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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와 종교

기사승인 2021.08.19  16: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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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동,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의 비극의 시작

▲ 미군 철군 후 아프가니스탄 주변국의 고민

1. 들어가며

2021년 8월 16일(현지 시각) 탈레반 조직원들이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을 장악하였습니다.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 중동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인 아프가니스탄을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 정파 탈레반이 재장악하면서 각국의 셈법이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물론 중동 분쟁의 경우, 당사자들의 관계와 내부의 특성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고질적 분쟁’,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간의 종파 갈등’, ‘부족과 종교 그리고 국가가 부딪히는 정체성의 투쟁’, ‘이슬람 내부의 노선 논쟁’ 등 다양한 갈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외세’라는 변수입니다. 중동 지역에 서방 국가들이 개입하여 식민지를 만들거나, 위임통치하거나, 대리 정권을 세우거나 하는 등 서구 열방의 개입은 중동 지역을 안정보다는 중동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방향으로 작동했습니다.

따라서 아프가니스탄 상황을 언론에서 보여주는 몇 장의 사진과 영상으로 우리의 선입견을 품고 이해한다면, 이는 제2의 중동인 한반도의 문제를 읽어내지 못하는 오류를 범할 것입니다. 따라서 아프가니스탄의 숨겨진 세상을 살펴봅시다. 정리를 위해 번호를 매깁니다. 일반화의 오류가 있으니 전체적인 흐름만 파악하고 따로 정보를 수집하거나 찾아보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중동의 전체적인 흐름을 살펴보고 이후 아프가니스탄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2. 석유를 중심으로 본 중동의 역사

① 1908년 페르시아(이란), 1927년 이라크, 1938년 사우디-쿠웨이트서 유전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서방은 전쟁과 관련하여 비행기, 탱크 등 기름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따라서 석유채취 기술을 가진 영국 등 서방 국가들이 석유회사를 설립하고 중동 지역을 위임통치하며 석유를 독점하게 됩니다. 이때 중동 지역의 종교는 이슬람교이고, 서방 국가는 기독교입니다.

② 1960년 9월 14일 이란, 이라크,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산유국들이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만들어 석유 정책을 조정하게 됩니다. 중동의 주권을 되찾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③ 따라서 1974년 1월 1일 제1차 석유파동(오일쇼크), 1978년 10월 제2차 석유파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두 차례에 걸친 석유 공급 부족과 석유 가격 폭등으로 세계 경제가 큰 혼란과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④ 미국과 소련, 이 두 나라의 경쟁인 냉전 시대의 흔적이 한반도를 분단시켰지만, 중동 지역도 분열시켰습니다. 중동의 보수 왕정 국가들과 중동 내 비아랍 3개국(터키, 이스라엘, 이란)이 친미 국가가 되어 대소련 봉쇄망을 작동하였습니다.

⑤ 1979년 미국은 이스라엘-이집트 평화협정(캠프데이비드 협정)을 중재하고, 아랍 연맹의 지도자이자 친소 국가인 이집트를 자유 진영으로 끌어당기는 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1979년 4월 1일 이란에 혁명이 일어나 이란이 이슬람 공화국이 되고 같은 해 12월 호메이니가 최고 지도자가 되어 새로운 신정주의 공화국 헌법을 제정합니다.

⑥ 1979년 12월 27일 소련의 붉은 군대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합니다. 1989년 2월까지 9년 이상 지속된 전쟁입니다. 미국의 냉전 전략인 소련 봉쇄망이 서남아시아 지역에서 붕괴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따라서 미국은 ‘무자헤딘(성전에서 싸우는 전사)’이라 불리는 반군 세력을 도와줍니다. 이때부터, 곧 1979년 이후 10년마다 중동에서는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그 중심에는 늘 미국이 있었습니다. 아무튼 이때 무자헤딘은 기독교 및 이슬람 국가들의 지원을 받으며 소련의 괴뢰정권인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과 소련군 연합군에 맞서 싸웠습니다. 9년 이상 지속된 전쟁 기간 동안 최소 85만 명에서 최대 150만 명에 달하는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고, 수백만 명이 파키스탄과 이란으로 피난해 난민이 되었습니다.

