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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묵은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정답

기사승인 2020.11.23  15:5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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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하소서 듣겠나이다!(시 119:101-105, 살전 2:13, 마 26:36-46)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그리고 위로가 이 시간 우리와 함께 하길 축원합니다. 한주간 평안하셨는지요? 이번 주간에는 Thanksgiving Day가 있습니다. 미국 최대 명절이지요.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들이 함께 모여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정을 나누고 음식을 나누며 한가족임을 확인하는 그런 의미 있는 시간이지요. 그러나, 잘 알다시피 올해는 그러지 못합니다. 세계를 위협하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함께 모이는 것을 금하고, 여러 가지 통제가 가해지고 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시간이 지나 올해 2020년을 떠올려보면 얼마나 황망하고 안타까운 한 해인지 모를 것입니다.

사람들의 정이라는 것도 모여야 생기는 법인데 참 안타깝습니다. 대학 신입생들이 얼마나 대학생이 되는 걸 기다렸겠습니까? 그러나, 모든 수업이 온라인으로 대체되어 친구들을 만날 수 없고, 커피를 마신다든지, 여행을 함께 한다랄지 교제를 나눌 수 없는 그런 삭막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대면 수업을 진행했던 학교들도 코로나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니까 다시 온라인으로 바꾸는 등 어려움이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학교는 학교대로, 기업은 기업대로 생존을 위해 지금 머리를 싸매고 있습니다. 야간 통행 금지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행정 명령으로 인해 우리들의 고민은 더욱 깊어 갑니다. 행정 명령을 하는 주정부나 연방정부는 그리고 작게 보면 교육청들이 중요한 선택과 결정을 내릴 때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할까요? 아니 개인으로 그 폭을 좁혀볼 때 어떤 기준으로 선택하고 결정해야 할까요?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지 모릅니다. “이게 나에게 얼마나 유익할까?” 물론 여러 가지를 따져 판단하겠지만 현대인들은 많은 경우에 경제적 기준으로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또한, 그 기준의 출발점이 “나”일 때가 참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준의 출발점이 “나”만을 위한 경우 그 종말이 불행할 때가 많습니다. 배우자도, 부모도, 아이들도 다 팽개치고 “나” 하나만을 생각한다면 나의 선택과 결정이 고스란히 내 주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 것이고, 결국 나도 불행해질 게 뻔합니다. 따라서, 그 선택의 기준을 확대시켜 나 혼자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으로 확대하게 됩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가족이라는 출발점도 충분하지 않을 때가 많다는 것이지요.

또한 어떤 게 유익한 건지 확실할까요? 지금 당장은 유익해 보여도 장기적으로 볼 때 유익하지 않은 것도 많습니다. 잠깐은 좋지요. 그러나, 그게 오래 지속되면 해를 끼치는 것도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많다는 사실입니다. 입에 쓴 게 좋다는 말이 있지요? 당장은 달아 보이지만 건강에 해로운 게 얼마나 많습니까? 따라서, 어떤 중요한 일을 결정하고 선택할 때 “이게 나에게 얼마나 유익한가?” 하는 식으로 묻는 것은 그리 좋은 질문도 아니고, 믿을 만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 신앙인들은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이게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일까?” 질문의 초점이 나에게서 “하나님”에게로 이동합니다. 모든 것을 내 유익의 관점으로 보던 것이 이제 하나님의 관점으로 옮겨간 것이지요. 하나님의 관점으로 판단하면,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판단하면 나와 다른 사람들이 모두 행복해집니다. 나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유익하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전체 그림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전체를 볼 수 있어야 바른 판단,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데 이는 하나님 외에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나에게 얼마나 유익한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지요. 예상했겠지만 문제는 그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뭘까,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유익한 게 뭘까 판단하는 것 못지않게 하나님의 뜻을 판단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지요? 하나님을 우리가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매순간마다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받았다고 말하지만 그게 흔한 일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신앙의 선배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고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또한 수많은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한결같이 말하고 권면하는 채널이 있습니다. 너무나 우리가 잘 알고 있기에 식상하기까지 합니다. 무엇일까요? 바로 기도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통로입니다. 귀에 들리는 것처럼 직접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귀에 들리는 음성이며 또렷하기에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물론 흔하게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게 진짜냐 사실이냐, 하면서 결코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말하면 ‘그거 봐라, 그거 옛날 이야기야, 성경에 있는 거 다 신화잖아, 상징이잖아’ 이렇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아니면, ‘맞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걸 보니 맞는 말입니다’ 하고 금방 수긍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심할 게 있습니다. 어설픈 신학책 몇 권 읽고 성경의 모든 이야기를 일반화해서 그저 이야기 보따리 취급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그야말로 선무당이 되기 쉽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을 문자 그대로 읽는 경우도 위험하지만 모든 것을 단순한 비유나 상징으로 취급하는 것 또한 위험합니다. 성경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현대 과학의 세례를 흠뻑 받은 현대인들이 잊고 있는 게 있습니다. 그건 바로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던 “영성”이 둔해졌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영이 너무 흐려져서 하나님을 깨닫지 못합니다. 내가 하나님과 깊은 관계에 들어가 본 적이 없으니까 남들도 다 그런 줄 압니다. 지금 내 앞에서 뭔가 일어나지 않으니까 과거에도 분명 일어나지 않았다 판단하는 것이지요.

