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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시작하라

기사승인 2020.02.19  17:3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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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 (2)

문: 그러면 진실된 원수사랑이란 어떤 것인가?

답: 이 물음에 올바른 대답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께서 대체 어떤 의미로 사랑을 말씀하셨는지 분명히 해야 한다. 이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뜻하신 사랑에 대한 그릇된 이해가 그리스도의 일을 가장 악성으로 변절시키는 것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릇된 이해가 원수사랑이 운명적으로 유토피아적 이상이나 위선, 허식, 유약함에 빠지도록 괴롭히고 원수사랑 안에 있는 진실하고 남성적인 정신이 사라지게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감상적인 수준에서 겉치레로 원수사랑 하는 것을 멀리해야만 한다. 한 가지 극히 명백한 사실이 있다. 이것은 원수사랑이라는 가장 중요한 일에서 모든 오류의 안개를 몰아낸다. 그것은 예수께서 생각하는 사랑이란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있는 절대적인 의무에 대한 깊은 느낌이라는 것이다. 이런 감정은 우리가 어떤 경우에서도 주님이시며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과 그 하나님에 대한 무조건적인 의무에서 연유한다. 이러한 결속은 적대관계로 인해 폐지될 수 없으며 원수도 역시 아버지의 자식임에는 변함이 없다.

너는 그를 기뻐하지 않지만, 너희들 사이에 적대감이 있다는 것에 대해 아픔을, 깊은 아픔을 느낀다. 너는 그래선 안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상황이 그렇지 않다면 정말 좋을 것이다. 너는 그와 다시 관계를 맺고 네 쪽에서 적대관계를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다. 네가 그렇게 느끼고 있다면 너는 원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네가 주님이시며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면 너는 당연히, 또 반드시 그렇게 느낄 것이다.

문: 그것은 그래도 여전히 힘들지 않은가?

답: 증오가 한층 더 힘들지 않을까? 증오ㅓ는 네 영혼을 갉아먹고 네 자신의 품위를 떨어뜨리고 너를 비천하게 만들지 않는가? 증오는 네가 아주 저주스러운 짓을 하도록 하지 않는가? 그것은 아주 무거운 짐이요, 노예 같은 것이 아닌가? 하지만 무엇보다도 증오로 인해서 네가 하나님으로부터, 주님으로부터, 아버지로부터 멀어지지 않는가? 네가 증오한다면 도대체 너는 어떻게 사랑과 연결되어 있ㅎ을 수 있겠는가? 증오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네게는 하나님의 구원이 아니겠는가? 예수의 이 요구야말로 바로 자유인 것이다. 이 요구는 근본적으로 “너는 미워해서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너는 미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문: 그런데 요구한다는 것에 문제가 있지 않을까?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항변이 있다. 즉 사랑을 명령할 수 있을까? 사랑이란 자유롭게 주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우리가 원수사랑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 Timothy P. Schmalz, 「LOVE YOUR ENEMIES」 ⓒGetty Image

답: 우리는 사랑-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사랑이 아니라, 이런 류의 사랑도 사람들이 잘 이해하고 있는데-을 요구하고 명령할 수 있다. 우리는 증오하고 복수하려는 충동에 맞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있는 무조건적인 저 결속감과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있는 무조건적인 의무를 의식하고 있으라고 요구하고 명령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모든 것도 그렇듯이 이 당위로서의 의무(Sollen)는 우리가 주님이시며 아버지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그 정도에 따라 어떻게 달리할 수 없는, 일종의 자발적인 필요(ein freies Müssen)이 된다. 사랑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이 필연성이 결국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을 요구하고 명령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Dürfen).

문: 그러나 내가 앞서 말한 어려운 경우들에서는 어떻게 내가 이런 태도를 가질 수 있겠는가?

답: 그 대답은 언제나 같다. 즉 주님이시며 아버지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라는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너는 아버지를 본받으려고 하는 것을 통해서 그의 아들이 되어야 한다.

문: 이 비유(Bild)는 무슨 뜻인가? 이것은 단지 비유인가?