⑦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해체되고, 이어 1991년 12월 26일 소련이 붕괴하면서 냉전이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중동에서 우리가 잘 아는 이름, 곧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등장합니다. 아랍 공화정의 대표를 자임했던 후세인은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도박을 합니다. 곧 1990년 8월 2일 쿠웨이트를 침공합니다. 후세인은 1980년부터 8년간 이란과 전쟁을 겪으면서(이란-이라크 전쟁) 피폐해진 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해 쿠웨이트를 침공한 것입니다. 미소 양 진영의 이념 전쟁이 끝난 상황에서 자신이 아랍의 맹주가 되는 꿈을 꾼 것입니다. 이것은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이 실패했던 ‘아랍 민족주의’를 되살리는 것으로 나아갑니다.

⑧ 미국은 즉각 이라크 격퇴전에 나섰습니다. 이것을 걸프 전쟁(Gulf War)이라고 합니다. 1990년 8월 2일부터 1991년 2월 28일까지 벌어진, 이라크와 다국적군 사이의 전쟁입니다. 아랍이 같은 아랍을 친 사담 후세인의 ‘반칙’을 본 아랍 국가들 역시 미국과 함께 다국적군을 결성하고 이라크를 공격했습니다. ‘사막의 폭풍’ 작전으로 이라크는 초토화되었습니다. 이때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 담론이 나옵니다. 냉전에서 승리, 걸프전에서 승리, 그 누구도 미국의 힘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적이 되면, 마치 컴퓨터상의 사이버 게임 같은 폭탄 공격을 당할 것이라는 공포감이 온 세계에 만연했습니다. 북한이 이때부터 핵 개발에 나서게 되죠? 아무튼 이때부터 이른바 지구상의 초강대국 미국이 주도하는 ‘팍스 아메리카나’의 시대가 꽃을 피웠습니다. 중동의 국가들이 알아서 기기 시작했습니다. 1991년 불구대천의 원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마드리드 국제 평화회의’에서 마주 앉았고, 1994년 이스라엘은 요르단과도 평화협정을 맺었습니다.

⑨ 2001년 9월 11일 팍스 아메리카나의 평화 시기가 허무하게 막을 내립니다. 바로 냉전기 대소련 항전의 전사로 미국이 키워놓았던 이슬람 지하디스트들(주로 무자헤딘)의 역습이 미국을 뒤흔들었던 것입니다. 9·11은 미국에 치명적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우리 안의 적들(invisible enemies within us)’의 공포는 대단했습니다. 당시 “냉전이 엄혹했다고는 하나, 테러보다는 낫다.”라는 말이 돌 정도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냉전기엔 선명한 전선이 있었고 크렘린이라는 명확한 적을 특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테러는 완전히 달랐고 그만큼 공포스러웠습니다.

⑩ 2002년 미국은 이란, 이라크, 북한을 ‘악의 축(Axis of evil)’으로 지정합니다. 2차 세계 대전 전범국가인 ‘유럽의 독일·이탈리아와 동북아의 일본’처럼 ‘중동의 인접 국가 이란·이라크와 동북아시아의 북한’을 비유한 것입니다. 이것을 ‘지정학적 코드화(geopolitical codification)’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세 나라는 수니파 근본주의 테러 집단인 알카에다와 상관이 없습니다. 결국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내세웠지만, 그 속셈은 미국의 초강대국 지위를 곤곤히 하기 위한 도전 세력 손보기였던 것입니다.