제 아들이 태권도를 배운 지 이제 4-5년이 되었습니다. 주니어 블랙 벨트입니다. 이제 제법 발차기도 잘하고 품새도 볼 만합니다. 그러나, 태권도 4-5단 고수들이 볼 때 애송이겠지요. 지금은 코로나 사태를 맞아 zoom으로 온라인 수업을 합니다. 많이 제약이 있고 불편하지만 그래도 계속 수업을 이어갈 수 있는 것만 해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보통 이렇게 어려운 상황이 생기면 태권도 학원을 끊는다 표현하지요. 그만 둘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결정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태권도 관장님의 이력 때문입니다. 이 관장님은 품새가 전문입니다. 태권도에는 종목이 크게 겨루기와 품새가 있는데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에는 겨루기만 있습니다. 그래서 1년마다 열리는 품새 올림픽은 대중의 관심에서 좀 멉니다. 최근 한국 텔레비전에 품새 올림픽 금메달 출신 트로트 가수가 인기가 많습니다. 발차기, 돌려차기를 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재미있는 장면을 연출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가수가 품새 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따서 유명한 건데, 아이의 태권도장 관장님은 품새 올림픽에 나가 3년 연속 금메달을 딴 사람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대단한 사람입니까? 1년에 한두 번 이 관장님의 발차기를 볼 수 있는데, 그 광경을 보면 입이 떡 벌어집니다. ‘인간이 이렇게 할 수 있구나’ 자기 키보다 2배 이상 높은 곳에 놓여 있는 송판을 깨는 걸 보면 마치 새 같습니다.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을 직접 눈으로 보는 미국인들이 그러니 90도로 인사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흔히 내 기준으로 세상을 봅니다. 내가 볼 수 없으면, 내가 느낄 수 없으면, 내가 만질 수 없으면 없다고 판단합니다. 내가 깊은 기도의 세계로 들어가 본 적이 없으니, 하나님의 말씀이 꿀송이보다 달다고 하는 게 무슨 말인지 가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내가 들어본 적이 없으니 그런 게 없다고 판단해 버립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입니다. 그곳에 살던 유대교인들이 가만 있을 리가 없습니다. 바울의 전도를 방해합니다. 도시에 가득했던 미신 추종자들이 저항합니다. 전도가 너무나 어렵고 복음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너무나 낙담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환상 중에 하나님께서 나타나 사도 바울에게 말씀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행18:9-10)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겁니다. 이 음성을 듣고 그는 힘을 내어 1년 6개월동안 그곳에 거하며 복음을 계속 전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판단하는 중요한 또 하나의 채널은 “분별”입니다. 물론 이는 기도 가운데 일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열심히 하지만 어떻습니까? 그 음성을 듣지 못할 때가 훨씬 많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뜻인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가 우리는 기도로 묻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중에 마음에 가득했던 불안이 사라지고 평화가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형용할 수 없는 기쁨으로 마음이 편해질 때가 있습니다. 한편 여전히 그 불안감이 나를 덮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피하고 싶었고, 그게 과연 하나님의 뜻입니까 물었을 때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하신 후 그러나, 주님은 성부이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셨고 십자가를 지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 마음에 참 평화가 임한 것입니다. 잠을 자던 제자들을 깨우시며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마26:45-46)

