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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넝쿨을 아끼듯!(욘 3:10-4:11; 행 28:11-31; 막 16:15-20)

기사승인 2020.07.10  17: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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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령강림후 여섯째 주일(7월12일)

1. 믿는 자들에게 표적이 따르리니

지난 몇 주 동안 계속해서 세 본문 말씀은 성령 강림 이후, 곧 ‘After 성령’ 시대에 복음을 천하 만민에게 전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세 본문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복음서 말씀을 볼까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눅 16:15)

최근 몇 주 말씀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성령의 생명의 복음을, 구약 말씀에서는 선지자 요나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원수가 되는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에 전하라고 하며, 사도행전 말씀은 사도 바울도 당시 제국의 심장인 로마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구원이 원수들과 이방인들에게까지 전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는 자들도 있고, 또 믿지 않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복음을 믿는 자들에게는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죠?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눅 16:16-18)

성령의 생명의 역사와 해방과 치유의 역사를 다섯 가지로 표현하고 있죠? 사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행적에 집중합니다. 특히 기적 이야기를 중요하게 다룹니다. 마가복음에 나오는 기적 이야기는 모두 열여덟 가지인데, 이 기적들도 마찬가지지만, 오늘 성령의 역사 다섯 가지도 ‘새 방언을 말한다’는 것을 빼고는 한마디로 정리하면, ‘병 고치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팔레스틴은 날이 덥고 비가 많이 오지 않아서 먼지가 많습니다. 먼지가 많으면 무슨 병이 생깁니까? 눈병이죠? 그래서 성경에는 맹인이 많습니다. 그리고 물이 부족하니, 목욕을 자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또 무슨 병이 생깁니까? 피부병이죠? 날이 더운데 밖에 있으면 어떻습니까? 정신이 오락가락합니다. 그래서 정신을 잃어버리게 되는데, 성경에서는 이런 사람을 귀신들린 사람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병든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대부분 가난하고 돈이 없어서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쉬지도 못하고 치료도 못 받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민중들! 가난하고 소외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교회가 세워지는 곳에 지역 주민들이 구원을 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교인들이 가는 곳에 가난과 굶주림, 질병과 고통, 소외로 외로움에 빠진 사람들이 해방과 구원을 경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구원 받은 사람들이 하는 말이 바로 새 방언입니다. 이제까지 가난 때문에, 질병 때문에 고통 때문에 불평과 불만의 말(방언)을 했다면, 이제 새로운 말, 곧 위로의 말, 희망의 말, 배려의 말, 생명의 말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방언(γλῶσσα)이라는 말의 뜻은 ‘혀’입니다. 내 혀를 가지고 내가 이제까지는 남을 비난하고 혐오하고 미워하는 말을 했지만, 이제 성령을 받아 새 방언, 곧 새 혀로는 사랑의 말을, 배려의 말을, 위로의 말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2.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에게

이러한 성령의 역사는 이스라엘의 원수인 니느웨 사람들에게도 임합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이 그렇죠? 요나의 멸망선포를 들은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자, 하나님께서 심판을 돌이키신 말씀이죠? 말씀을 볼까요?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욘 3:10)

그런데 앗시리아 제국이 조국 이스라엘을 침략한 일로, 깊은 상처가 있는 이스라엘 선지자 요나의 입장에서는, 원수 같은 니느웨에 은혜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이 못마땅합니다. 요나의 불평을 들어 볼까요?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욘 4:1-3)

이것은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용서한 것에 대해, 요나가 불평을 한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욘 4:4)” 그리고 한 사건이 생깁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박넝쿨 사건이죠? 계속 말씀을 볼까요?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욘 4:5).” 니느웨가 망하기를 바라고 초막을 짓고, 그늘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욘 4:6).” 박넝쿨로 인해 요나가 크게 기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욘 4:7).” 박넝쿨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뜨거운 햇빛과 바람으로 인해 요나는 힘들어 합니다. 왜냐하면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욘 4:8a)”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욘 4:8b).”라고 말합니다.

▲ 박넝쿨 아래의 요나

박넝쿨 하나가 만드는 그늘의 있고 없음으로 인해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타이르십니다.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욘 4:9a)”, 그러자 요나는 아직도 성이 풀리지 않아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욘 4:9b).” 자기 기분에 취하죠? 감정이 격해지면 이성을 상실하고 감정이 우리를 이끄는 대로 말을 합니다. 새방언이 아니라, 헌방언입니다. 따라서 요나는 성을 내며, 내가 죽어도 하나님은 관여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도대체 예언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 할 수 없습니다.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욘 4:10-11)

요나서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 다음에 요나가 어떻게 했다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묻는 하나님의 질문이 됩니다. 박넝쿨 하나도 그렇게 아끼는 너희들이 천하보다 더 귀한 생명을 무시하고 차별하며 혐오한다니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3. 차별금지법

지난 2020년 6월 29일 정의당이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발의했습니다. 이 법안은 2006년 국가 인권위원회가 정부에 입법을 권고한 이후, 7차례나 추진됐지만 통과되지 않았습니다. 개신교 몇몇 목사들과 교인들이 조직적으로 반대했고, 또 이 법안을 찬성하면 표를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정치인들이 법안을 취소했기 때문입니다.

