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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동맹의 시작은 누구였나

기사승인 2021.05.08  15: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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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중근 의사의 배후 지도자, 항일투사 김치보 연보 ⑴

▲ 러시아 연해주에 위치한 단지동맹 기념비 ⓒ위키피디아

코로나 시대라고 불러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을 듯싶다. 인간사회는 코로나로 셧다운이 반복되며 불확실과 불투명 속에서 유영하고 있는데 계절은 변함없이 순환하며 아름다운 꽃들을 천지에 흩뿌리고 있다. 올해는 꽃들이 보름내지 한 달 정도 일찍 피면서 온 산천이 선경(仙境)이 되었다. 지난 4월 내내 진달래, 산수유, 벚꽃, 아카시아와 이름 모를 꽃들과 유록과 초록빛깔의 나무들이 어우러진 앞산과 뒷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였다.

한송이의 꽃이 아니었다

나의 고향의 기억은 언제나 꽃으로부터 시작된다. 서쪽 마루 끝의 꽃밭은 봄의 매화부터 시작하여 가을 국화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꽃이 피고 지었다. 고향의 대부 둑과 들길 또한 크고 작은 풀꽃이 때를 따라 소리 없이 피었다. 한없이 곱고 평화로운 꽃들을 좋아하여 꽃밭에 자주 머물렀고 잘 여문 꽃씨를 열심히 받았다. 그리고 해마다 봄이 되면 꽃씨를 정성껏 뿌렸다.

누구나 다 화단에서 아름다운 자태를 마음껏 선보이는 장미와 찔레. 백합과 수국, 나리와 수선화, 매화와 국화는 좋아하며 노래를 부르지만 들판에서 수더분하게 자라는 개망초와 기생초, 씀바귀와 쑥부쟁이, 냉이와 개쑥, 우슬초와 명아주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둠벙에서 자라는 부레옥잠, 개구리밥, 마름, 개수련을 바라보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바라보던 보지 않던 간에 꽃들은 다 마을의 일부였으며 비록 이름 없는 꽃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삶에 기쁨과 유익을 주었다. 사람들은 자기의 취향이나 시각, 가치관으로 바라보며 특정한 꽃을 애호하지만 꽃은 인간의 선호와 이해타산을 넘어서 스스로 존재하며 거대한 생태환경을 말없이 쉼 없이 이루어 간다. 자연이 생태환경을 형성하며 보전하고 이어 가는데 있어서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꽃이란 없다. 어느 꽃이나 다 같이 소중하고 아름답다. 꽃들은 타고난 대로 묵묵히 자기 몫을 감당한다.

독립운동계도 마찬가지다. 안중근 의사를 태두로 하여 홍범도, 윤봉길, 이봉창, 강우규, 김상옥, 김원봉, 김구, 안창호, 안무 등 큰 별들이 독립운동 역사 생태계 속에서 찬연히 빛을 발하고 있다. 그 찬연한 빛에 눈이 부셔서 작은 별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눈을 감았다 다시 뜨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수많은 작은 별들이 보인다. 숨겨져서, 가려져서, 묻히어져서, 망가져서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별들이다. 항일투사 김치보도 바로 그런 인물 중의 한 분이시다.

단지동맹 배후를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들

우리는 1909년 연추 하리에서 12명의 독립지사들이 모여 손가락을 단지한 후에 피로 ❰대한독립❱이라고 쓴 혈서를 기억한다. 독립운동사에 찬연히 빛을 발하고 있는 혈서와 단지동맹으로 시작된 ❮단지동의회❯는 지금도 우리의 가슴을 울컥하게 만들어 준다. 거의 모든 한국인들은 그 혈서를 남긴 그 단지 동맹의 주도자를 추호도 의심 없이 안중근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해 볼 때 그가 주도자가 아니라 한 명의 애국 열혈 청년으로 적극 참여한 자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후대의 기록들이 안중근의 주도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그 배후에 있을 수 있는 지도자를 증명하기 쉽지 않다.

우리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있었던 세계를 경악하게 만든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기억하며 자랑스러워한다. 그리고 1910년 3월 26일 31세의 나이로 순국한 그의 뜨거운 나라 사랑과 젊음의 열정과 의기와 당당한 용기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며 감동과 감사의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안중근으로 하여금 이토 히로부미 저격하도록 지원하며 도움을 준 배후의 지도자를 잘 모른다. 사학자들은 많은 연구와 상황을 검토한 끝에 나름대로 그의 배후 지도자로 최재형, 유인석, 대동공보 등을 지목하고 있으나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일 뿐 사실은 아닐 수도 있다.

박환은 그의 저서 ❰시베리아 한인민족운동의 대부 최재형❱에서 안중근 의사의 배후 지도자로 최재형으로 비정하고 있다. 그 이유를 안중근 의사가 그가 이끄는 동의회 발기회에 참여하였고 동의회와 창의회가 연합하여 국내진공작전을 벌일 때 동의회 일원으로서 우영장으로 전투에 참여하였다는 것과 대부분의 항일 운동가들이 국경을 넘어 러시아로 이동한 후에 연해주 대표적인 자산가였던 최재형의 신세를 졌기 때문으로 설명한다.

