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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시선이 머무는 곳

기사승인 2020.08.09  00:4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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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이 없는 세대여(마가복음 9:14-20)

▲ De Agostini, Biblioteca Ambrosiana ⓒGetty Images
14 이에 그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더라 15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매우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 16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그들과 변론하느냐 17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18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19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20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그가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더라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으신 치유 이적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너무 유명한 말씀이고, 해석도 워낙 틀이 갖춰진 본문이라 예전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느껴져서 오늘 이 말씀을 함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우선 오늘 본문에 앞선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앞에 나온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따로 산에 올라가신 후에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셨고, 엘리야 모세와 함께 말씀을 나누셨다는 변화산 사건입니다.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과 세 제자는 산 아래 있던 제자들이 서기관들과 변론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15절에서 온 무리가 예수님을 보고 놀랐다고 말하는데, 학자들은 산 위에서 영광스럽게 변화되신 모습 그대로 오셨기 때문에 놀란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쩌면 이는 이야기를 부드럽게 연결하기 위한 마가복음의 장치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가지고 변론하고 있냐고 물으시자, 어떤 남자가 예수님 앞에 나와 대답합니다. 자기 아들이 귀신에 들렸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이를 치유해주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무엇을 변론하느냐?

이 남자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상당히 무섭게 누군가를 꾸짖으십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예전에 저도 그랬지만, 일반적으로 이 꾸짖음의 대상을 예수님의 제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를 고치지 못한 제자들의 실패가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어떤 세대’라고 칭하신 적이 없습니다. 헬라어를 살펴볼 필요도 없이, ‘세대’라고 말씀하실 때는 당시 사회의 전반적인 잘못을 이야기하실 경우입니다. 이 단어만 봐도 예수님께서 꾸짖고 있는 대상이 제자들에 한정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꾸짖고 계신 것일까요? 아마도 그 자리에 있던 제자들과 서기관, 논쟁에 참여하고 있었던 모든 이들을 꾸짖으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이 무엇을 가지고 논쟁을 했는지, 논쟁의 주제가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과 서기관들의 다른 논쟁을 통해 유추해 볼 수는 있습니다.

복음서 전체에 나타난 서기관들과의 논쟁을 살펴보려고 했는데, 그 경우에 어떤 복음서는 바리새인고 논쟁을 했는데, 어떤 복음서에는 서기관도 함께 있는 경우가 있고, 어떤 경우는 서로 다른 사람들과 논쟁을 벌이실 때도 나타납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에 한정해서 예수님과 서기관들의 논쟁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를 나열해보면 이렇습니다. 중풍병자를 고치시며 죄 사함을 선포하신 일이 가능한가?(막2:6-7), 죄인이나 세리들과 함께 밥 먹는 일은 괜찮은가?(막2:16), 귀신 축출은 바알세불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닌가?(막3:22), 전통에 따라 손을 씻고 밥을 먹어야 하지 않는가?(막7:1-2) 이런 다투는 분위기의 논쟁 외에 한 가지 논쟁이 더 나타나는데, 이는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과 답변입니다(막12:28-34).

마가복음에 나타난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어울리신 점을 맘에 들어하지 않았습니다. 또 그들에게 죄가 없다고 선포하시는 일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에 따라 죄인과 의인을 구분해야 하며 죄인은 접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일전에 아모스 말씀을 전해드리면서, 예수님을 향해 바알세불이라고 말한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에 대해 무조건 악하다고 규정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들은 죄인이라고 규정된 존재, 특히 심각한 병에 걸려 치유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돌이킬 수 없는 죄인으로 판단한 듯합니다.

만약 이들이 기적적으로 치유된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지금 교회에서 선포되는 말씀도 마찬가지이지만, 자신들의 규정에 따라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내리셔서 치유하신다고 전해왔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방법 이외에 치유되는 일은 있을 수 있을 수 없으며,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이는 악마의 소행이라고 여겼습니다.

서기관들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뭔가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면, 이런 죄에 관한 이야기, 죄인을 치유하고 그의 죄를 없게 만드는 행위에 관한 지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이런 논쟁 속에서 제자들은 아이의 귀신을 내쫓지 못했습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예수님의 꾸짖음이 제자들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 않다면, 이는 아이를 치유하지 못했음에 대한 꾸짖음이 아닙니다. 바르지 못한 믿음에 대한 꾸짖음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 있지 않음을 꾸짖으신 것입니다.

앞선 이야기를 정리해서 상황을 생각해보자면, 제자들은 서기관들과 이 아이를 고칠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보다는 고쳐도 되는가 안 되는가를 가지고 다퉜을 것으로 보입니다. 제자들이 아이를 고치려 하면, 서기관들은 이를 악마의 힘으로 고치는 것이라는 지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분노는 여기에서 기인합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아이가 염려되어 예수님께서 오시자마자 그 앞에 나가 치유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제자들이 아이를 못 고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 하실 수 있는 만큼만이라도 고쳐달라고 부탁합니다. 예수님께서 믿음 없음을 꾸짖으시자, 자신에게 믿음을 달라고 소리칩니다.

