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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려 다니지 마라

기사승인 2021.06.12  23: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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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가지만이라도(누가복음 10:38-42)

▲ 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Marta e Maria Maddalena」 (1598) ⓒWikimediaCommons
38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 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41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상당히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많은 분이 알고 계실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접대하기 위해 바빴던 마르다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마리아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전해드릴 말씀은 신앙의 자세, 신앙인의 태도라기보다는 일반적인 삶의 자세에 가깝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한 은혜보다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삶을 살아가라고 보여주고 계신지를 생각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제자들과 함께 다니셨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의 제자는 최소 12명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까지 최소 13인분의 식사를 준비해야만 했습니다. 최소 13명을 집에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할 수 있다는 점은 그녀가 어느 정도의 부를 가진 사람이었음을 알게 합니다. 또 그녀의 이름인 ‘마르다(Μάρθα)’는 아람어로 ‘여주인’을 뜻하는데, 이는 그녀가 일정 정도 이상의 지위를 가진 여성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마르다가 어느 정도 부를 가진 인물이었다면, 그녀의 집에는 노예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식탁을 마련하기 위한 준비는 그녀 자신이 아닌 노예들의 몫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이 직접 예수님의 식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도 함께 식탁 준비를 돕게 해달라는 그녀의 요청을 본다면, 그녀가 단순히 노예들에게 지시하는 일만 하고 있지 않았음을 알게 합니다.

언니인 마르다가 이렇게 바쁘게 일하고 있는데, 마리아가 일을 돕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 있자, 마르다는 예수님께 중재를 요청합니다. 마리아도 와서 일을 돕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마르다를 타이르며 말씀하십니다.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다. 마리아는 그 좋은 것을 택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 속에서 예수님께서 ‘그 좋은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오늘의 본문은 일반적으로 섬김보다 말씀 듣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해석되어 왔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불트만이 해석한 바와 같이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르다를 통해 여주인이 직접 식사를 준비하고 대접하며 섬기는 모습이 나타나고, 마리아를 통해서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성도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너무나 이상적인 모습이기 때문에 불트만은 이 이야기가 누가복음 저자의 창작일 수도 있다고 말했지만, 요한복음 12장에 나타난 모습과의 유사성은 이 이야기가 실제 예수님과 제자들이 겪었던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게 합니다. 요한복음 12장에서도 마르다는 일을 하고, 마리아는 예수님 옆에서 발에 향유를 붓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모습이 이상적인 제자의 모습,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면, 지금까지 들어왔던 이 이야기의 해석이 이상하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섬김과 말씀 듣는 일 모두 중요한데, 왜 말씀 듣는 일이 더 좋은 것이라는 결론이 도출되는가의 문제입니다.

헬라어에서 섬김은 명사형으로는 ‘디아코니아(διακονία)’이고 동사형으로는 ‘디아코네오(διακονέω)’입니다. 이 두 단어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지 않습니다. 약간 예외적으로 사도행전 6장에서 사도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섬김(디아코네오)을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않다’라고 말하기는 하지만, 이는 각자의 역할이 있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편이 좋다고 봅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 이들은 ‘섬김(디아코니아)’의 역할을 맡았던 가롯 유다를 대신할 인물인 맛디아를 사도로 세웁니다. 또 자신들은 말씀 전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집중하기 위해 일곱 집사를 새롭게 선출합니다. 이는 초대교회에서 섬김을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최소한 누가복음이 기록된 공동체 안에서는 섬김이 중요하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디아코니아라는 단어뿐만 아니라 누가복음 10장 본문 자체에서도 이런 맥락을 읽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0장은 70인 파송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파송사는 두 가지 이야기가 대비되어 나타납니다. 제자들을 영접한 도시와 영접하지 않은 도시입니다. 이 파송사에서 파송된 제자들의 역할보다 이들을 영접하는 사람의 태도가 더 중요하게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나타난 말씀은 흔히 ‘사마리아인의 비유’라고 불리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누가 참된 이웃인가라는 주제를 담고 있으며 ‘이웃 사랑’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나그네를 영접하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와 이웃 사랑에 관한 강조 뒤에 말씀이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는 점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섬김을 잊지 말아야 하지만, 말씀도 중요하다’라는 이야기라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섬김보다 말씀이 중요하다’라는 식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마르다는 섬김의 일을 하고 있고, 마리아는 말씀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앞선 이유에 따라서 이 둘이 하는 일 중에서 어떤 일이 더 훌륭하다거나 좋은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저는 오늘 본문에서 집중해서 봐야 할 부분, 마르다가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는 점은 40절에 나타난 ‘마음이 분주했다’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이 분주했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페리스파오(περισπάω)’가 쓰였는데, 문자적으로 ‘끌려다니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대접하는 일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힘들어서였는지,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더 좋은 대접을 하기 위해서였는지 마르다의 마음은 분주했습니다. 문자적으로 번역해놓고 본다면, 그녀가 뭔가 억지로 일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섬김과 말씀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놓고 보았을 때, 마르다가 억지로 섬김의 일을 하고 있었다면, 그녀가 바랐던 것은 마리아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마르다가 처음 예수님을 영접한 것도 단지 식사대접을 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유명한 선생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마르다는 좋은 일을 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영접하였고 그들에게 더 좋은 식탁을 대접하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노예들에게 모든 일을 시키고 자신도 마리아와 함께 말씀만 들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녀는 자신이 직접 섬김의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좋은 일을 하는 와중에도 다른 좋은 일에 마음이 향해있었습니다. 섬김의 일을 하면서 말씀도 듣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그녀의 마음을 분주하게 만들었고, 끌려다니듯이 식탁을 준비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르다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가 선택한 말씀 듣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택한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이 택한 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르다는 자신이 하는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일에까지 신경 쓰고 있었기에 자신이 하는 좋은 일을 온전히 행하지 못했습니다.