박환은 최재형이 안중근이 하얼빈의거를 위하여 연추를 출발할 때 자금을 제공하였으며, 이토 히로부미 저격 성공의 소식을 듣고 안중근을 “국가 일등공신”이라고 칭송하였으며, 안중근 의거에 관한 글과 금화 400루블을 ❰대동공보❱사에 보내 그의 의거를 찬양한 것 등과 그의 다섯째 딸 올가가 『나의 아버지 최재형』에서 회상한 글을 근거로 그를 안중근의 배후 지도자였다고 주장한다.(1)

올가는 『나의 아버지 최재형』에서 아래와 같이 회상하고 있다.

“우리가 있던 노보키옙스크에 ‘안 의사’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도 불렸던 안응칠(안중근)이 살았다. 그는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창고 벽에 세 명의 모습을 그려놓고 그들을 향해 총을 쏘는 연습을 했다. 어느 날, 나와 소냐 언니는 마당에서 놀다가 그 관경을 보게 되었다. 결국 안중근은 하얼빈으로 가서 일본군 우두머리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그는 현장에서 즉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2)

그러나 올가의 책은 이토 히로부미 저격사건이 일어난 후 81년째 되는 해에 기록되었으며 1905년 5월생인 그가 사건이 일어날 당시 만 4세 5개월에 불과하였으므로 그의 회상을 역사적인 사실의 기록으로 보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

김삼웅은 1909년 3월에 있었던 안중근의 단지동맹을 “안중근이 친로파로 단정한 이범윤• 최재형 파와 결별 선언”으로 해석한다.(3) 1908년 회령에서 패배하고 돌아온 후, 안중근은 이범윤과 최재형의 갈등과 폭력행사, 최재형의 의병 지원 중단과 냉대를 체험하였다. 그는 심각한 고민 끝에 원로세대들을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인 의병활동을 시작하기 위하여 단지동맹으로 청년 그룹을 규합한 것으로 본다.

또한 그는 안중근의 하얼빈 거사의 배후로 나오는 ❮대동공보❯에 대하여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당시 ❮대동공보❯주필을 맡고 있던 이강이 해방 이후에 쓴 ❮내가 본 안중근 의사❯에서 자신이 안중근을 전보로 블라디보스토크로 나오도록 해서 그가 거사를 도모하도록 지원하였다는 주장에 대하여 그가 전보를 쳐서 안중근을 불러 들였는지를 확인할 길이 없다며 ❮대동공보❯의 배후설에 가세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안중근이 당시 ❮대동공보❯ 기자였던 정재관에게 이토 히로부미 방문 사실을 묻자 정재관이 확인하면서 “이곳에서도 청년배가 모여서 이등 공이 온다니 칼을 갈아서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들 말하고 있었으므로 내가 ‘그런 일이 노국(러시아)에 알려지면 그야말로 큰일이다. 바보 같은 소리 말라’고 제지하였다고 말했다. 안중근은 정재관의 이 같은 발언에 크게 실망하면서도 그러나 내심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하며 이를 미루어 볼 때 ❮대동공보❯가 안중근 의거에 적극 개입했다는 이강의 기록과는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고 하였다.(4)

박민영은 『독립운동의 대부 이상설 평전』, 213쪽에서 안중근의사의 배후가 유인석일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이상설은 하얼빈 의거가 일어난 직후에 간접적으로 연계된 유인석에게 피신을 권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는 이상설의 권유대로 이종섭이라는 지인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고 이상설에게 편지를 보냈다.

대감께서 매우 근심해 주어 지극히 감동될 뿐입니다. 대저 왜놈들이 후작을 보내 정탐하는데 이르게 되면 정세는 혹독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등박문을 죽인 것은 제가 계획한 것은 아니지만 억지로 저로부터 했다고 한다면 혹 될는지요? 대체로 인석이 이곳에 오지 않았으면 이석대(이진룡 의병장) 역시 오지 않았을 것이며, 이석대가 오지 않았으면 안응칠도 형세가 일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혹 저로부터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와 이석대로 하여금 여기 오게 한 것은 이등박문의 소행입니다. 그놈이 죽은 것은 그 자신 때문이지 어찌 다른 사람 때문이겠습니까?(5)

유인석은 자신이 안중근 저격 사건의 배후가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안응칠 역사』에 나오는 김두성을 13도의군의 도총재로 추대된 유인석으로 해석하며 유인석을 안중근의 배후로 보고자 한다. 그러나 유인석이 연해주로 망명한 것은 1908년 7월이며 13도의군의 결성은 1910년 6월에 있었던 일로 이미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뒤이기 때문에 안중근이 13도의군 도총재에게 참모중장의 직책을 받았다는 주장은 무리하다.

같은 책 215쪽에서 안중근이 “의병총대장 김두성(金斗星)의 직속 ‘특파독립대장’으로 거사를 결행하였다”고 하는데 안중근은 1907년 7월에 ❮동의회❯ 의병, 우영장으로 경흥과 회령 전투에 참여한 것이 전부이므로 그를 1910년 6월에 출범한 13도의군과 결부시키는 것은 억지에 가깝다.

(2부로 이어짐)

미주

(미주 1) 박환, 『시베리아한민족운동의 대부 최재형』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2), 113-114.
(미주 2) 최올가·최발렌틴, 『나의 아버지 최재형』 (상상, 2019), 27-28.
(미주 3) 김삼웅, 『안중근 평전』 (시대의 창, 2009), 194.
(미주 4) 김삼웅, 『안중근 평전』, 208~ 210.
(미주 5) 박민영, 『독립운동의 대부 이상설 평전』 (신서원, 2020), 213.

이이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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