우스트를 끊임없이 파멸로 유혹하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 그리고 ‘영원한 여성상’ 등으로 오늘도 영감을 주는 작품입니다. 특히 파우스트는 오늘 복음서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과 달리,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에 넘어가죠?

▲ 괴테의 『파우스트』, 안진태의 『불멸의 파우스트』,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파우스트의 만남

괴테 연구자인 강릉 원주대학교 독어독문학과 안진태 명예교수는 『불멸의 파우스트』(열린책들, 2020)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문학의 정수가 되는 문·사·철(文·史·哲)은 삶과 학문의 기초라 볼 수 있고, 그런 점에서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저술한 『파우스트』는 문·사·철을 아우르는 괴테 문학의 최고봉이다.”

나아가 안진태 교수는 파우스트의 철학사적 영향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플라톤의 아름다운 영혼은 플로티노스(Plotinos)의 신플라톤주의를 거쳐 중세의 그리스도교 문학에 흘러들었으며, 다시 중세 말기 독일의 신비 사상과 16~17세기 스페인의 종교 문학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이성이나 오성이 아니라, 영혼에 의해 배양된 경건주의는 괴테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파우스트 책 내용을 잠시 살펴볼까요? 여성을 중심으로 1부에는 그레트헨이 등장하고, 2부에는 그리스 최고의 미녀 헬레나가 등장합니다. 트로이 전쟁 당시의 그 헬레나입니다. 1부부터 살펴볼까요? 주인공 파우스트는 철학·법학·의학·신학을 포함해 모든 학문을 섭렵한 당대 최고의 지성이지만, 나이 들어 기력이 쇠한 노학자입니다. 그는 자신의 학문의 결론으로 세상으로 들어가 행동하기를 갈망합니다. 말, 곧 논리와 세상의 이치에 관한 학문 지식보다 행동과 행위를 중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요한복음 1장 1절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계시니라.”를 “태초에 행위가 있었다.”라고 로고스를 행위로 번역합니다. 그리고 이 행위가 바로 파우스트의 삶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됩니다. 곧, 행동하는 인간이 바로 파우스트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행동하기에는 체력적으로 한계가 있었던 노학자 파우스트는 어느 날 자신을 찾아온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맺고, 다시 젊은이로 태어나 세상 속으로 행동하러 나갑니다. 그러나 젊음은 완숙되지 않은 것(요즘 이대남처럼 역사의 경험치가 부족하죠?), 젊은 파우스트의 행동은 쾌락을 지향합니다. 이러한 파우스트의 쾌락 탐닉은 그를 죄악으로 물들게 합니다. 가령, 순결한 처녀 그레트헨을 유혹해 아이를 낳게 하고, 그레트헨의 어머니와 오빠를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그레트헨은 결혼도 하지 않은 채로 아이를 낳고 세상의 비난 속에 정신이상을 일으켜 아이를 물에 빠뜨려 죽이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사실 그레트헨은 괴테의 첫사랑입니다. 괴테가 13∼15세 무렵 첫눈에 반한 여성입니다. 그레트헨은 술집에서 심부름하는 여성이었는데, 괴테는 그의 자서전 『시와 진실』(민음사, 2009)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무튼 소설에서는 그레트헨이 죽었음에도 파우스트는 쾌락의 바다에서 빠져나올 줄 모르고, 또한 죄책감도 없이, 더 큰 쾌락(행동)을 갈망합니다.

제2부에서 이러한 파우스트의 쾌락 지향적인 행동은 시간을 넘나듭니다. 곧 고대 그리스로 돌아가 헬레나를 유혹하고 결혼을 합니다. 왜냐하면 괴테는 헬레니즘에 대한 집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때 괴테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정말 모형(模型)을 원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고대 그리스인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그들의 작품 속에는 인류의 아름다움이 변함없이 표현되어 있다. 그 이외의 것은 모두 역사적인 관점으로서만 보아야 할 것이다.”

결국 괴테에 의하면 모든 미는 헬레니즘에서 오며, 문학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괴테가 열망했던 그리스로 돌아가 당대 최고의 미녀인 헬레나를 소유한 파우스트는 다시 현실로 돌아옵니다. 현실에서 큰 공을 세우고, 황제로부터 바닷가의 넓은 간척지를 하사받습니다. 그러나 간척지를 개간하는 가운데, 언덕 위에 살던 선한 노부부가 방해된다는 이유로 그들을 죽이고 집을 불태워 버립니다.

여기서 전환점이 생깁니다. 노부부의 집을 태워 죽인 불길 속에서 ‘근심’이라는 마녀가 나와 파우스트의 눈을 멀게 한 것입니다. 시각장애인이 된 파우스트는 이제 내면의 눈을 뜨게 됩니다. 그리고 환영을 봅니다.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사람들’과 어우러져 사는 유토피아의 환영인 것입니다. 아무튼 이때, 환영을 본 파우스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그러나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맺었죠? 어떤 쾌락과 기쁨을 맛보더라도 파우스트 자신은 절대 만족 못 한다고 했기에, 만약 어떤 한순간을 향해 “멈춰라!”라고 말한다면, 파우스트의 영혼을 메피스토펠레스가 가져가도 좋다고 계약을 맺었습니다. 따라서 파우스트는 바닷가의 드넓은 간척지에 자유로운 공동체를 세운다는 환상 속에서 죽음을 맞습니다.

