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법을 넘어

기사승인 2021.04.11  15:45:50

공유
default_news_ad1

- 선을 행하라(갈라디아서 6:9-10)

ⓒGetty Image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오늘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쓴 편지를 통해 지금 개신교의 모습, 우리의 신앙을 생각해보고 우리가 무엇을 행하며 살아야 할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이 어떤 주장을 하고 있는지는 몇 번 전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자면, 율법을 넘어선 믿음과 실천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갈라디아서가 기록된 배경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는 사도 바울에 의해 형성되었고 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떠난 이후 사도 바울과는 다른 방식의 복음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유입되었습니다. 이들의 정확한 정체는 알 수 없습니다. 갈라디아서에는 이들이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직접 인용된 내용이 없습니다.

다만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에 속한 베드로에 대해 비판했던 일화를 담고 있는 점이나, 율법을 중요시했던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점을 본다면, 갈라디아 교회에 유입된 사람들은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전한 말씀의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이들은 분명 율법 준수를 요구했을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할례의 중요성도 이야기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를 비판하기 때문에 역으로 추측한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갈라디아서를 읽으면서 사도 바울이 이들을 향해 ‘저주받을 사람’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이들을 악한 사람들이라고 여길지도 모릅니다. 이들이 마치 갈라디아 교회를 뒤흔들어서 그들의 신앙을 깨뜨리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여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갈라디아서에서 볼 수 있는 점은 사도 바울을 통해 복음을 처음 접했던 갈라디아 교회 구성원들이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이 전하는 복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열띤 논쟁의 편지를 보낸 이유가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구성원들이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을 왜 받아들였는지 분명히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사도 바울의 이야기 속에서 몇 가지 사실을 추정해 보자면, 갈라디아 교회 내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육체의 자유에 관한 문제가 발생하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 안에서 얻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떠난 이후에 성령 안에서 얻은 자유는 육체적으로도 제한이 없는 자유라는 생각으로 왜곡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구성원들이 잘못된 육체적 자유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이 주장하는 율법 준수는 좋은 해결 방법이 되었을 것입니다. 율법의 준수는 육체의 자유를 철저하게 제한하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9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하려 하느냐”

여기에서 ‘초등학문’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스토이케이아(στοιχεῖα)’인데, 의미를 해석하기 조금 여러분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스 철학으로 보자면, 개역개정 성경 각주에 달려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고대의 우주관’, 또는 ‘운명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4장 3절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유대인을 포함하기 때문에 ‘초등학문’을 그리스 철학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스토이케이아’에는 ‘종교, 철학, 학문의 기초’라는 뜻도 있습니다. 아마 사도 바울은 이 단어를 중의적으로 사용하여 유대인과 헬리인 모두를 향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유대인은 신앙의 기초인 율법에 매여 있었고, 헬라인은 그리스 철학 사상에 매여 있었는데,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로 자유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들은 율법이라는 ‘신앙의 기초’를 추구하며 다시 매임 당한 종의 상태로 되돌아가려 한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보았을 때,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은 지금 볼 수 있는 개신교의 모습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말씀을 오용하고 곡해하여 잘못된 자유를 가르치는 교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얻은 자유는 육체적으로 아무 일이나 해도 되는 자유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내 마음대로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이 왜곡되었음을 깨닫고 갈라디아서를 통해 이를 다시 설명합니다.

왜곡된 자유를 경험한 갈라디아 교회는 이제 율법주의로 돌아갑니다. 육신의 행동을 완전히 규제할 수 있는 방법을 도입한 것입니다. 이들이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방식을 취했다는 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을 비난할 수만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택한 방식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3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할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아래에 몸을 맡긴 사람은 그 율법을 모두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6장 13절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초대 교회의 구성원 중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율법을 준수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들은 바리새인들만큼 율법을 준수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나타난 예루살렘 사도 회의에서 결정된 사안을 보면, 이들은 상당히 느슨한 율법 준수 규정을 내놓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점을 비판합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고 사는 것도 아니면서, 왜 할례를 비롯한 일부 율법 준수를 강조하는지 비판합니다.