답: 그것은 물론 비유이다. 그러나 그 비유는 놀랄만한 근본원칙을 말하고 있다. 즉,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의 행위를 본받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훌륭한 분이시기에 너도 역시 훌륭해야 한다. 이에 반해 적대심은 정말 옹졸한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은 무한광대하시기에 너의 마음도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피조물들에게로 나아가 보자. 하나님께서 만드신 태양이 어떻게 만물을 비치고 있는지 보라. 더럽고 추한 것, 뱀들과 맹금류 위에도 비추고 있는 것을 보라. 이슬이 어떻게 내리는지 보라. 잡초와 독초에도 이슬이 내리는 것을 보라. 너도 그렇게 되고 싶지 않은가? 하나님의 입장에 서서 악인과 부정한 자들과 원수들에게도 너의 태양을 비추이도록 할 수는 없는가? 그들도 역시 어떻게든 하나님께 속해 있지 않은가? 그들은 하나님의 원수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도 하나님이요, 그의 태양을 그들에게 비추어시고 축복의 비를 그들에게 내리신다. 이런 관점과 함께 네가 그들을 볼 때 뭔가 기쁨 같은 것이 당연히 있어야만 하지 않겠는가? 너는 그들의 좋은 점도, 그것인 진실인 한, 그것을 숨기지 않고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그들에게 좋은 일이 생기기를 원하고 그들을 축복할 수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너는 육친의 형제에 대해서는 비록 너희들이 서로 멀어졌다 할지라도 그렇게 하지 않는가? 너는 적의 입장으로서가 아니라 언제까지나 하나님의 자녀요, 형제로서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 앞에서는, 오로지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네 육신은 그것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는 분명 그리스도의 제자이다. 그리스도의 제자인 너에게 요구를 하는 것이다. 어떤 특별한 것, 평범하지 않은 어떤 것이 너에게 요구된다. 왜냐하면 네가 단지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과만 우정과 사랑을 나눈다면, 혹은 혈연적인 사랑으로 묶인 사람들만을 사랑하다면 그것이 무슨 가치가 있을까 해서이다. 그거야 당연한 것이고 그 반대가 이상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에겐 어떤 특별한 것이 당연히, 반드시 요구되어야만 하고, 비네(Vinet; 1797-1847, 스위스 개신교 신학자. 자유교회를 조직하는데 헌신함–역주)가 전형적인 방식으로 강조했듯이 그리스도의 제자에게는 어떤 특별한 것, 즉 단순한 자연계를 넘어서고, 율법은 물론 관습적인 도덕을 넘어서는 것이 당연히, 또 반드시 요구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제자에게는 기적이 당연히, 또 반드시 요구된다. 그리스도의 제자에게는 원수사랑이 당연히, 또 반드시 요구된다. 만약에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고자 한다면, 하나님은 네가 그의 아들이 되게 하기 위해서 너에게 원수를 사랑할 것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라고 해서 다를 건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당연히 특별한 일을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신분이 높으면 책임도 무겁다는 것이 그리스도의 제자에게도 고상한 의미로 적용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기 바란다!

문: 하지만 저 끔찍한 경우들에 있어서는 그것은 여전히 매우 힘든 일이 아닌가?

답: 맞다. 그런 경우들은 우리로서는 그 일의 진행을 전혀 알 수 없고 주님이시며 아버지이신 하나님만이 아시는 아주 특별한 경우들이다. (그런데) 하나님 자신이 죄인을 물리치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물리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네가 너의 태산 같은 높은 죄를 생각한다면 어찌하겠는가? 죄인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네 형제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어두운 구석구석 모든 곳에 하나님의 사랑을 비추고 너도 비추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네가 본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너에게 오는 이 사랑이, 이 용서가 원수에게도. 형제에게도 흘러가야 하지 않겠는가? 꼭 흘러가야만 되지 않겠는가?

문: 하지만 그 다른 사람이 뉘우치지 않고 계속 원수가 된다면?

답: 그렇다면 적어도 너는 그의 원수이기를 그만두고. 그 사람이 더 이상 원수가 아닐 때까지 기다려라. 네가 더 이상 그의 원수가 아니라면 그것은 아마 그도 더 이상 원수가 아니게 될 이유가 될 것이다. 네가 시작하라. 너는 네가 시작한다는 이 축복을 해방으로 느낄 것이다.

레온하르트 가라츠/신요섭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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