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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낳는 길

기사승인 2021.04.11  15:4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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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기 목사와 함께 하는 <성서와 위로>

ⓒGetty Image
공의(실천)은 생명에 이르고 악을 따르는 자는 사망에 이른다.(잠언 11,19)
(כֵּן־צְדָקָ֥ה לְחַיִּ֑ים וּמְרַדֵּ֖ף רָעָ֣ה לְמוֹתֽוֹ)

본문의 구성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공의에 관한 상반절은 수(數)를 포함하고 있지 않은데, 악에 관한 하반절에는 3인칭 남성 단수 대명사가 들어있습니다. 공의의 결과는 다수에게 생명을 수여하는 것 다시 말해 다수를 살게 하는 것이라면, 악을 추구하는 것은 자신의  죽음을 낳습니다.

물론 악을 행하는 대상은 자신이 아니기에 악을 쫓는 것은 타자의 죽음을 포함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악을 행하는 자의 죽음을 특별히 부각시키는 까닭은 그가 자신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을 리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을 따름으로 초래되는 죽음은 그 자신을 열외시키지 않습니다.

반면에 공의는 공의를 실천하는 자신을 포함하여 타자에게 생명과 살림을 가져다줍니다. 공의(公義)는 공적 차원에서 올바른 일이나 행위를 가리키는 말로 사익과 대비됩니다. 그것은 공익을 결과할 것이나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바른 관계 내지는 그 표현인 질서가 목표입니다. 그러므로 공의가 그것이 실천되는 영역 안의 사람들에게 바른 관계에 의거한 생명과 살림을 수여하리라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것입니다.

공의는 구약성서에서 ‘쩨다카’(צְדָקָה ṣᵉdāqāh)입니다. 이것은 보통 정의로 옮겨지는 ‘미쉬파트’와는 토대가 다릅니다. 이것은 법이 그 기초라면, 저것은 헤세드(인애, 사랑)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쩨데카 곧 공의는 인의(仁義)로 번역해도 좋다고 봅니다. 물론 법 역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의 산물임은 틀림 없습니다. 그럼에도 미쉬파트 곧 정의는 법적인 성격이 강합니다.

하지만 양자는 분리되지 않고 오히려 합하여 하나를 이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의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의 질서에 부합하는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하므로, 그 행동은 사랑의 행동이고 사람들을 살리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행동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예수의 삶은 공의 실천의 연쇄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는 생명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죽음에서 일으키셨습니다. 생명이 되셨습니다. 진리를 따라 그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그 생명에 이를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춰진 생명이기 때문입니다(골 3,3).

사랑의 행동없이 인의/공의가 없고, 인의/공의 없이 생명을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진리가 비춰주는 예수의 길입니다.

그 생명의 길 위에서 행복과 평화를 얻는 오늘이기를. 생명을 낳는 공의의 이날이기를.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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