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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죽을 각오로 나를 따르라

기사승인 2020.07.12  16:5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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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죄를 지고(누가복음 9:23-24)

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오늘 본문의 평행본문인 마태복음 16장의 말씀과 마가복음 8장의 말씀은 예전에 나눴던 적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8장의 말씀을 통해서 오늘 말씀을 직접적인 의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정치범이 될 각오로 실제 십자가에 달린다는 마음으로 세상에 나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8장 37절에 나타난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는 말씀은 앞선 ‘목숨을 버릴 각오’와 충돌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영’을 놓치지 말라는 의미임을 전해드렸습니다.

마태복음 16장은 초대 교부 중 한 명인 폴리캅의 순교 이야기와 함께 전해드렸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화목제, 사람과 사람의 화해를 목적으로 한 제사였고,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화목제물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교회의 시대가 되며, 이스라엘 바깥의 이방으로 복음이 전파되면서 십자가 사건은 화해를 넘어 ‘죄를 사하여 주신 사건’으로 확대됩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속죄제이며 속건제가 됩니다.

오늘은 누가복음의 본문을 통해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서들과 어떤 차이를 갖고 있으며, 이 말씀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본문의 의미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를 물어보시면서 시작됩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의 입에서 들었던 인물들을 열거합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 요한, 어떤 사람은 엘리야, 어떤 사람은 옛 선지자 중 한 명이라고 말했다고 예수님께 전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어보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때 베드로는 우리가 잘 아는 대답을 합니다. 오늘 누가복음의 본문에는 조금 더 짧게 나옵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실 일과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예고하십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이 뒤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말리는 장면과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꾸짖으시는 장면이 나타나지만, 누가복음에는 이 장면이 삭제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를 꾸짖으신 다음에 하신 말씀이 오늘의 말씀입니다. 23절의 말씀은 예수님의 뒤를 따를 조건이 나타납니다. 조건은 세 가지입니다. 헬라어 카이(και)로 연결된 세 문장입니다. ‘자신을 부인하라’, ‘자기 십자가를 지라’, ‘나를 따라오라’.

우리는 자신을 부인한다는 말에 대해서 흔히 고린도후서 5장 17절의 말씀을 연결시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에 과거의 우리, 죄악에 찬 우리를 버린다는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다음으로 십자가를 진다는 말씀은 우리 삶에서 당하는 고통을 연결시킵니다. 이 역시도 사도 바울의 말과 연결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의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우리가 짧게 ‘감당할 수 있는 어려움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본문입니다. 사람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어려움이 있고, 이를 십자가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공관복음서에서 말하고 있는 의미는 우리 삶에서 당하는 고통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시대에 박해를 받던 교회가 품고 있던 말씀이기 때문에 큰 틀에서 본다면, ‘삶의 고통’과 연결시킬 수는 있겠지만, 본래 의미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는 삶을 뜻합니다. 실제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십자가를 은유적인 표현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뒤이어 나오는 말씀,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을 본다면, 십자가는 은유적이 아니라 직설적 표현입니다.

누가복음의 차이점

오늘 본문 23절의 말씀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글자 하나 다르지 않고 똑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그 문장을 조금 고쳐서 기록합니다. 말씀의 구전 과정에서 잘못 전달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제가 보았을 때는 의도적인 수정입니다.

먼저 ‘자신을 부인한다’고 말할 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아파르네오마이(απαρνεομαι)’를 사용합니다. 이 단어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였다’고 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어떤 존재에 대한 부정’을 뜻합니다. 마가복음은 이 단어에서 ‘파(πα)’를 뺍니다. ‘아르네오마이(αρνεομαι)’를 사용합니다. 이 단어는 ‘무엇을 아니라고 말할’ 때 사용됩니다. 일반적인 부정을 뜻할 때 사용되며 여러 곳에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사실 별 것 아닌 듯 보이기도 하고, 바꿨다고 해서 크게 의미가 달라 보이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뒤에 이어지는 문장을 보면 그 의도를 조금은 알 수 있을 듯 합니다. 누가복음은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에 우리말로 한 단어, 헬라어로 두 단어를 첨가합니다. ‘날마다’, ‘카쓰 헤메란(καθʾ ἡμεραν)’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은 일회성 사건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나면 목숨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일회성 사건에 ‘날마다’가 붙어서 반복적 사건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즉 일회성인 실제 죽음이 아니라 매일 죽음을 각오한 삶으로 의미가 변화됩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말씀이 ‘자기 존재는 없다고 생각하고 십자가에 달릴 각오로 나를 따르라’였다면, 누가복음은 ‘자기 (생각)을 부정하고 매일 죽을 각오로 나를 따르라’가 됩니다. 의미가 조금 유순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생각하는 의미