일부 개신교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전염병처럼 동성애가 확산될 것이다.” ‘반동성애기독시민연대’, ‘한국교회수호결사대’ 등과 같은 개신교 단체들이 대대적으로 반대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진평연’(진정한 평등을 바라며 나쁜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전국연합)이라는 이름으로 조직적인 반대운동을 벌입니다.

물론 이들이 ‘차별금지법’을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이유는 ‘차별금지법’ 안에 포함된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 항목 때문입니다. 차별금지법의 내용을 볼까요? “성별, 인종, 출신지, 국적, 가족 형태, 성적 지향, 성 정체성, 학력, 장애 여부 등에 따라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차별을 금지하는 분야는 크게 고용, 교육, 의료 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고용은 승진과 급여도 포함되어있는 개념이며, 교육 및 의료 등의 서비스 제공에는 주거와 기타 여러 공공 및 사적 서비스 제공 등을 포함합니다.

따라서 고용이나 승진에 있어서 후보자들 중 자격과 자질이 동등하거나 우월한데도 불구하고 여성 또는 동양인이나 흑인, 그리고 성별 정체성과 장애 여부, 지방 출신이라는 이유로 불이익을 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누려야할 교육·의료 등은 물론, 기타 서비스 업종에서 차별을 해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차별금지법은 고용, 교육, 의료 등의 공적 영역에서의 모든 차별을 금지하는 것이지, 동성애를 옹호하고 확산시키는 법안이 아닙니다.

최근 가짜 뉴스로 많이 퍼지고 있는 “목회자들이, 동성애가 죄라고 설교하면 처벌을 받는다.”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설교는 우리 사회의 공적 영역에 해당이 되지 않습니다. 또 “자유민주주의를 무너뜨리기 위해 동성애를 허용하고 차별금지법을 시행한다.”고 주장하는 목사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자유민주주의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런 거짓말도 떳떳이 할 수 있는 것이죠? 단언하건데, 이런 목사가 있는 교회는 나가지 않는 것이 한국 교회 전체의 건강성을 위해서도 좋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일부 개신교 목사들과 교인들이 차별금지법을 반대할까요? 사회적 신뢰를 잃어버린 ‘극우 개신교’가 외부의 적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잘 써먹었던 반공 이데올로기, 좌빨이나 빨갱이 혐오 등은 이제 약효가 다 했습니다. 이제는 동성애 반대와 이슬람 난민 수용 반대가 먹힙니다. 혐오를 먹고 사는 극우 개신교의 서글픈 민낯인 것입니다. 박넝쿨을 아꼈던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의 생명을 자기 나라의 원수라고 미워했듯이, 오늘 극우 개신교는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자기와 다르다고 차별하며 혐오하고 있습니다. 정치적 정쟁의 도구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동성애’라는 말 때문에, 성경에 무지하여 한국 개신교가 지금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데, 사실 동성애(homosexuality)라는 말 자체는 19세기 말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1869년 헝가리계 독일 의사인 칼 마리아 벤케르트(K. M. Benkert)가 이 단어를 처음 사용했는데, 그 뒤로 서서히 확산돼 널리 쓰이는 단어가 됐습니다. 이 시기에 비슷한 표현들이 등장합니다. 가령 ‘거꾸로 된 성적 감정’이나 ‘성도착’ 등. 그렇다면 이러한 새로운 개념들이 등장했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러한 특징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인식과 태도가 이전과는 달라졌다는 말입니다.