⑪ 2010년 12월 17일 튀니지 혁명 이후에 폭발하여 2011년에 절정을 이루었고, 2021년 현재까지도 그 여파가 미치고 있는 아랍권의 민주화 시위인 ‘아랍의 봄’을 아실 것입니다. 물론 혁명의 원인은 빈곤과 식량난이기도 했지만, 정치 지도층의 부패와 아랍권에 퍼진 트위터 등 정보화의 영향입니다. 곧 IT 발전이 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때 아랍권 내부에서 그동안 묻혀 있었던 다양한 목소리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여성들은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여성 지위 향상을 위해 소리쳤고,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을, 소수 민족과 정치적으로 약세인 이슬람 종파들은 처우 개선을 요구하였습니다. 결국 시위의 불길은 문화권이 다른 나라들에도 번져서 중부 아프리카 일대는 물론 지중해를 사이에 둔 서유럽과 심지어는 중국에까지 시위가 번져나갔습니다.

⑫ 아랍을 강타한 시민혁명과 정치 변동은 다시 판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권위주의 독재 정부가 일시에 무너지면서 아랍 전역은 일대 혼란으로 빠져들어 갔습니다. 선거나 정당 등 민주주의의 경험이 거의 없는 아랍권 국가들이 안정적으로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앞서 언급한바, 종파 갈등, 부족과 종교 그리고 국가가 부딪히는 정체성의 투쟁 및 이슬람 내부의 노선 논쟁 등 다양한 갈등으로 인해 혼란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민주주의 정부의 수립 대신 ‘내전’과 ‘테러리즘’, 그리고 ‘난민’으로 상징되는 비극으로 귀결되게 됩니다. 미국은 중동이라는 늪에서 발을 빼고 싶으나, 뺄 수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내몰렸고 바이든은 지금, 미국의 국익을 위해 발을 빼버린 것입니다.

3. 종교를 중심으로 본 아프가니스탄 문제 해결

이러한 중동의 전체적인 간략한 이해를 중심으로, 이번에는 아프가니스탄에 관해서 살펴볼까요? 일단 나라 ‘아프가니스탄’과 수도 ‘카불’을 구분해야 합니다. 실제로 카불 바깥 지역은 탈레반이 실질적으로 통제하고 정부의 역할을 해 오고 있었기 때문에, 아프가니스탄은 탈레반이 계속 통치하고 있었고, 단지 수도인 카불만 친미 정권인 ‘카불 정권’이 들어 서 있었습니다. 시간을 거슬러 20년 전으로 돌아가 봅시다.

① 2001년 9월 11일 9·11 테러 때, 테러범들은 알카에다입니다. 이들은 1979년부터 10년 동안 구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을 때, 미국의 도움으로 무자헤딘과 함께 소련을 막아낸 주역들입니다. 그런데 이 무자헤딘이 나중에 탈레반(파슈토어로 ‘학생’)으로 재편성됩니다. 탈레반은 소련이 물러난 이후, 7년 동안 아프가니스탄 내전에서 승리하여 1996년 집권 세력이 됩니다.

② 알카에다의 수장은 우리가 잘 아는 오사마 빈 라덴입니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에게 9·11의 수괴인 오사마 빈 라덴을 내놓으라고 하니 탈레반 입장에서는 미국의 도움으로 함께 아프가니스탄을 소련으로부터 지킨 혁명과 전쟁의 동반자를 내줄 수 없었습니다.

③ 2001년 10월 미국은 대테러 전쟁을 시작하면서 탈레반을 공격합니다. 그리고 20년 동안 공격했지만, 괴멸에 실패하고 현재 탈레반이 수도 카불을 점령하며 20년 전의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게 되었습니다.

