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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약자와 사회적 소수자, 같고도 다른 이름

기사승인 2022.01.12  16: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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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소수자와 그리스도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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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앞으로 (성)소수자와 그리스도교라는 주제로 에큐메니안에 기획 연재를 하게 될 황용연입니다. (성)에 괄호를 친 이유는 이 연재가 주로 성소수자 이슈를 다룰 예정이지만 다른 소수자 이슈도 기회 닿는 대로 다룰 예정이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나가면, 성소수자 이슈를 살펴봄으로서 다른 소수자 이슈를 바라보는 관점과 방법을 정립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의도도 있습니다.

앞으로 이 연재에서 다루려고 생각하는 주제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 성소수자 파악을 위한 기본 개념 - 성소수자 집단 소개 - 성소수자와 성소수자 부모의 삶 - 성소수자에 대한 성서 해석
- 성소수자와 차별금지법 - 성소수자의 인권 - 성소수자에 대해 교회가 우호적으로 대처한 예
- 성소수자/소수자 문제의 신학적 쟁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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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글에서는 제목에 나온 대로 사회적 약자와 사회적 소수자라는 용어와 그 용어가 담고 있는 관점에 대해서 다루어 보고자 합니다. 제목에 밝혔듯이 이 두 용어는 상당히 비슷한 의미를 지닙니다만 그러면서도 어느 정도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그 다른 의미 때문에 더욱 생각을 많이 하게 하기도 하는 용어입니다.

우선 사회적 약자라는 조금 더 익숙한 용어부터 시작해 볼까요? 사회적 약자라고 하면 이 글의 독자분들 중 대부분은 금방 어떤 사람들을 머릿속에 떠올리실 겁니다. 비정규직 노동자, 장애인, 노숙자, 도시빈민, 노인, 여성 노동자, 이주노동자, 난민 등등. 이 연재의 중요 주제인 성소수자도 당연히 많은 분들이 떠올리실 테구요.

이런 분들을 사회적 약자라고 할 때는, 일단 사회적/경제적으로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다라는 데에는 다들 동의하실 것 같구요. 이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사회와 국가가 사회복지로 어떻게든 책임져야 한다는 데에도 다들 동의하실 것 같습니다. 조금 더 나가면, 사회적 약자의 삶의 어려움의 원인이 약자인 그들 자신에게 있다기보다 정책적 실패나 사회적 구조의 결함이라는 것에도 많은 분들이 동의하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할 때는 사회적 약자가 주로 그 약함에 초점이 맞추어져, 도와주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아집니다. 그래서 사회적 약자라고 했는데 뭔가 약한 게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주게 되면 약자가 맞니 아니니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죠. 또한 약자라고 하면 뭔가 선할 것 같다는 선입견도 있어서, 선하지 않은 것 같거나 뭔가 사회적 통념에 어긋나는 거 같으면 또 약자 취급을 못 받는 경우도 생깁니다. 그래서 좀 오래된 만화지만 [송곳]의 구고신은 이런 이야기를 했었죠. “선한 약자를 위해 악한 강자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시시한 강자와 싸우는 거란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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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들이 윤석열 후보를 찾아가서 교통약자 이동편의 증진법 제정을 요구하는 시위 겸 면담을 벌인 바가 있었죠. 그 자리에서 윤 후보가 장애인도 정상인과 똑같이 이런 발언을 했다가 그 자리에서 바로 시정 요구를 받았습니다. 정상인이 뭐냐고. 비장애인이라고 하라고. 이런 요구였습니다.

아마 이 글 읽는 독자 여러분들도 장애인 활동가들의 요구가 당연히 옳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지점을 한 번 짚어 보고 싶어요. 정상인이란 말이 틀린 이유는 장애인이 아닌 사람들만을 '정상'이라고 보게 만들기 때문인데요. 그런 사람들을 ‘비장애인’. 즉 장애인이 아닌 사람들이라고 칭한다면, 장애인-비장애인 이 말의 구도에서는 오히려 장애인이 기준이 된다는 느낌 들지 않으세요?

사회적 약자를 사회적 소수자라고 부를 때는, 바로 이 지점이 핵심이 됩니다. 약자라서 약한 사람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어떤 도움을 받아야 하고 어떠한 삶을 누려야 하는가를 기준으로 보면 사회구조 자체가 이렇게 저렇게 바뀌어야 한다는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게 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 사회적 소수자라는 말에는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사회적 소수자라는 말을 하게 되면, 기본적으로 사회적 통념과 구조에 대한 비판이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통념과 구조가 사회적 소수자 집단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도 않은 채 혹은 편견을 가진 채 구성되고 구축된 것이 아니냐라는 질문을 반드시 수반하게 되니까요. 버스 타는 사람들을 비장애인만 생각하다 보니 휠체어를 타고는 타고 내릴 수 없게 만들어 놓은 버스만 다녔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제는 휠체어를 타고 타고 내리는 게 가능한 저상버스가 늘어나고는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든 버스가 저상버스가 되어야겠죠.

조금 더 나가면, 그 사회적 통념과 구조가 기본적으로 어떤 종류의 사람들을 기본 구성원으로 생각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사회적 소수자란 말은 제기하기도 합니다. 그건 다시 말해서 어떤 종류의 활동과 경향을 이 사회에서 주류로 우대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해요. 그래서 저의 사견입니다만 저는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노동자 뿐만 아니라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에선 아예 노동자 자체가 소수자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이 나라 저 나라 이 지방 저 지방 모두 “기업하기 좋은 나라”, “기업하기 좋은 도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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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재의 주된 주제가 될 성소수자. 이름만 봐도 ‘소수자’죠. 그래서 이 연재에서도 성소수자에 대해서 방금까지 이야기했던 사회적 소수자라는 관점에서 주로 다루게 될 것입니다. 성소수자가 사회적 약자니까 이런 저런 도움과 관용이 필요하다 이렇게 다루기보다는 성소수자 이슈가 사회적 통념과 구조에 어떤 비판을 제기하는가 이렇게 주로 다루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연재의 독자분들께 의미 있는 시간이 되도록 노력할 것을 약속드리며 첫 연재는 이만 쓰겠습니다.

황용연(무지개센터[가칭] 준비모임 대표) hyysca@hotmail.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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