정신병자들에 대한 중세와 근대 이후 사람들의 인식이 달라진 것과 같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셀 푸코는 이렇게 말합니다. “광인은 생겨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사실 중세에서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광인의 광기는 감금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 경험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광기는 어떤 진리나 특수한 능력을 가진 것으로도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서구 사회가 계몽주의와 산업화를 거치며 이성중심주의(로고스중심주의), 남성중심주의 사회로 전환 되면서 광기는 부정적인 것이며 이성 즉 ‘남성적인 것의 부재’, 혹은 ‘이성의 거부’로 간주되어, 동일자인 주체에 의해 비동일자인 타자로서, 혐오와 배제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19세기 후반에 무슨 일이 생겼을까요? 바로 산업자본주의의 등장입니다. 산업자본주의가 발전하고 도시화가 이루어져 가족과 성의 관계가 재구성되는 과정에서 동성애라는 개념이 등장한 것입니다(물론, 이러한 동성애자들은 진화심리학의 연구 결과, 인류사의 초창기부터 있었다고 합니다만). 당시에 등장한 개념들 가운데, ‘주부’, ‘매춘부’, ‘아동’이라는 개념들도 있었습니다. 남성이 밖에 나가 노동하고, 아내는 집에서 가정을 돌보고, 아이는 잘 키워 미래의 노동자로 만들고, 지금 우리가 보통 상식으로 여기는 가정이라는 개념이 서구사회에 확립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산업자본주의의 노동력 확보를 위해 가정의 개념, 곧 남성은 일하고 여성은 집에서 밥하고, 또한 노동력 확보를 위해 출산을 장려하는 차원에서 이제껏 있어왔던 사회적 소수자인 동성애자들을 혐오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본의 증식을 위해 희생양을 만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동성애자들을 책망하는 말씀이 있는데 무슨 말이냐?”라고 반문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세히 읽어보면, 타자를 혐오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에 대한 반대의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럼 성경에 나오는 동성애 표현을 살펴볼까요? 바울 서신에서 나오는 구절만 살펴보겠습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μαλακοὶ)나 ‘남색하는 자(ἀρσενοκοῖται)’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

“알 것은 이것이니,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ἀρσενοκοίταις)’와 인신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딤전 1:9-11)

여기서 ‘탐색하는 자(말라코이)’와 ‘남색하는 자(아르세노코이타이)’를 금하는 것이 동성애 반대로 이야기 되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말라코이’와 ‘아르세노코이타이’를 영어 성경에서는 어떻게 번역을 했을까요? 처음(1611년)에는 말라코이를 ‘여성적인 사람’, 아르세노코이타이를 ‘인간과 스스로를 더럽히는 자’ 등으로 번역하다, 20세기 중반부터(1952년) 성도착자, 동성애자, 소도미를 행하는 자 등으로 번역합니다. 쉽게 도표로 정리해 볼까요? 단어의 해석을 다르게 하죠? 앞서 말씀드린 대로, 20세기 들어 산업자본주의 시대가 최고로 발전할 때부터입니다.

따라서 성서에 나오는 동성애 금지는 이렇게 해석이 됩니다. 이성이든 동성이든 타자를 (성)폭행하거나 혐오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음행하는 자, 간음하는 자, 탐욕을 부리는 자, 모욕하는 자들과 같은 맥락에 놓고, 디모데전서에서는 경건하지 아니한 자, 거룩하지 아니한 자, 부모를 죽이거나 살인하는 자, 인신매매 하는 자, 거짓말하는 자 등과 같은 맥락에서 판단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나와 다른 타자를 혐오하고 증오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에 대한 금지입니다. 따라서 동성에 대한 폭력 행사를 금하는 것이 동성애 금지의 올바른 이해입니다.

동성에게 성폭행을 한다? 무슨 말일까요? 당시 그리스나 로마에서는 성적 착취를 위해 남자 노예를 구입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시대에 노예는 누구나 주인의 성 노예가 될 수 있었습니다. 로마의 거주민 중 다섯 명 중 한명은 노예였다고 하니, 이들 노예들은 여자는 물론이고 남자들도 주인의 성적 요구를 거절할 힘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남성 노예들 가운데, 주인의 성적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람이 만든 고자’들입니다. 마태복음에 나오죠?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만한 자는 받을지어다(마 19:12).” ‘사람이 만든 고자’들은 값비싼 섹스 장난감이었습니다. 인신매매꾼들은 소년들을 납치하거나 구매해서 고환을 절단해 사춘기 이전의 아름다움을 보존하게 한 후 부자들이나 포주들에게 팔았고, 포주는 그들의 몸으로 장사를 했습니다.

고대 남성들은 이렇게 거세된 남자들의 나긋하고 여성적인 몸을 무척 좋아했는데, 그들의 양성적 특징이 여성적 아름다움보다 더 매혹적이라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여성보다 남성이 더 완전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이러한 ‘사람이 만든 고자’들에 대한 노예 소유주들의 성폭력이었던 것입니다. 곧 우리가 오늘날 이해하는 동성애 금지라는 것은 당시 동성에 대한 성폭력 행사를 금한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노예를 폭행하고, 죽이는 것에 대한 반대입니다. 힘이 있다고 힘없는 자를 짓밟는 것에 대한 부정인 것입니다. 이것은 넓은 범주로 보면 모든 타자에 대한 혐오와 폭행과 증오와 미움에 대한 반대입니다.

