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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와 은유 사이

기사승인 2020.11.30  16:5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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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간평화교회 <신약따라걷기>

▲ 「Philemon receiving Onesimus」 ⓒWikimediaCommons
이진경 교수님의 이 글은 ‘평화교회연구소’(소장 황인근 목사)가 발행하는 웹진 「주간 평화교회」 50호에 실린 것을 평화교회연구소와 저자의 동의를 얻어 에큐메니안에 게재합니다. 게재를 허락해 주신 평화교회연구소와 이진경 교수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성경은 육(肉)적인 차원의 진리가 아니라 영(靈)적인 차원의 진리를 선포한다. 그러므로 성경이 선포하는 진술들은 은유와 상징의 성격을 지니는 것이지 쓰인 글자 그대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글자 그대로 성경을 받아들이는 것은 올바르지 않을뿐더러 경우에 따라서는 매우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따라서 성경이 선포하는 영적인 진리를 자신을 둘러싼 일상의 삶과 현실 세계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본문이 지니는 문자적 의미를 넘어선 영적 의미를 찾아야 한다. 성경의 말씀들을 실제 사회질서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기술한 이런 식의 생각들은 당면한 현실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성경 속에서 찾고자 하는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지니고 있는 태도일 것이다.

간단하게 예를 들자면 누가 오른 뺨을 치거든 왼 뺨도 돌려대라는 예수의 말씀을 실생활에서 그대로 따라야 할 삶의 법칙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예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 역시 거의 없다. 이런 말들은 영적인 의미를 지닌 은유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이 은유가 의미하는 바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고, 실제의 삶에는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그 이해된 영적 원리를 적용해야 마땅하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런데 때때로 역사 속에서 이 문자와 은유의 시스템에 심대한 균열을 일으키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마하트마 간디나 아씨시의 프란체스코와 같은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기독교와 관련하여 힌두교도인 간디가 남겼다는 말로 전해지는 유명한 말이 있다. “나는 당신들의 그리스도를 좋아한다. 하지만 당신들의 그리스도인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당신들의 그리스도인들은 당신들의 그리스도와 너무나 다르다.” 간디가 정말로 이렇게 말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가 예수의 말을 실제 삶의 본보기로 삼았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간디는 누가 오른 뺨을 치거든 왼 뺨도 돌려대라는 예수의 말씀을 은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이 극단적인 비폭력 원칙을 대중운동의 이념으로까지 확장시켰다. 그리고 은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성경의 말씀을 받아들인 그의 행보는 기독교 세계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간디와 비슷하게 성 프란체스코 역시 가난에 대한 예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다. 중세의 기독교가 산상설교에 나타난 예수의 극단적인 윤리를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영적 은유로 희석하여 해석하고 있었을 때, 프란체스코는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가난의 사도가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믿으라’는 교리에 집중했을 때, 간디와 프란체스코는 ‘나를 따르라’던 예수의 말과 삶에 집중했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의 말씀을 은유로 해석하지 않고 문자 그대로의 지침으로 삼았다.

스스로 발견한 하나님의 진리를 문자 그대로 실천한 사람은 초대교회 역사 속에서도 발견되는데, 그가 바로 바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는 종도 자유인도 없다던 바울의 해방적 선언을 기억하고 있다.(갈 3:28) 그렇다면 당시 처음 교회는 이 말을 진지하게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을까?

예수를 믿는 사람들 중에는 하층민들이 많았다. 거의 모든 종교들이 부동의 신분제를 신의 뜻으로 설파하고 있었을 때 기독교는 신분제 가장 밑바닥에 놓여 있는 노예들에게 신에게는 당신들도 똑같이 존엄한 인간이라고 말해주었던 유일한 종교였다. 그러니 기독교의 복음이 하층민들 사이에서 급속도로 퍼져나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 중에는 노예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특별히 사도행전에서 종종 발견하는 것처럼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 중에는 막대한 재력과 높은 신분을 지닌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당연히 수많은 노예들을 거느리고 있었을 것이다.

자, 그럼 이제 막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부자와 귀족들이 종들을 대동하고 초대교회 예배에 참석하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종들을 거느리고 예배에 참석한 귀족들은 그리스도 안에는 종도 자유인도 없이 하나님 앞에 모두 평등하다는 설교를 듣는다. 그리고 모든 인류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형제자매라는 설교도 듣는다.

