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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들의 정치신학

기사승인 2020.08.03  18: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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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생의 정치신학: 캐서린 켈러의 ‘(성공)보다 나은 실패’(a failing better)를 위한 정치신학 (3)

▲ 우리 시대에 ‘평범한 일반시민’을 일컫는 서민(the commons)은 “예외적”인 존재가 되어가며, 이를 비판하면서 흑인비판이론은 스스로를 “서민 이하의 존재” 즉 ‘언더커먼스’(the undercommons)로 표현하기도 한다. ⓒGetty Image
본고는 「한국기독교신학논총」, 116집(2020): 327-358에 게재된 논문을 저자의 허락을 받아 본지에 연재하는 것임을 일러둔다. - 편집자 주

프랑코 베라르디는 “우리는 미래 이후의 시간을 살고 있다”(1)고 선포한다.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의 등장 이래 미래는 ‘성장’과 ‘팽창’이라는 단어와 결부되었다. 즉 “무한한 성장과 생산 기반의 끝없는 팽창”이 미래라는 단어 속에 내포되었고, 그래서 “해마다 소비되는 사물의 양이 증가하기만 한다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환상적 믿음이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2)

금융시장의 붕괴에 따른 노동정치의 실패

그런데 만약 경제의 무한한 성장이 지속될 수 없다면, 그리고 “지구상의 물리적 자원들이 바닥날 수 있고 인지노동자들의 신경에너지 역시 바닥날 수 있”(미주 3)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1972년 로마클럽의 『성장의 한계』는 이미 성장과 팽창이 무한히 계속될 수 없다는 것을 경고한바 있다. 만일 성창과 팽창이 가능하지 않는 미래가 도래한다면, 무한한 성장과 팽창을 통해 미래를 기대하던 세대에게 “미래없는 상황”(4)을 가져다 줄 것이다.

“미래주의적 꿈과 자본주의적 기만이 끝장”난 시대 신자유주의는 산업자본주의로부터 금융자본주의로 진화하여, “환경, 사회적 생산, 집단적 지식을 금융독재에 종속”(5)시켰다. 그런데 금융 자본주의의 자본축적 방식은 “과거 사회의 문명에서 생산된 것을 끊임없이 파괴하는데 기반을 둔다.”(6) 그리고 2008년 9월 터진 금융 위기는 이 금융자본주의의 몰락을 초래했으며, 이제 금융권의 잘못을 사회적 지출에 사용해야 할 돈을 끌어다 메꾸고 있다.

이 때문에 교육 및 보건재정 삭감이 이어지고, 사회적으로 불안정성과 취약성이 높아지며,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분노와 좌절과 우울감이 무지와 폭력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불안정성은 “더 이상 주변적이고 임시적인 특징이 아니라, 디지털화되고 복잡하게 뒤얽힌 재조합적 생산영역에서 노동관계의 일반적 형태가” 되었다.(7) 그리고 노동자들은 “노동관계, 월급, 노동일의 길이에 관한 확정적 규칙을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은” “프레카리아트”(precariot)가 되었다.(8) 그런데 이 불안정성은 “노동시장의 불안정한 성격”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프레카리아트를 구성하는 인지노동의 불안정성으로부터 유래하는 “기술적 문화적 조건”이다.(9) 미래가 사라진 불안정한 시대는 깊은 좌절감과 분노의 폭발로 그 증상들을 드러내는 중이다.

기후를 파괴시키는 자본주의적 정치의 실패

오늘날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기후변화는 근대 이후 정치경제발전의 총체적 결과이며 증상이다. 기후변화라는 총체적 위기의 증상 이면에는 지구행성 위에 모든 삶의 운명을 불안정성(precarity)으로 몰아간 자본주의적 성장구조가 놓여있고, 이제 우리는 자본주의가 남겨놓은 “페허들” 위에서 새로운 삶의 구조를 모색해야 하는 시대를 살아간다.(10) 이제 ‘기후변화’를 넘어 “기후비상사태”라는 경고가 쏟아져도,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정치적 노력들은 도리어 퇴행하고 있다.(11)

현재의 정치와 경제의 제도는 이 문제에 대처할 수 없고 무능하다는 것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이 무능한 체제에 대한 신학적 비판으로서 캐서린 켈러는 “지구정치신학”(political theology of the earth)를 주창한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등장 이후 ‘포스트민주주의’ 시대로 진입한 지금, 정치는 더 이상 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보다는 자본의 자유를 실현하고 있고, 평등은 기호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모두가 평등한 디지털 노예로의 하향평준화가 실현되고 있는 차에 우리는 기후변화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정치적 행동주의를 조직해 낼 수 있을까?