기도와 더불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채널 또 하나는 무엇일까요? 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기록된 말씀”인 성경과 “선포되는 말씀”인 말씀 나눔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시는 성경은 단순한 기록이 아닙니다. 과거의 사실들을 기록한 죽어 있는 문자의 나열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은 살아서 우리를 뒤흔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히4:12)

저는 예배 가운데 말씀을 나눌 때 그 말씀의 첫 청취자가 저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해석하고 나누는 과정이 목회자를 통해 일어나지만 그 기록된 말씀은 설교를 통해 “선포된 말씀”, “들리는 말씀”으로 변화됩니다. 그런 까닭에 설교자나 듣는 회중이나 모두가 겸손하게 설교에 경청해야 하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살2:13)

우리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신 게 아니라 소수의 믿는 자에게만 나타나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똑같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지만 그들 모두가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고, 모두가 예수의 음성을 들은 게 아닙니다. 오직 믿는 자에게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죽은 문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말씀, 역사하는 말씀으로 드러나는 것은 오직 믿는 자 가운데입니다.

최근 한국 방송을 보다가 깨달은 장면이 있었습니다.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인 박찬호와 한일 월드컵 주역이었던 이영표가 서로 야구와 축구를 놓고 자랑하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새롭게 깨달았던 장면은 박찬호의 야구 설명이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야구를 생각할 때 공격수와 수비수를 보며 즐기는데 투수의 비중이 얼마나 큰지 모른다”,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아는 상식이지요. 그런데, “투수의 비중이 경기의 70-80퍼센트다. 경기는 투수의 공격에 타자가 어떻게 수비하느냐에 달려 있는 거다”, 이렇게 설명하는 겁니다. 우리는 보통 타자가 치는 공격에 수비수가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나는 거 같은데, 박찬호는 투수가 공격하고, 타자가 그 공에 대해 수비하는 거다, 설명하는 것이지요.

그 순간, ‘바로 이거다’ 깨달았습니다. 뭐 다른 분들은 이미 알고 있는 상식일 수 있지만, 저는 그 순간 직업병처럼 투수와 타자의 관계를 생각했습니다. 투수는 하나님입니다. 투수의 공은 하나님의 말씀이지요. 타자석에 내가 들어섭니다. 투수가 공을 던집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이제 그 말씀을 내가 어떻게 듣고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따라 홈런이 될 수도 있고, 안타가 되기도 합니다. 아니 파울이 되기도 하고 삼진 아웃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타자석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허무하게 삼진 아웃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려는 노력이 전혀 없을 때도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려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하지만 그 노력이 하루 아침에 이뤄지지 않습니다. 타자석에 서서 간신히 땅볼 하나 치기도 하지만 어느새 투수의 마음을 읽게 되면 멋진 안타를 칠 날도 올 것입니다. 아이가 어린 걸 감안해 쉽게 칠 수 있도록 아빠 투수가 배려하는 날도 있습니다. 그런 날이면 아이가 쉽게 안타를 치겠지요. 그러나, 우리 인생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자주 말씀합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하는 진실한 열망입니다. 또한 그 뜻을 알게 된 후 그 뜻을 따를 용기입니다. 순종하기 위해선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또한 기도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거짓이 숨겨지겠습니까? 하지만, 나의 일방적 소원만을 아뢴다면 용기가 필요없지요. 그러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듣기 원한다면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순종할 마음이 없다면 기도할 필요가 없지요. 오히려 정직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지 않습니다.”

혹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게 두렵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어 이제 내 욕심을 내려 놓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될까봐 두려우십니까? 좋은 징조입니다. 신앙의 선진들이 다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의 일을 하겠습니다, 나선 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헤아렸던 사람, 오히려 그 뜻을 알고 자신의 욕심과 하나님의 뜻 사이에서 끊임없이 씨름했던 사람들이 바로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나의 연약함을 잘 알기에 너무나 낙담하고 절망하지만, 그럴 때라야 주님의 은혜가 컸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겸손히 구할 때 그들, 믿음의 선진들에게 주님은 용기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모두다 하나님의 뜻 앞에 약한 존재입니다. 메이저리거 투수의 100마일 강속구를 어떻게 쳐내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시는 주님, 우리의 어리석음을 잘 아시는 주님이시기에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말씀으로 오시는 주님의 한없는 사랑과 은총에 감사함으로 응답하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민기욱 목사(미국 트리니티 한인장로교회) minics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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