이런 아이의 아버지와 아이를 앞에 두고,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올바름에 따라 자신의 주장만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떤 주장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들도 흐름에 따라 서기관들과의 논쟁에 빠져 있었습니다. 무엇이 우선인지, 무엇을 해야하는지 잊은 채 그들은 논쟁만 하고 있었습니다.

토론은 중요합니다. 서로 이야기를 하며 뜻을 맞춰가는 일은 사회적 동물인 사람에게 있어서 중요한 행위입니다. 하지만 논쟁의 때와 장소가 있습니다. 아이의 치유를 바라며 서 있는 아버지를 두고, 귀신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아이를 두고 논쟁을 벌이고 있는 서기관과 제자들은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들과 예수님의 차이는 단 하나입니다. 그곳에 서 있는, 고통받는 사람을 보고 있는가 보지 않는가의 차이입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께서 아이의 아버지를 향해 던지신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이 말씀은 믿음이 없음을 꾸짖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이가 완전히 치유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라는 위로의 말씀이며, 자신이 그렇게 해주시겠다는 희망의 말씀입니다.

지금 시대는 무엇을 보는가?

오늘 본문을 마태복음은 ‘겨자씨 만한 믿음’의 이야기로 끝맺습니다. 예수님께서 아이의 아버지와 나눈 대화에 집중하여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믿음’이 이 사건의 중심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은 귀신축출 이적 사건으로만 이 말씀을 다룹니다.

마가복음의 경우에는 조금 복잡합니다. 분명 마가복음이 기록한 오늘 본문이 본래 사건에 더 가까운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이 사건의 핵심이 무엇인지 뭔가 혼란스러워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처음에는 서기관들과의 논쟁이 주제였다가, 믿음이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중심이 됩니다. 조금 큰 맥락에서 이 사건은 치유 이적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기도 외에는 귀신을 쫓지 못한다는 말씀으로 끝마치게 됩니다.

학자들은 마가복음이 이 사건은 혼란스럽게 적어놨기에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불필요한 말들을 삭제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은 평소 우리가 읽어온 바로 그 예수님의 모습이기에 전혀 혼란을 느끼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불필요한 논쟁이 아니라 고통받는 사람을 바라보셨고, 그들이 바라는 치유를 주셨습니다. 고통받는 사람을 외면하며 자신들의 주장이 옳다고 논쟁하고 있는 이들을 향해서는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꾸짖으셨습니다.

지금 시대는 어떻습니까? 성경에 나타난 서기관들은 지금의 정치인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들은 권력을 가진 이들이고 정치를 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고통받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만이 올바르다는 점이 그들의 관심사였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치유 행위마저도 방해합니다. 귀신 들린 아이를 치유하려 했던 예수님의 제자들을 방해하며 율법으로 논쟁을 벌입니다. 제자들을 혼동스럽게 만들며, 그들이 치유를 행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지금 정치인들은 뭔가 다릅니까? 연일 뉴스에 나오는 정치인들은 그저 자신들의 정의만이 참된 정의라고 외칩니다. 자신들의 생각에 반대한다면 모두 악한 존재라고 연일 외칩니다. 그들이 외치는 정의가 어떤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논리를 갖춘 사상이라면 이해라도 하겠지만, 대부분의 정치인이 하는 이야기는 그저 혼란을 가중시키기 위한 말밖에는 없습니다.

최근 부동산 대책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지금 정치인들이 하는 이야기를 자신의 정치색을 벗고 냉정하게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솔직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입니다. 집값을 내려야 한다는 건지, 올려야 한다는 건지, 전세를 장려하자는 건지, 월세를 장려하자는 건지, 말의 전개가 애매해지면서 논지가 없어지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야당 정치인의 경우에는 분명한 지점이 하나 있습니다. ‘뭐가 문제이건, 전부 지금 정부 잘못이다.’

저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우리가 본질을 바로 보았으면 합니다. 부동산 문제는 너무 다양한 문제를 복합적으로 담고 있기에 하나의 본질이 무엇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만, 결국 누군가 이득을 취하기 위해 집값을 올려가면 누군가 고통을 받는 사람이 있다는 점이 본질입니다. 그리고 그 이득을 취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적고, 고통을 받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 본질입니다.

세상은 오늘 말씀에 나타난 서기관들처럼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산만하게 만듭니다. 그래야 자신들의 주장만이 올바른 것이 되기에 계속 혼란을 줍니다. 본질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그런 세상에 현혹되지 마시고, 오직 귀신들린 아이만을 바라보셨던 예수님처럼 진정한 문제를 바라보시고, 이를 고치고 회복시켜가는 그리스도인 되시길 바랍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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