켈러는 그 가능성이 실현되려면, 종교적인 것의 귀환 혹은 정치신학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우리 시대 보수와 진보는 같은 동전의 반대면으로서, 칼 슈미트의 정치신학에 기인하는 적/아군의 이분법을 공유하는 하나의 정치적 매트릭스이며, 경쟁적 동반자일 뿐이다. 기후변화와 지구온난화라는 위기를 이 슈미트적 정치 프레임에 놓고 판단하면, 우리는 극우의 정치놀이에 참여하는 꼴에 불과하다.(12)

보수/진보의 이분법을 넘어서, 이미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식의 이분법을 넘어선 기호자본주의의 매트릭스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프레카리아트를 위한 대안들을 모색하려면 우리에게는 ‘제3의 대안’이 필요하고, 이 대안은 신학으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다. 시민권자들의 투표권을 근거로 구성된 대의민주주의 체제는 프레카리아트나 밑바닥 인생들을 위한 정치를 외면하고, 표가 되는 정치 즉 중산층의 정치로 전락한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근대의 자유(liberty) 개념은 본래 신적 권력에 대립하는 개념으로서 인본주의와 실존주의와 같은 사유들을 통해 제시되었지만, 근대의 이념들이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실현된 오늘날 역설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자유하지 않은지를 점점 더”(13) 깨닫고 있을 뿐이다. 바로 여기에 신학의 정치적 귀환의 필요성이 놓여있다.

정치적인 것의 귀환

‘정치신학의 귀환’은 결코 제도권 정치나 정치학의 분석대상으로서의 정치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은 기존 제도권 정치에 대한 대안정치로서 ‘정치적 모임’의 귀환을 가리킬 수 있으며, 켈러에 따르면, ‘정치적인 것’은 곧 시민화로서 문명(civillization)의 도시적 단위들, 다시 말해 “집단중심의 이기적 유대감을 넘어선 사람들의 결집 혹은 함께-모임”을 가리킨다.(14) 켈러는 기독교 운동의 핵심은 바로 이 정치적인 것의 운동이었다고 지적한다. 다신론이 우세하고 황제의 중앙집권적 통치가 기존 정치를 구조화하고 있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공동체 중심의 기독교운동은 처음부터 “이미 그리고 언제나 정치적”일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15)

세속의 다신교적 문화와 황제를 추앙하는 제국주의적 세속질서의 도식 속에서 예배 공동체 중심의 새로운 삶을 주창하는 기독교 신학은 “결코 단순히 (기존) 정치(politics)와의 동일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종교의 이론적 실천으로서 “이미 언제나 정치적” 운동의 잠재력을 담지하고 있었다.(16) 이것이 오늘 기후변화와 이데올로기적 정치질서의 붕괴의 한복판에서 정치신학의 복귀가 가리키는 ‘정치’인 것이다. 이 정치신학은 정치신학이라는 용어를 주창한 칼 슈미트(Karl Schmitt)의 ‘친구와 적’의 이분법적 편가리기로서의 정치를 단연코 거절한다.(17)

오늘날 우리 정치의 무능의 근본에는 이 슈미트적 정치 이분법이 초래한 무능력한 귀결들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민자들과 난민들과 성소수자들 그리고 유색인종들과 여성들을 ‘우리가 아닌 그들’의 자리에 즉 적의 자리에 놓고 권위주의와 파시즘적 정치적 행동주의를 촉구하는 오늘날 극우의 모습은 슈미트적 정치가 지향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정확히 지적한다: 공멸.