이런 설교를 들은 부자와 귀족들은 교회 안에서 역시 그리스도인이 된 자기 종들을 형제와 자매로 불렀을까? 예배시간에는 마지못해 그랬다 해도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그렇게 했을까? 아니, 더 나아가 종도 자유인도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설교를 듣고 그리스도인 주인들은 자기 종들을 모두 해방시켜주었을까? 그리하여 로마제국의 모든 노예들은 주인이 그리스도인이 되어 모두 해방시켜준 그리스도인 주인의 노예들을 한없이 부러워했을까?

사도행전의 초대교회에서 모든 성도들이 재산을 공유했다는 이야기를 현재 그 어떤 교회도 실천하고 있지 않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이 된 모든 주인들이 자기 노예를 형제자매로 간주하여 모두 해방시켜주었다고 상상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천 년 전의 인간이 현재의 인간보다 훨씬 더 선한 존재였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작 그 말을 한 바울 자신은 어땠을까? 바울 역시 그 말을 영적 은유로 생각하고 말했던 것일까?

자유인이자 로마 시민으로 살았던 바울이 갈 3:28과 관련하여 사회에서 노예해방을 부르짖었다는 보도는 성경 그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가 편지에 쓴 해방의 메시지는 사회적 실체에 관한 메시지와는 상관없는 영적 진리에 대한 은유였을까?

신약성경에 속하는 스물일곱 권의 책들을 살펴보면 왜 이런 책이 신앙의 표준인 성경으로까지 인정받았을까 의구심이 드는 책이 몇몇 있다. 거기에 속하는 대표적인 성경이 아마도 빌레몬서일 것이다. 빌레몬서는 단 한 장 분량의 성경으로 논쟁적인 신학 주제들도 없고 신변잡기 같은 편지라는 인상을 주는, 왜 이게 성경에 들어있을까 싶은 그런 성경이다.

그러나 이 짧디 짧은 작은 편지는 바울이 자신이 발견한 하나님의 진리를 은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실천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귀중한 증거로서 중요한 의미와 가치가 있다. 이 편지는 그리스도인 노예와 그리스도인 주인 간의 관계에 있어 바울이 자신의 신앙적 신념을 어떻게 실천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빌레몬서는 주인으로부터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그의 원래 주인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쓴 편지다. 노예가 주인으로부터 도망쳤다는 사실 자체는 이미 두 사람 사이의 많은 부분을 말해준다. 결코 좋은 관계였을 리 없는 주인에게 바울은 자신의 편지를 들려 보낸다.

편지를 가져간 노예 오네시모는 분노에 찬 주인 빌레몬에게 처참하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바울은 편지를 통해 빌레몬에게 당부, 아니 명령을 한다. 오네시모는 내 ‘심장’(12절)이니 그를 ‘형제’(16절)로 받으라는 것이다. 나아가 자신에게 구원의 복음이라는 엄청난 빚을 지고 있는 빌레몬에게 오네시모의 빚은 내 앞으로 계산하라고 소리친다.(18-19절) 그리고 정말 네가 내 말대로 했는지 찾아가서 확인할 것이라는 협박도 서슴지 않는다.(22절) 편지는 호의를 구하는 것처럼 들리나 실상은 완곡하고도 확고한 명령이다.

빌레몬서는 종과 자유인이 하나님 앞에 하나라는 복음의 선포를 바울이 실제 삶 속에서 정말로 그렇게 믿고 실천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귀중한 증거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빌레몬서는 갈 3:28에 대한 증빙서류인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깨달았던 보편주의의 이상은 은유나 상징이 아닌 실제였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의 노예를 자신과 동등한 존엄한 인간으로, 형제로 대해야 마땅하다. 그리스도는 그를 위해서도 죽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인 종의 주인에게 바울은 한 치의 주저함과 두려움 없이 그렇게 말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만나게 되는 문자와 은유의 관계는 여전히 쉽게 풀 수 없는 문제임이 분명하다. 모든 것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고, 그렇다고 모든 것을 은유로 받아들일 수도 없다. 어떤 시간과 장소에서는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지만,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라면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경우도 있다.

치명적인 삶의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라면 문자와 은유 사이의 문제는 더욱 복잡하고 어렵게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라도 분명한 사실 하나는 있다.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주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은유로 희석시키려는 내 모습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

이진경 교수(협성대) peacechurch2014@gmail.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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