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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보다 반 발자국 앞서 등불을 들고”

기사승인 2021.09.26  15: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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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신대 이사장의 호소문의 정당성을 묻는다

교회, 목회 그리고 신학의 관계는 무엇일까? 신학은 목회자가 되기 위한 전 단계인가? 그래서 목사가 되고 직접 교회를 목회할 때 신학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일까? ‘꿩 잡는 게 매’라고,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다면 신학은 배움으로 그치고 뒷방에 가두어 두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일까? 혹 신학은 교회 성장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방해 요소로 작용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다. 신학은 목회의 가치와 의미 그리고 방향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신학이 교회와 신앙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단순한 존재 자체를 위한 것만은 아니다. 신학은 교회와 신앙의 존재 정당성과 의미를 결정짓는 핵심적인 것이다. 어떤 경우에 신학은 교회 없이 하나의 학문으로 존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교회는 어떤 경우에도 신학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신학대학의 존재는 매주 중요하다. 신학대학은 앞으로 교회의 목회를 담당해 나갈 미래의 목회자를 양성해 낼 뿐만 아니라 미래의 교회가 나갈 방향을 제시해 주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감신대 사태가 발생하였을 때 2015년 10월 19일 “모교 감신을 사랑하는 동문 207인”의 이름으로 발표된 “감리교신학대학교는 교회의 시녀가 아니다!”라는 제목의 성명서는 신학대학의 사명을 이렇게 적시하고 있다. “신학대학교가 교회의 현실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역할만을 감당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가 담아내지 못하는 새로운 신앙적, 신학적 가치를 창출하여 변화하는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도록 이끌어 주는 예언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감신입니다.” 신학대학은 무엇보다도 먼저 교회를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에 이견을 달고자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신학대학(교단 직영신학대학이므로)이 오직 교단의 신학과 명령, 정책, 행정, 그리고 교단 정치가 요구하는 사항만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실행기관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에도 우리는 이견을 달지 않을 것이다.

필자가 아르헨티나에서 아르헨티나 연합신학대학교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을 때의 경험이 떠오른다. 아르헨티나 연합신학대학(ISEDET)은 모두 9개 개신교 교단이 참여하는 신학대학이었다. 한 달에 한 번 교수진들과 현장교회를 대표하는 목사와 장로 그리고 평신도들과 모임이 있었다. 이 모임은 교수들이 새롭게 전개되는 신학 경향에 대한 강의를 하곤 했지만, 목회 현장의 목소리를 교수들이 경청하는 시간도 있었다. 그뿐만 아니다. 목회자들과 장로 그리고 평신도 대표들은 목회 현장에서 당면하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하여 교수들에게 신학적 견해와 의견을 물어오곤 했다. 성소수자, 인종차별, 신자유주의 경제정책, 토착민의 토지 회복문제, 이슬람교와 유대교인들과의 관계, 노동현장에서의 쟁의 문제 등에 대해서 어떻게 성서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가를 물어오곤 했다. 진지한 대화와 토론이 이루어졌다. 목회 현장과 신학의 꾸준한 대화가 이루어지는 광경을 나는 목격했다. 신학은 교회의 현장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교회는 신학이 말해주는 교회의 목회 방향에 대하여 지지하게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었다.

이처럼 신학과 교회 목회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교회 없는 신학은 철학 혹은 허공을 치는 현학적 소리로 변질될 것이다. 그러나 신학 없는 교회, 아니 신학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교회는 방향타 없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지 못한 채 표류하는 난파선이 되어서 많은 사람을 파멸의 길을 인도할 것이다. 코로나19 이후 본 모습을 드러낸 한국교회, 사회로부터 신뢰를 잃고 방황하는 한국 교회, 차별과 혐오를 옹호하는 세력으로 비치고 있는 오늘 한국 교회의 상황은 우리의 마음을 암울하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위기 앞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방향타 역할을 하는 신학의 존재를 갈구하게 된다. 신학이 우리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방향타 역할을 해 줄 것을 요구하게 된다. 그런데 오늘 한국 교회에서 신학대학의 위상은 어떠한가? 신학대학의 존재 정당성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9월 28일 개최되는 제106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다루어지는 중요 인사 안건이 몇 개 있다. 그중의 하나가 장로회신학대학교 총장서리에 대한 인준 건이다. 장로회신학대학은 2020년 제105회 총회에서 이사회가 상정한 임 모 총장 서리 인준 건이 부결된 아픈 경험이 있다. 그런 까닭에서인지 이번 총장 인준 건이 통과되어야 신학대학이 안정되어 훌륭한 목회자 양성 교육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의미에서 총회 개회가 2주 정도 앞두었던 시점에서 장로회 신학대학교 학교법인 이사회 이사장의 이름으로 “존경하는 총대님께”라는 제목의 호소문 성격의 글이 발표되었다.