마지막 결론입니다. 단테의 『신곡』에서 베아트리체가 단테를 천상으로 끌어올리듯이, 그레트헨이 파우스트를 이끌어 올립니다. 파우스트의 마지막 구절이죠?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 인간을 고양시킨다!” 안진태 교수는 이 부분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 올리노라’는 대작 『파우스트』의 마지막 구절이거니와, 하나의 여성 그레트헨의 사랑은 영원히 여성적인 본질인 어머니상이 되어 파우스트를 무한히 높은 곳까지 인도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성모 마리아의 모성성이 파우스트의 영혼을 구원했다는 뜻일 것입니다(저는 이것을 김기덕 감독의 영화 <나쁜 남자>를 분석하여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한다.”라고 비평한 적이 있습니다만). 모성성이 결함 많은 인간을 껴안아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굉장히 철학적이고 존재론적인 의미인데) 파우스트야말로 구원받을 만한 인물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비록 그의 죄에도 불구하고 파우스트는 방황하면서도 열망을 품고 노력했던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끊임없는 구원 추구의 노력은 방황이며, 이것은 곧 진리에 접근하려는 노력이자 방황인 것입니다. 안진태 교수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자아를 절대적 주체로 절대화한 파우스트는 중단 없는 행동의 의지를 가지고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추구한다. 파우스트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넘어 보다 나은 것을 요구하고, 지극히 행복한 순간에도 새로운 실현을 갈망하는 인물이다.’ 파우스트의 이러한 중단 없는 의지는 그의 끊임없는 생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천상의 서곡’에서 신도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선량한 인간은 비록 어두운 충동에 쫓기더라도 올바른 길을 잃지 않는다.”

이 말은 파우스트의 삶과 행동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하늘로 올라간 그레트헨도 성모 마리아에게 파우스트의 구원을 요청했죠? 왜냐하면 파우스트의 정신이 타락 속에서도 구원받을 만하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안진태 교수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애욕의 세계에서 신적인 성스러움의 경지까지 타파하고자 하는 욕망이 파우스트의 본질이다. 그리고 이러한 파우스트를 인도하여 구원하는 고결한 여성상이 그레트헨이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가만히 살펴보면 파우스트는 용서받기에는 악행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따라서 몇몇 학자들은 파우스트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작품 안에서 확실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 문제는 학계에서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는데, 아무튼 우리는 파우스트 안에서 ‘반대 방향으로 내달리는 두 가지 욕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안진태 교수는 이것을 ‘양극성’이라고 말하는데, 가령, 도입부 ‘천상의 서곡’에서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에서는 더없이 아름다운 별을 원하고 땅에서는 지고의 쾌락을 원하니, 그 요동치는 마음을 달래줄 것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겠습니까?”

이 말은 파우스트의 양극성을 정확히 보여줍니다. 두 가지 욕망 가운데서 방황하는 것입니다. 칸트의 묘비명처럼 저 하늘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싶어 하지만(곧, 높은 이상을 지향하지만), 동시에 쾌락의 극한까지도 가보고자 하는 인간이 양극성인 것입니다.

이러한 양극성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소설에 나오는 장미입니다. 일면 ‘장미의 유혹’으로 통칭되는 쾌락이 파우스트에서는 동시에 천국의 상징으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가령, 파우스트가 승천할 때, 장미꽃이 등장합니다. 이때 장미꽃은 악마의 정욕을 제압하는 종교적인 의미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파우스트가 운명한 직후에 그의 영혼을 데려가려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를 천사들이 합세하여 장미꽃을 뿌려 퇴치하게 됩니다.

이처럼 파우스트를 통해 인간의 양극성과 그 양극성에서 방황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문이 열려있다는 것이 파우스트의 결론입니다. 곧,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그러나 “그 방황하는 인간을 영원한 여성성이 구원으로 이끌어 준다!”라는 것입니다. 반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가 구원을 베풀어 줍니다. 이것이 인문학적 구원과 기독교 구원의 차이입니다. 파우스트에게는 ‘영원한 여성성’인 그레트헨이 구원의 상징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예수 십자가 구원입니다.

아무튼 파우스트와 달리 예수님은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십니다. 말씀을 볼까요?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 4:10).” 이 말씀이 메피스토펠레스를 내쫓습니다.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마 4:11).”

3. 소멸하는 불이시며 질투하시는 하나님

그렇다면 왜 우리가 마귀의 시험, 곧 권세 확장의 유혹과 파우스트처럼 욕망의 끝없는 행위 유혹에 넘어가지 말아야 할까요? 하나님은 바로 ‘소멸하는 불’이시며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구약 신명기 말씀에서 모세는 하나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오,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신 4:24).”