누가복음이 예수님의 본래 말씀을 훼손시켰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상황에 맞춰 예수님의 말씀을 고민하며 의미를 확장시켰다고 생각합니다. 화목제물이 속죄제물로 확장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성경의 표면적 의미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말씀을 읽어나가며 이 시대에 맞는 의미를 찾아가야 한다고도 생각합니다. 민주화 투쟁을 하던 때에는 ‘정치범이 되어 사형받을 각오를 하자’는 말씀의 의미가 옳았을 수 있지만, 지금 시대에 우리가 목숨을 버리며 하나님 나라를 이룩하자고 말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 예수님께서 전하신 말씀을 지금 이 시대에도 살아 숨쉬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분명 말씀을 시대에 맞게 해석해야만 합니다. 다만 그 해석이 전체적인 성경의 의미와 교회가 전해왔던 말씀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아야 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다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자신을 부인하는 일은 과거의 나를 잊어버리라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빗대어 죄인일 수밖에 없는 자신의 모습을 이제는 부인하라는 말씀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이는 더 이상 죄인으로 살지 않겠다는 다짐이며 고백입니다. 작심삼일의 다짐이 아니라 평생을 지켜야 할 다짐입니다.

여기에서 죄인이라는 말은 추상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나는 죄가 없지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죄인이 되었다는 원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분명 세상을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죄를 범합니다. 실제로 죄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여전히 누군가를 미워하기도 하고,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합니다. 누군가를 향해 물리적, 정신적 폭력을 행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여전히 죄인입니다.

다음으로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고 고백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 죄의 대가이며 십자가의 무게는 우리 죄의 무게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 역시도 죄의 대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의 죄를 대신 지셨지만 우리는 ‘자신의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죄를 짊어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구원받아 죄가 사라졌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범한 죄는 우리가 짊어지고 가야만 하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 우리의 죄를 맡겨버린다는 생각은 이기적이고 나태한 신앙입니다. 우리 죄를 우리가 짊어질 때에 우리는 철저한 반성을 할 수 있으며 다시 그 죄를 범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따라서 날마다 십자가를 지는 삶은 날마다 회개하는 삶입니다.

그 뒤에야 우리는 예수님을 따를 자격이 생깁니다. 죄인인 자신의 모습을 먼저 바라보고, 자신이 얼마나 죄로 가득한 삶을 살아왔는지 깨닫고 그 삶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 후에 날마다 자신의 죄를 짊어지고 그 죄를 반성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자신의 죄는 분명 자신이 짊어져야 합니다. 지금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안타까운 일들을 바라보며 오늘 말씀을 전합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적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죄는 자신이 짊어지고 자신이 회개할 때, 그제야 용서받을 자격이 생기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자기 자신은 그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그가 남긴 죄는 이 땅에 남아 더 큰 악을 만들어가게 될 뿐입니다. 그래서 최근 몇 년 사이에 본 몇몇 죽음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내 죄는 예수님께서 모두 씻으셨다는 오만한 생각을 품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맙시다. 우리가 세상에서 범하는 죄의 짐, 죄의 십자가는 우리가 져야 합니다. 우리가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또 더 이상 이런 안타까운 죽음을 보는 일이 없도록 기도하시어 땅에 떨어진 죄가 가득한 세상이 아니라 회개와 구원만이 넘치는 세상이 되도록 이끄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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