많은 주석은 마르다가 식탁 준비에 관한 일상적인 고민에 빠져있었다고 말합니다. 그 고민이 그녀를 분주하게 만들었고 그것이 문제였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녀가 예수님을 영접한 이유를 생각해 본다면 그녀의 마음은 예수님의 말씀에 쏠려있었을 것입니다.

또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가 말씀의 일과 섬김의 일을 확실하게 구분하고 있다는 점을 본다면,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수행하려고 할 때 사람의 마음이 분주해질 수밖에 없다는 누가복음의 의미를 도출해내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공동체 안에서 섬김과 말씀 전파의 역할을 확실하게 구분하기 위해 누가복음에 첨가되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여행 경로로 보았을 때, 마르다와 마리아가 살고 있던 베다니 지역은 그 경로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은 그녀들의 지역을 삭제하고 그녀들의 일화만을 말씀 속에 첨가하였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과 섬김이냐 말씀 전파냐 하는 교회 안에서의 일에 한정하여 이 말씀을 생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항상 세상에 나가 살아가고 있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세상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생각했으면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일을 계속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우리에게 여러 역할을 부여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 가지 생각만 하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런 여러 가지 일들은 우리에게 마르다와 마찬가지로 염려와 근심을 가져다줍니다. 이 일을 하면서도 저 일을 고민해야 하고, 저 일이 끝나면 또 다른 일들이 생겨나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염려와 근심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예전에 알쓸신잡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누군가가 유시민 작가에게 어떻게 멀티 플레이가 가능하냐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유시민 작가의 말을 전부 긍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때 했던 대답만큼은 맞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게 오히려 다양한 일을 다 할 수 있게 한다는 대답이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세상에서 고민하고 염려하고 있는 일의 대부분은 지금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들일 것입니다.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는 일, 내가 뭘 한다고 해서 결과가 바뀌지 않을 일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 일들은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고 해서 바뀔게 없는 일이라면 하나님께 맡기는 것 외에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그것을 가지고 고민하고 염려해봤자 우리 스스로만 분주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런 일들은 그냥 하나님께 기도하고 맡겨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지금 여러분 앞에 놓인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한 가지만으로 충분합니다. 우리 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뇌는 엄청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긴 하지만, 현실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번에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마르다는 좋은 일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좋은 것을 마음에 두고 있었기에 염려하였고 근심하였으며 분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분주한 마음에 놓이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며 생활하는 가운데 우리가 할 수 없는 일들은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입니다. 맡겨 놓을 일은 확실히 맡겨 놓으시고 우리가 한 가지씩 앞에 놓인 일들에 최선을 다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일도 잘해나갈 수 있게 도우실 줄 믿습니다. 또 마음에 염려와 근심이 없도록 이끌어 주실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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