④ 언론에 잘 보도가 되지 않았지만, ‘카불 정권’의 대통령인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은 미국 시민권을 가졌던 미국 사람입니다. 고등학교부터 미국에 가서 콜롬비아 대학에서 문화인류학 박사 학위를 받고, 교수 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미국의 스카우트를 받아서 아프가니스탄 정부 대통령이 됩니다. 물론 대통령이 되면서 시민권을 포기했지만, 미국 사람입니다. 결국 미국의 이익을 대변한 사람이지, 국민의 삶을 돌보고 챙긴 대통령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탈레반이 수도 카불을 함락하기 직전, 빛의 속도로 국외로 도피합니다. 이때 많은 현금을 가지고 탈출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차에 싣고 온 돈을 탈출용 헬기에 실으려고 했는데 모두 들어가지 못해 일부는 활주로에 남겨둬야 했다고 하니 한심합니다.

⑤ 성공회대 이슬람문화 연구소장인 이희수 교수의 말입니다. “구소련 침공부터 지금 아프가니스탄은 40년간 전쟁 상태입니다. 우리가 가만히 집에 앉아서 21세기 관점으로 아프가니스탄을 볼 게 아니라, 당장 물과 빵, 내일이 담보되지 않은 그런 절박한 상황이 40년 동안 이어져 왔기 때문에, 그래서 사실 인권이나 자유나 민주주의 가치보다는 오늘 어떻게 죽지 않고 살아남을까, 하는 처절한 생존의 현상이 심각하기 때문에. 탈레반이 그런 악명 높은 반인권적 행태를 보인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 사람들에게 유일하게 생명을 담보해주고 물과 빵을 공급해 주는 대안 세력이란 말이죠. 탈레반이 유일한 출구입니다. 그 점이 탈레반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고. 그 역할을 미국이 놓쳐버렸던 게 결국 어떤 패배의 원인이 됐던 거죠.”

⑥ 바이든 대통령의 말입니다. “아프간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슬프다, 하지만 내 결정을 전적으로 지지한다. 아프간 전쟁을 끝내기로 한 내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아프간에서 우리의 임무는 ‘테러 대응’이지, ‘국가 건설’이 아니었다. 10년 전 알 카에다 수장 오사마 빈 라덴 제거 등으로 목적을 달성했다. 나는 아프간에서 미국을 철수시킬 좋은 시기라는 것은 결코 없었다는 사실을 20년 만에 어렵게 깨달았다. 그게 우리가 여전히 거기에 있었던 이유였다. 진실은 이것이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졌나? 아프간의 정치 지도자들은 포기하고 나라를 떠나 도망갔다. 아프간군 일부는 싸우려 시도도 하지 않은 채 무너졌다. 내 결정이 비판받을 것을 안다. 그러나 이 결정을 다음 대통령에게 넘겨주기보다는 모든 비난을 내가 떠안겠다. 우리의 국익에 맞지 않는 분쟁에 무기한 남아서 싸우는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