작금의 기후변화와 생태적 상황은 우리에게 정치적 결단과 행동의 시간을 재촉한다. 그 결단과 행동의 촉구는 근대 이래 혹은 인간 문명 속에서 지속적으로 이어져왔던 “예외주의”(exceptionalism)에 반대하는 결단을 의미한다: 남성중심적 예외주의, 인간중심적 예외주의, 백인중심적 예외주의, 서구중심적 예외주의 등. 모든 예외주의는 집단이나 부류를 둘로 갈라, 한쪽편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다른 쪽을 적으로 삼아 결집하는 슈미트적 정치신학이다. 이를 프란시스 교황은 “정치적 마니교”(political Manicheanism)라 부르며 경고했다.(18)

정치적인 것의 귀환으로서 정치신학은 이러한 남성중심주의, 인간중심주의, 백인중심주의, 서구중심주의 등을 넘어서, “예외없는 상호의존성의 창조적 취약성들”(19)을 정치적 대안으로 삼는 신학을 가리킨다. 그것은 곧 이주민, 기후난민, 전쟁난민, 비정규직 등을 포함한 ‘보통사람 이하의 존재들’(the undercommons)를 대변하는 정치신학을 의미할 것이다. 즉 기존의 정치구조에서 대변되지 않는 이들을 보호하고 품기위해 정치적으로 행동하는 신학 말이다.

그것은 곧 거대권력에 반대하는 저항운동으로서의 정치신학을 넘어서서, “정치적인 것”을 “공익을 위한 결집”(gathering for the common good)으로 정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20) ‘정치적인 것’으로서 이 결집은 곧 정치적 ‘투쟁’(struggle)을 동반한다. 신학적으로 이 결집은 곧 ‘그때’ 즉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결집 혹은 그때를 위한 집단적 투쟁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이 투쟁은 초대교회의 정치적인 것의 운동처럼, 그 무언가에 대한 증오와 혐오에 기반하여 그것을 반대하는 투쟁이 아니라 “공중(公衆, public)을 위한 그리고 공중과 함께하는”(21) 투쟁으로의 방향전환을 말한다. 이는 투쟁을 “증오”(enmity)가 아닌 과정으로 보는 시각의 전환을 요구한다.(22) 샹탈 무페(Chantal Mouffe)는 이를 “민주적 아고니즘”(democratic agonism)(23)으로 정의한다.

아고니즘은 “정치적 입장들의 활발한 충돌과 이해관계들의 열린 갈등”(24)을 요청한다. 이는 상대방을 적으로 규정하고, 적에 대한 증오를 불러 일으켜, 내부의 ‘우리’를 규합하는 방식의 적대관계(antagonism)에 반대하는 대안적 정치투쟁 개념이다. 상대방을 민주적으로 의견을 경합하는 경쟁자로 존중하는 아고니즘의 민주적 윤리는 “투쟁의 중단”이나 “일치된 행동”을 의미하지 않으며(25), 또한 괴로운 시간들을 망각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정치적 변혁은 혁명이나 전복으로 한 번에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길고 장구한 인고의 시간을 요구한다는 것 그리고/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인식하는 운동이다.

서민들의 정치신학으로의 귀환

지금까지 정치적 투쟁은 ‘정치적인 것’ 아래로 평범한 사람들(the commons)을 밀어넣고, 정치적인 것의 희미한 욕구나 기여 혹은 그를 위한 배경적 자원으로 간주해 왔다. 그러나 우리가 보통사람들의 수준에 정치적인 것을 맞춘다면, 서민(the commons)은 아주 강한 의미로 “정치적 집단”의 “급진적 사회성”을 가리킨다.(26) 예를 들어, 기후변화 시대의 서민이란 단지 가난한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이외의 존재들 모두와 그의 기반인 ‘지구’를 포함한다.