여기서 ‘소멸하는 불’은 맹렬히 타오르는 불처럼 인간의 죄와 불의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 역시 같은 맥락이죠? 그 구체적인 내용이 본문 앞부분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택하시고 너희를 쇠 풀무 불, 곧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사 자기 기업의 백성을 삼으신 것이 오늘과 같아도, 여호와께서 너희로 말미암아 내게 진노하사, 내게 요단을 건너지 못하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그 아름다운 땅에 들어가지 못 하게 하리라고 맹세하셨은즉, 나는 이 땅에서 죽고 요단을 건너지 못하려니와 너희는 건너가서 그 아름다운 땅을 얻으리니, 너희는 스스로 삼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어떤 형상의 우상도 조각하지 말라.”(신 4:20-23)

‘소멸하는 불’이신 하나님께서 비록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셨지만, 그들의 죄와 불의로 말미암아 기업으로 주신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나아가 ‘질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형상의 우상도 섬기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출애굽 1세대와 2세대에게 각각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사실 신명기 말씀은 히브리어로는 드바림, 곧 ‘말씀들(דְּבָרִים)’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말로는 ‘되풀이한다’라는 신(申)자를 써서, ‘다시 되풀이하여(申) 주신 명령(命)’입니다.

라틴어 성경은 ‘듀테로노미움(Deutero-nomium)’이라고 하는데, ‘두 번째 율법’을 의미합니다. 출애굽 1세대가 광야에서 다 죽고(소멸하는 불이신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제 가나안 입성 전에 출애굽 2세대에게 전하는 모세의 다시 되풀이 하여 주는 두 번째 율법에 관한 설교, 곧 “질투하는 하나님을 기억하라!”라는 설교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너희로 말미암아 내게 진노하사’라는 말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던 모세의 안타까운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민수기 20장에 나오는 므리바 물 사건(민 20:1-13) 때문입니다. 출애굽 당시 목이 말랐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부족하다며 불평하고 원망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돌을 두드리면 물이 나올 것임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불평하던 백성들에게 화가 나서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민 20:10b)”라고 화를 내며 반석을 두 번 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은 모세에게 실망하고 노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민 20:12).”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 곧 출애굽 1세대는 물론, 모세까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지도자와 백성 모두 출애굽을 완성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는 자신의 권세 확장, 곧 교만으로 실패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순종으로 망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4.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오늘 서신서에서 바울의 편지도 가슴을 울립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노골적으로 이야기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제발 신앙생활 좀 제대로 하라는 당부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갈 4:12-16)

지난주 말씀에서 이어지죠? 성전중심, 은사 중심의 천박한 초등학문인 유대교 율법 종교로 돌아가려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바울이 지금 쓴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었는데, 다시 율법의 노예로 회귀하려는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한 안타까움입니다. 옳은 말을, 참된 말을 했는데, 왜 듣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도 모세와 같이 극도로 화를 냅니다. 그러나 바울은 모세와 같이 자기 권세 확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을 증거합니다. 이것이 모세와 바울의 차이입니다.

5. 2022년 새해 20가지 결심

이렇게 모세와 바울도 예수님께서 받으신 ‘권세 확장 시험’을 받았습니다. 예수의 이름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과 권세를 내세우는 시험입니다. 또한 그 권세를 누리는 유혹입니다. 이것을 목회적으로 보면, 교회의 풍요와 성장, 그리고 안정에 대한 시험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깁니다. 교회의 풍성함과 권세를 안정적으로 누리는 것이 시험이라면, 도대체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성장과 권세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미국 플로리다주에 있는 웨스트 브레이든턴 침례교회 샘 레이너 목사는 2022년 새해를 맞아 ‘모든 목회자를 위한 새해 10가지 결심’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저도 년 초에 이 10가지를 깊이 생각해 보았는데, 나의 권세 확장이 아니라, 이 10가지를 실천하는 것이 마귀를 물리치는 것이며 진정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라고 결론을 짓게 되었습니다. 그 10가지를 소개해 볼까요?

“1. 교인들을 위해 날마다 기도하겠습니다.
2. 최소한 일주일에 한 번은 제 신앙을 나누겠습니다.
3. 성경을 열심히 읽겠습니다.
4. 교인들의 말을 더욱 청중 하겠습니다.
5. 감사하는 태도를 보이겠습니다.
6. 용서를 실천하겠습니다.
7. 우리 교회에서 최고의 격려자가 되겠습니다.
8. 규율에 있어 제가 모범이 되겠습니다.
9. 더 많이 웃겠습니다.
10. 불의를 심각하게 여기겠습니다.”

특히 1번의 경우, “적대감을 드러내는 성도를 위한 기도로 시작하는 것이 좋다.”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쉽지 않지만, 참된 기도의 시작은 나를 적대하는 사람을 위한 기도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10번입니다. 레이너 목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정의에 대한 설교가 더 필요하다. 소외된 이웃을 섬기는 교회가 더 많이 필요하다. 정의를 위해 싸우는 목회자가 더욱 절실하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10가지만 명심해도, 아니 1번과 10번 두 가지만 제대로 실천해도 한국 개신교회는 새롭게 변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 역시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의 이름으로 사탄·마귀를 물리치고 날마다 기도하며 불의를 심각하게 여겨 정의를 위해 싸우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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