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배제된 신체들은 서로 연대해야 한다!

기사승인 2020.08.25  16:45:50

공유
default_news_ad1

- 주디스 버틀러의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를 읽고

1. 수행성 개념

역시 주디스 버틀러입니다. 여성주의, 퀴어 연구에서 이제는 정치철학과 윤리학을 넘나들며 ‘인간으로서의 삶의 가능성’과 ‘공동체의 윤리적 관계성’을 모색합니다. 개인적으로 현재 한국연구재단에서 3년 지원을 받은 저의 연구도 버틀러의 고민과 동일한 맥락인데, 앞으로 많은 참조가 될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바로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집회의 수행성 이론을 위한 노트』 (창비, 2020) 책 이야기입니다.

버틀러는 이 책에서 자신의 담론 전체를 대표하는 개념이 된 ‘수행성(performativity)’ 개념에 기초하여 불안정 상태에 처한 사람들의 집회가 가진 ‘수행적 힘’과 그 전망에 대해 분석하고 있습니다. 차이를 가로 질러 ‘우리’를 만드는 연대의 정치를 고민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버틀러의 수행성 개념을 살펴볼까요? 버틀러는 “어떤 행위를 직접 몸으로 수행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기도 하고 우리의 사고방식을 바꾸기도 한다.”라고 봅니다.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성부의 수행성을 통한 성자의 성육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성자 예수의 십자가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신의 수행성’이라고 볼 수 있겠죠?

2. 신체

아무튼 이러한 몸으로 실천하는 수행성 개념에서 책 제목의 ‘신체’가 등장합니다. 곧 수행성을 통해 몸으로 느끼는 신체의 변화가 정신의 변화를 이끈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버틀러는 성, 인종, 계급을 비롯한 여러 영역에서 ‘불안정성(Precarity)’에 노출된 사회적 약자들의 집회와 시위에 관해 살펴봅니다. 우리식으로 분석하면 이렇습니다. 

“왜 동성애자들이 구석에 쳐 박혀 있지, 퀴어 문화 축제를 해서 시끄럽게 하냐?”, “전광훈 같은 극우 개신교도들과 태극기 부대들은 왜 광장에서 저렇게 악을 쓰며 모일까?”, 최근에는 의사협회의 총파업과 민주노총의 집회도 계급의 측면에서 보면 역설적이지만 동일한 맥락입니다.

이렇게 집회와 시위에 자신의 몸으로 직접 참여해 함께 공동의 행동을 수행할 때, 그 행위 자체가 수행에 참여한 사람들의 의식을 형성하고 동일한 정체성을 구성해준다는 것이 바로 수행성 개념에 담긴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그 수행을 위해 거리로 나온다는 것이 바로 제목에 나온 ‘거리의 정치’입니다.

3. 정체성 정치

그러나 버틀러는 여기서 더 나갑니다. 이러한 수행성 개념을 통한 거리의 정치, 혹은 ‘정체성 정치’는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정체성 정치’는 특정한 정체성을 공유한 사람들이 배타적으로 동맹을 결성해 자신들의 권리를 키우는 정치 방식입니다. 따라서 태극기 부대나 민주노총이나 서로 양극단이지만, 동일한 정체성 정치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체성 정치로는 연대의 정치를 구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연대의 정치는 자유의 문제와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는 연대의 열매입니다. 그 산물입니다. 버틀러의 말입니다. “자유란 나에게서 혹은 너에게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이에서 오는 것이자, 우리가 자유를 함께 행사하는 그 순간에 우리가 만드는 유대로부터 오는 것이다.”

이러한 정체성 정치의 잘못된 예를 버틀러는 이스라엘 정부가 텔아비브를 ‘동성애 친화 도시’로 내세우고 선전하는 것에서 찾습니다. 이스라엘 최대 도시가 동성애자에게 우호적인 곳임을 자랑함으로써 동성애 문제에 개방적인 서구사회의 지지를 얻고, 팔레스타인 주민들에 대한 참혹한 탄압을 물타기 하려는 책략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체성 정치는 이스라엘의 이런 추악한 캠페인에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페미니스트들이 ‘여성 정체성’을 최우선으로 내세우면서 트랜스젠더를 배제하는 것도 잘못된 정체성 정치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 또한 소수자를 배제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버틀러는 최근 한국의 모 여대의 트랜스젠더 학생 입학 관련 논쟁과 소위  ‘트랜스젠더를 배제하는 급진적 여성주의(TERF, 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t)’의 트랜스젠더 혐오 발언과 배제에 대해 이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젠더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그런 토대 위에서는 차별, 괴롭힘, 폭력에의 노출이 강화될 게 분명한 사람들인 트랜스젠더를 여성이 아니라고 배제하는 ‘페미니스트’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여성’을 ‘차별, 인종주의, 그리고 배제의 기제’로서 오용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버틀러에 의하면, 페미니즘 운동은 ‘제대로 된 여자’라는 관념에 반대하기 위해 존재해온 것입니다. 따라서 페미니즘이 젠더에 기초한 모든 형태의 차별에 반대하는 것임을 생각해보면, 트랜스젠더를 배제하는 페미니즘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버틀러의 말입니다.