⑦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이희수 교수는 이렇게 전망합니다. “(아프가니스탄이) 이슬람으로 회귀할 것은 분명합니다. 이 정권의 정체성이기 때문에. 그러나 이게 탈레반 정권이 대통령궁을 차지하고 첫 메시지가 ‘여성들에게 부르카 강제 착용을 하지 않겠다. 교육과 취업의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 탈레반에서 나온 첫 메시지이기 때문에, 20년 전의 그 어떤 투쟁하던 탈레반과 이제 책임 있는 집권 세력으로서의 모습을 바꾸겠다는 이미지 변신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게 태생이 바뀌기에는 어렵겠지만, 이제 극단적인 어떤 인권 탄압에 대해서 조금 유화적인 정책을 쓰지 않을까 싶어요. 여기서 이제 결국 탈레반이 집권을 계속해 나가기 위해서는 전후 복구지원과 서방의 경제 원조가 없으면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 하기 때문에. 미국이나 유럽이 탈레반에 대한 전후 복구 지원을 하면서 반드시 여성 인권 개선과 민주화 이행 절차를 연계해서. 국제사회가 연대해서 이거를 압박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고 그냥 돈을 줘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⑧ 여기서 종교의 문제를 잠시 살펴볼까요? 앞서 언급했지만, 중동은 물론, 아프가니스탄에도 당사자들의 관계와 내부의 특성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부족과 종교 그리고 국가가 부딪히는 정체성의 투쟁’, ‘이슬람 내부의 노선 논쟁’ 등 다양한 갈등이 있습니다. 특별히 현재 이슬람교와 탈레반의 샤리아법(Shariah, 지켜야 할 것)의 차이가 중요합니다. 먼저 이희수 교수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코란이라는 게 610년, 1400년 전에 만들어진 거잖아요. 그래서 이게 어떻게 21세기적으로 재해석하는가는 각 국가의 역량인데, 이슬람 국가가 57개국인데 지금 그거는 법을 시행하는 나라는 57개국 중에서 그 당시 사우디아라비아 탈레반 하나 정도였고요. 지금 사우디도 계승해서 안 지키거든요. 그러니까 국민들의 역량이 있고 민주화 의식이 있고 인권의 감수성이 나으면 어떤 정권이라도 ‘아니, 지금 21세기에 그런 독단적인 걸 어떻게 지켜, 말이 안 돼. 그거는 이슬람이 아니야.’라고 하는 국민적 저항을 받게 되죠. 이제 그런 면에서 탈레반이 어떤 국제사회와 공조하고 어떤 투명한 정권을 내세우면 또 여성들의 교육 수준이 높아지면 그거는 존재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왜냐하면 57개 국가 중에서 56개가 바뀌었는데 탈레반이 이슬람이라고 고집하기는 어렵겠죠.”

⑨ 현재 한국의 개신교인들도 구약성경에 나오는 율법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탈레반의 샤리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샤리아법은 이론적으로는 쿠란, 하디스(hadith, 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을 담은 전승록으로 무함마드의 제자들이 무함마드에게 궁금한 점을 묻고 답하는 문답집 형식으로 되어있다), 이즈마(ijma, 합의, 곧 무슬림 학자와 지도자가 동의한 사항), 끼야스(qiyas, 유추, 곧 상급법원에 의해 이미 결정된 새로운 판례)를 기준으로 삼아 만들어졌다고 합니다만, 사실 이것은 이슬람의 예언자인 무함마드가 직접 법전을 편찬한 것이 아니며, 무함마드가 죽은 후 수십 년이 지나 이슬람이 초창기의 모습과 많이 달라진 상태에서 이슬람권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꾸란과 하디스에는 상속법, 이혼 관련 규정, 상거래법 관련한 많은 지침이 상세하게 나와 있기는 하지만, 거대한 이슬람 제국을 운영하면서 이슬람 통치자들은 사산조 페르시아의 행정 체계와 관습법을 많이 도입했으며, 세금 징수 관련한 체제는 비잔틴 제국의 체제를 많이 참조하였습니다. 따라서 샤리아는 기독교로 치면, 성경과 같은 것이 아니라, 중세 가톨릭 통치기의 종교적 규율과 같은 것입니다. 탈레반이 다른 56개 이슬람 나라들과 같이 해석학적 지평을 넓혀 서방과 교류하고 보편적인 인권과 여성의 교육받을 권리를 인정해 준다면 그나마 상황은 좋아지지 않을까요?

⑩ 사실 샤리아는 본질적으로는 무슬림이 당연히 지켜야 하는 ‘도덕적 의무’이지만, 현세적인 공동체의 질서유지를 위하여 실정법으로써 규제할 필요가 있기에 실정법적(實定法的)인 내용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샤리아의 실제적 적용은 환경이나 사회적 이익 변화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석되는 다양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탈레반이 이러한 다양성을 받아들이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물론 이것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참조

나무위키
인남식, ‘미국의, 미국에 의한, 미국 위한 중동판짜기’, 시사IN 623호.
이희수, ‘생지옥된 카불, 왜 시민들은 비행기 바퀴에 매달렸나?’, 김현정의 뉴스쇼 2021.8.17.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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