이 글은 “제106회 총회를 앞두고 동성애와 관련하여 장로회 신학대학교에 대한 잘못된 소식들이 회자되고 있어, 그동안 본 대학교가 동성애와 관련해 단호하게 대처해 온 사실들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한다”며 본 글의 목적이 장신대가 얼마나 동성애에 반대하며 단호한 대책 수립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자 함을 천명하고 있다. 그러면서 장신대가 반동성애에 있어서 펼치는 정책을 크게 2가지로 열거하고 있다. 첫째는 장신대가 성경과 총회의 입장에 따라 “동성애”가 죄임을 규정하고 천명해 왔다는 것이다. 둘째는 장신대가 총회에서 요청하는 동성애 관련 조치에 어느 대학보다 신속하게 대처해 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장신대는 동성애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으니 장신대를 지켜달라고 호소하면서 장신대 총장에 대한 인준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장로신학대학의 여러 가지 어려운 사정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이해관계로 학교가 혼란에 휩싸일 수도 있는 것이 오늘 신학대학의 상황이기도 하다. 총장 인준이 학교의 안정을 위한 중요한 일임을 이해 못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성애 반대 대책을 확실하게 수립했으니 총장 인준을 포함하여 학교를 지켜달라고 호소하는 것이 학문의 전당인 대학의 호소문으로 적절한가에 대하여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사회를 비롯한 학교 관계자들은 장로회신학대학이 동성애 반대를 천명하고 그것을 학교안정으로 연결하는 논리가 학문의 전당(경건과 학문의 적절한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대학으로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대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또 묻지 않을 수 없다. 신학대학의 총장 인준이 학교의 안정을 위해 가장 핵심적인 일일까? 학교가 총장이 없다고 망하기라도 하는 것일까?

과연 장로회 신학대학이 동성애에 관하여 학문적으로 치열하게 논의하고 토론하는 과정을 거쳐서 오늘 반동성애 대책을 수립하였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교회 현장이 반동성애 목소리를 높인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교단 직영신학대학이라고 할지라도 신학대학이 강습소 혹은 목회자 양성을 위한 교습소나 학원은 아니잖는가. 아무리 교단 직영 신학대학이라고 하지만 적어도 경건과 학문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는 모습은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과연 반동성애 대책을 수립 하는데 있어 경건과 학문의 균형을 이루기 위한 노력은 얼마나 해 왔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다시는 지난 총회에서와 같은 불미스러운 총장 인준 부결사건이 일어나서는 안 될 것이다.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신학대학을 뒤흔드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총장 인준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런 식의 글을 통하여 인준을 호소해서는 안 된다. 대학은 대학답게 당당해 져야 한다. 교단 직영신학대학이라고 할지라도 대학으로서 총회의 결정에 관하여 진지하고 깊은 학문적 연구를 통하여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신학대학으로서 경건과 학문의 균형을 통하여 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이를 통하여 총대들에게 호소해야 한다. 신학대학이 총회 기관의 일방적인 정책과 지시에 따라서 실행만 한다면 대학의 정체성을 저버리는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동성애를 비롯한 각종 현안에서 교회 현장이 내리는 결정과 정책에 대하여 신학적인 입장에서 토론하고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는 신학대학이 많아져야 오늘 한국 교회의 미래는 밝아질 것이다.

이번 제106회 총회에서 장로회신학대학교 총장서리에 대한 인준이 잘 이루어질 것을 기대한다. 그래서 학교가 안정되게 운영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러나 총회의 일방적인 정책에 순응하고 이행하는 실행기관으로서가 아닌 경건과 학문의 전당으로서 당당하게 총장인준을 호소할 수 있기를 바란다. 대학의 진정한 안정은 총장 인준의 성공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경건과 학문의 균형을 이루는 용감하고 당당한 학교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됨을 잊지 말자. 만일 총장 인준에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신학대학으로서 당당함을 잃지 말고 용감하게 신학의 길을 가자. 미래 교회의 나아갈 방향을 용감하게 제시하며 고난의 길을 함께 걸어가면 좋겠다.

누군가가 신학과 교회의 관계에 관하여 이렇게 말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신학은 교회의 시녀이다. 그러나 여주인의 치맛자락을 들고서 뒤를 졸졸 따라가는 시녀가 아니다. 여주인보다 반 발자국 앞서서 등불을 쳐들고 여주인이 내딛는 발길을 밝혀주는 시녀이다.” 우리는 어떤 모습의 시녀로 살아가는 신학이 진정으로 교회를 위한 신학인가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번 총회에 총장 인준이 순조롭게 이루어져서 장로회신학대학이 경건과 학문의 전당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홍인식 대표(에큐메니안)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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