“정체성 정치와 인정 투쟁에 함몰된 채, 자기 집단에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 다른 집단에 대한 차별에 눈감는 데 쓰이는 것에 반대해야 한다.”

현재 미투 운동의 여성 정체성 정치가 차이만을 강조하고, 우리를 만드는 연대의 정치를 상실하여 지지를 못 받는 것도 동일한 맥락입니다. 왜냐하면 ‘살아 있다는 사실’은 ‘다른 존재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호의존성이 바로 윤리의 문제입니다. 버틀러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선택하지 않았고 선택할 수도 없는 사람들과 어쩔 수 없이 이 지상에서 공거(cohabitation)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라면, 우리의 생명은 이미 타자들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다.”

4. 벌거벗은 신체들이 연대하는 세상

따라서 지금의 윤리적 책무는 이러한 타자들의 생명과 다양성, 그리고 복수성을 보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나아가 젠더, 인종, 계급, 세대 등 각자가 놓인 위치 및 상황에 따라 더 불안정하고 더 취약한 집단에 속한 이들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문제는 집단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인데, 지배 권력은 이것을 개인의 무능이나 무책임으로 돌리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구조적으로 누군가를 딛고 올라가서 뒤쳐진 자들을 혐오하거나, 혹은 뒤쳐진 이들 스스로가 자신을 혐오하도록 강요하고 있습니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모두가 다 태산을 오를 만큼 체력적으로 경제적으로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버틀러는 이렇게 경쟁에 뒤쳐진 사람들의 사회 구조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들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권력에 저항하라고 합니다. 버틀러의 말을 들어 볼까요?

“삶의 불안정성을 차별화해 배치하고 삶 자체를 차별적으로 가치 매기기 위해 일련의 척도를 설정하는 권력에 저항하라!”

버틀러는 그런 저항을 2010년대 전 세계에서 일어난 집회와 시위에서 읽어내고 있습니다. ‘이집트 타흐리르 광장 시위’ ‘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 운동’ ‘점령하라 운동들’ ‘터키 게지 공원의 집회’ 등을 비롯해 트랜스젠더 성노동자들, 미등록 이주 노동자들, 거주지를 요구하는 난민들 등 장소와 시간을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서 출현하는 시위를 포괄하면서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침묵을 포착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버틀러에게 있어서 이들이 처한 ‘취약성’, ‘불안정성’은 극복하고 거부해야 하는 부정적인 상황이 아닙니다. 연대하는 모든 이들의 의무라고 합니다. 버틀러의 말을 들어볼까요? “우리의 잠재적 평등과 살만한(livable) 삶의 조건을 함께 만들어야 한다는 우리 서로 간 의무의 한 토대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연대하는 신체들입니다. 이러한 신체들의 거리의 정치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거리와 광장에서 배제된 모든 이들이 함께 만나는 것입니다. 기독교식으로 말하자면,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겠죠? 혹은 희년이 선포된 해의 모습일 것입니다.

이렇게 다른 세상은 이렇게 ‘벌거벗은 신체’(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를 약간 비틀어서)들이 거리에서 연대하는 세상입니다. 왜냐하면 배제된 자들이 각자 고립된 상태로 싸워서는 각개격파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버틀러는 이렇게 말합니다. “신체들은 서로 연대해야 한다.”

문제는 말입니다. 모든 신체들을 인정해야 할까요?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의사들의 신체와 혹은 감염병을 확산시키기 위해 거리의 정치를 펼치는 극우 개신교 단체의 신체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기가 막힌 것은 이들이 진보의 논리로 자신들의 유익을 삼는다는 데 있습니다. 전광훈씨가 본회퍼 목사를 인용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판단 기준은 이렇습니다. 지금까지 정치의 주체 지위에서 배제되어 왔던 사람들의 신체에 주목해야 합니다. 앞서 언급한바, 성과 인종, 계급과 세대의 차원에서 자신들의 목소리가 배제되었던 사람들의 신체에 관심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 범주를 잘 보여주었습니다. 누가복음 4장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그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 4:181-9)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