이런 모습 역시도 지금의 교회들 속에서 너무나 자주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구약을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상당히 기분 나쁜 일입니다만, 많은 교회에서는 구약에 나타난 율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모두 폐기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때로 어떤 사안, 자신들의 생각에 맞지 않는 사안에 대해서는 구약에 나오는 율법이라면서 금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율법을 모두 지키는 것도 아니면서 자신의 필요에 따라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구약성경의 말씀을 제대로 받아들이는 모습도 아니고, 신약성경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받아들인 것도 아닙니다. 그저 교회 마음대로 성경 말씀을 가져다 쓰고 있을 뿐입니다.

당시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이 악한 사람들이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만 사도 바울은 이들이 가진 율법주의가 허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이를 경계하며 비판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런 사도 바울의 비판을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잘못된 율법주의로 빠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 준수가 무의미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선포는 예수님의 말씀과 마찬가지로 율법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 법은 그 성격상 무언가를 금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잘잘못을 따져 잘못을 드러냅니다. 그렇기에 누군가를 죄인으로 규정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사람들이 서로를 죄인으로 규정하는 일이 아닙니다. 율법의 본질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평화를 이루라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3절에서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고 말하면서 14절에서는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율법의 본질은 사랑에 있습니다.

보통 학자들은 갈라디아서 5-6장이 사도 바울의 권면이라고 말합니다. ‘권면’이라는 표현만 보자면, 갈라디아서의 핵심은 1-4장에 있고, 5-6장은 주변적인 이야기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권면이 갈라디아서의 핵심이라고 봅니다.

설교에서 성경 본문의 말씀을 해석한 후에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를 말씀드리는 것처럼, 사도 바울은 자신의 논증을 끝낸 후에 이를 어떻게 삶에 적용할지를 권면합니다. 그렇기에 갈라디아서 5장 19-23절은 상당히 현실적인 조언이 나타납니다.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를 구분하고 이를 현실적인 용어들로 설명합니다. 우리가 피해야 할 것과 추구해야 할 일을 구분하여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오늘 본문에서 한 마디로 압축하여 말합니다. ‘선을 행함’입니다. ‘선’은 헬라어로 ‘칼로스(καλός)’인데, 번역된 ‘선’이라는 단어와 유사합니다. ‘좋음’, ‘아름다움’, ‘유용함’, ‘도덕적 좋음’ 이런 의미를 모두 담은 단어입니다.

사도 바울의 요구는 어쩌면 율법 준수보다 더 어려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저 하지 말라고 하는 일을 안 하며 사는 삶이 더 편할 수도 있습니다. 선을 행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배려하고 이해하며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율법 준수보다 더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인지 사도 바울은 선을 행하며 낙심할 수 있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음을 언급합니다.

최근에 고등학교 시절에 배웠던 논어 학이편에 나오는 구절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고 있습니다. 선생님들께서 학생들에게 공부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종종 얘기하시는 구절입니다.

學而時習之 不亦說呼(학이시습지 불역열호)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기쁘지 아니한가’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와주니 즐겁지 아니한가’

그 뒤에는 이런 구절이 이어집니다. 人不知而不溫 不亦君子乎(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냄이 없으니 군자가 아니겠는가’

물론 공자는 학문적 성취에 대해 말했으리라 생각합니다. 학문적으로 남들이 인정해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봅니다. 그런데 학문을 넘어 우리 삶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법을 넘어서 착하게 사는 일은 힘들고 어렵습니다. 특히 우리가 세상 사람들이 나의 착함을 알아주길 바라며 선을 행하고 살아간다면, 더욱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말처럼 우리가 낙심하고 포기하게 되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누군가 알아주길 바라면서 행하는 일은 결국 이를 통해 자신의 자랑거리로 삼으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경계하라고 말합니다.

선을 행하며 살아가는 우리 삶의 노력은 분명 하나님께서 알아주십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4장 9절에서 말한대로 우리가 이미 하나님을 알고 있고,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말합니다.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선을 행하며 살아갑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알아주십니다. 그리고 여러분들께서도 이미 경험하셨겠지만, 선하게 살려고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가면 사람들도 알아줍니다. 물론 그걸 이용해서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 사람들도 생기긴 하지만, 사람들도 분명 우리의 삶을 알아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다운 삶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께서 사도 바울이 전한대로 오직 사랑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으로 선을 행하며 살아가게 되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축복한 말씀으로 마치려고 합니다.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