즉 “인간의 신분 아래로 영원히 미끄러져 내려가는 사람들, 모든 사람들 아래로 당연하게 밀려 내려가는 인간이외의 존재들” 그래서 그 누구도 대변해 주지 않는 존재 모두를 ‘서민’(commons) 개념은 포함한다. 역설적으로 우리 시대에 ‘평범한 일반시민’을 일컫는 서민(the commons)은 “예외적”인 존재가 되어가며, 이를 비판하면서 흑인비판이론은 스스로를 “서민 이하의 존재” 즉 ‘언더커먼스’(the undercommons)로 표현하기도 한다.(27) 이 ‘서민이하의 존재’로 동일시되는 ‘우리’는 기존의 제도권 정치에서 “분열 혹은 분열에 동의하는 이”로 기표되는데, 제도권 정당의 정치적 타협에 언제나 분열과 불안정성을 창출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창출하는 분열과 불안정성은 기존 제도권 정치가 지키고 보호하는 영토 즉 돈과 권력으로 울타리 쳐진 땅을 정치적으로 에워싸 “불안정성을 창출하”는데, 이것이 바로 언더커먼스 혹은 불안정성의 희망이다.(28) 비인간 혹은 인간이하의 존재로 내몰린 이들이 스스로의 목소리를 정치적으로 담아내고 결집하면서 창출하는 불안정성은 기존 제도권 정치에는 불안과 분열이 되지만, 제도권 바깥으로 밀려나는 존재들에게는 변혁의 희망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더커먼스’(the undercommons, 서민이하의 존재)는 “정치에 대한 희망을 잃었지만, 그러나 저항과 자기-조직을 계속하는 공중(公衆, public)”(29)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이들과 더불어 함께 하는 투쟁은 결코 ‘적대관계’(antagonism)를 배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치(politics)에 대한 “일반적 적대관계”(general antagonism)(30)을 주장하면서, 제도의 그릇됨을 고발하고, 정치를 부정확하고 거짓되게 만드는 것들을 지적하면서, 서로에 의지해 빚지며 운동하는 무리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적관계는 정치적으로 의견이 다른 자를 분노와 증오로 혐오하며 마녀사냥하지 않으며, 지구행성 위의 모든 존재는 얽힘(entanglement)의 관계 속에 근본적으로 서로에게 빚진 자라는 것을 철저히 되새긴다.

미주

(미주 1) 프랑코 베라르디 ‘비포’(Franco Berardi ‘Bifo’)/강서진 역, 『미래 이후』(After the Future) (서울: 난장, 2013), 12.
(미주 2) 앞의 책, 10.
(미주 3) 앞의 책, 10.
(미주 4) 앞의 책, 10.
(미주 5) 앞의 책, 11.
(미주 6) 앞의 책, 11.
(미주 7) 앞의 책, 139.
(미주 8) 앞의 책, 139.
(미주 9) 앞의 책, 140.
(미주 10) Anna Lowenhaupt Tsing, The Mushroom at the End of the World: On the Possibility of Life in Capitalist Ruins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5), 3.
(미주 11) Kylan Mandel, “과학자들이 기후 비상사태를 선언하며 ‘인류의 막대한 고통’을 경고했다”, <허핑턴포스트>, 2019년11월7일자. 접속: 2019년11월9일.
(미주 12) Clayton Crockett, Radical Political Theology: Religion and Politics After Liberalism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1), 3.
(미주 13) Ibid., 3.
(미주 14) Catherine Keller, Political Theology of the Earth: Our Planetary Emergency and the Struggle for a New Public,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8, 7.
(미주 15) Ibid., 7.
(미주 16) Ibid., 8.
(미주 17) Ibid., 23.
(미주 18) Ibid., 21.
(미주 19) Ibid., 16.
(미주 20) Ibid., 22.
(미주 21) Ibid., 24.
(미주 22) Ibid., 26.
(미주 23) 샹탈 무페의 번역자들은 이를 “경합주의”로 번역하기도 하는데, 이는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설득력을 위해 경합하는 과정을 ‘투쟁의 과정’으로 보기 때문이다(Ibid., 26). 하지만 켈러는 이 ‘아고니즘’(agnoism)이란 단어 속에 ‘고뇌’(agony)의 함의가 담지되어 있음을 통찰한다. ‘경합’이라고 번역했을 때, 아고니즘은 공정한 경쟁을 촉구하는 이미지가 강조되지만, 이 단어 속에 agony의 함의가 있음을 읽어낼 때에는 다른 의견들과 단순히 경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고뇌에 찬 투쟁과 갈등의 과정임을 함축한다. 이런 맥락에서 ‘경합주의’라는 번역은 다소 단어의 본래 함의에서 조금 벗어난다. 이하에서 agnoism의 번역용례인 ‘경합주의’를 따라가기 보다는 음역하여 ‘아고니즘’으로 표기한다.
(미주 24) Ibid., 26.
(미주 25) Ibid., 29.
(미주 26) Ibid., 30.
(미주 27) Ibid., 30.
(미주 28) Ibid., 30.
(미주 29) Ibid., 31.
(미주 30) Ibid., 31.

박일준 객원교수(감리교신학대학)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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