아무튼 남성들도 이렇게 폭행을 당했다면 여성들은 어떠했겠습니까? 기가 막히겠죠? 우리 주변을 둘러볼까요? 가해자들이 피해자들을 ‘노예’라고 부르며 성 착취 사진을 올리고 신상정보까지 공유하는 텔레그램 채팅방인 ‘N번방 사건’이나, 세계 최대 아동 성 착취물 사이트인 ‘웰컴 투 비디오’ 운영자 손정우에 대한 우리 법원의 판결을 보세요. 한심합니다. 우리 사회는 물론, 지금 교회 내 성폭행과 성추행 등이 만연한데, 자정하고 반성해야 될 개신교가, 성인지 감수성이 바닥인 목사들과 교인들이 차별금지법 반대로 시선을 돌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9장의 소돔과 고모라 사건, 그리고 사사기 19장에 나오는 레위인의 첩 사건도 동일한 맥락입니다. 불량배들이 남자와 천사들을 강간하려고 하지만, 사실 그들 손에 성폭력을 당하는 것은 두 딸과 레위인의 첩인 여성이었고, 결국 그 폭력으로 여자가 죽는 이야기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나그네를, 곧 나와 다른 타자를 혐오하고 폭행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동성애로 표현된 성서의 구절들은 권력과 힘을 가진 이들이 타자를 혐오하고 짓밟는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힘과 권력을 가진 자들은 약자를 짓밟습니다. 그들 때문에 이제 개신교는, 교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구원은 이제 상식적인 세상 사람들, 곧 이방인들에게로 넘어갑니다.

4.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오늘 사도행전 본문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지난주 말씀에 이어 오늘 사도행전 말씀은 사도 바울이 로마에 도착한 후의 일입니다. 그토록 가고 싶었던 로마에 재판을 받으러 가게 됩니다. 본문 말씀은 그 여정을 상세히 말하고 있습니다.

“석 달 후에, 우리가 그 섬에서 겨울을 난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떠나니 그 배의 머리 장식은 디오스구로라. 수라구사에 대고 사흘을 있다가 거기서 둘러가서 레기온에 이르러 하루를 지낸 후 남풍이 일어나므로 이튿날 보디올에 이르러, 거기서 형제들을 만나 그들의 청함을 받아 이레를 함께 머무니라.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이 로마로 가니라.”(행 28:11-14)

로마에 도착하니, 형제들이 맞이하러 나옵니다.

“그 곳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에게는 자기를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행 28:15-16)

로마에 도착한 바울은 이제 전도를 시작합니다.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그들이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관습을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준 바 되었으니,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석방하려 하였으나,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못하여 가이사에게 상소함이요, 내 민족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니라.”(행 28:17-19)

바울을 죽이려고 해코지 하는 이들이 누구죠? 바로 바울의 혈족인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도 누구죠? 유대인들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사람을 해하고, 차별하고, 혐오하는 이들이 바로 오늘 한국의 일부 개신교인들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또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은, 안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잘 믿는다 하는 오늘 한국교회라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같은 민족인 유대인을 고발하지 않습니다. 로마시민권자로 가이사에게 상소하여 재판을 받으러 로마에 온 것입니다. 계속해서 바울의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이러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으니,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행 28:20).” 끝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을 걱정하죠? 지금 무지한 개신교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이념에 사로 잡혀 차별과 혐오를 조장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도 구원 받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따라서 로마에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바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전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 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알기 때문이라 하더라.”(행 28:21-22)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았지만, 그 사상과 내용은 몰랐는데, 이제 바울 당신이 우리 앞에 있으니, 이야기 해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그들과 시간을 정해놓고 함께 공부합니다. 토론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이르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 도다.”(행 28:23-26)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은 사람도 있죠? 따라서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행 28:27-28)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갔다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구원은 혐오와 차별을 조장하는 한국 교회에 머물지 않고, 상식적이며 건강한 지성을 가진 믿지 않는 이들에게로 간다는 말씀입니다.

5. 담대하게 거침없이!

따라서 바울은 담대하게 거침없이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합니다. 성령의 생명의 역사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로마에 재판을 기다리며 있었던 동안 계속됩니다. 말씀을 볼까요?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행 28:29-3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혐오가 아닌 사랑의 복음을, 차별과 배제의 세상이 아닌 더불어 사는 삶과 타자와 연대하는 생명 평화의 세상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전해야 합니다. 또한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무지를 책망했듯이, 우리는 한국 개신교에 심판의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 니느웨와 같이 회개하지 않으면 한국 교회는 무너질 것입니다. 성령의 놀라운 역사는 반드시 상식 있는, 타자를 배려하는, 성령의 사람들로 하여금 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놀라운 표적이 임할 것입니다. 혐오의 말, 차별의 말이 아닌 새 방언을 말하게 되고, 고통 받는 모든 이들이 새로운 삶을 얻을 것입니다. 마가복음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 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16:19-20)

부활 승천하신 우리 주님께서도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지만,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표적이 뒤따른다고 하십니다. 치유하는 성령의 역사, 새 방언을 말하는 생명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담대하게, 거침없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복음을 증거 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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