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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떠나 모두와 하나 되는 길”

기사승인 2019.12.28  17: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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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라디미르 쿠쉬 「양초」와 카르투시오 봉쇄수도사

▲ 블라디미르 쿠쉬 「candle」 30 x 19 inches, oil on canvas

아기 예수님의 탄생과 다시 오심을 기리는 대림절, 그 마지막 주를 통과한다. 대림절 4주 동안 자주 떠오른 작품이 블라디미르 쿠쉬의 「양초」다. 어둠 속에서 불을 밝히고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삶, 그 모습을 보여준다. 많은 설명이 필요 없는 은유다. 양초의 심지를 자신을 불태우는 존재로 그렸다. 타오르는 한 영혼이 깨어 기다린다. 기다림이 수동적인 태도라는 편견을 지워버린다. 여린 숨결에도 흔들리는 기다림이다. 그러나 결코 수동적인 기다림이 아니다. 자신을 오롯이 불태우는 기다림이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는 욕망을 간질인다. 타자의 욕망이 욕망하는 존재가 되라고 자극한다. 소위 명품이라는 상징을 소비하는 존재가 되라고 유혹한다. 많은 이들이 부러워하는 욕망의 대상이 되라는 유혹이다.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면, 욕망대로 소비할 수 없다면, 무능력하고 무가치한 실패자로 낙인찍는다. 그러나 주님 부르신 길은 욕망의 대상이 되는 삶이 아니다. 사랑의 대상이 되고, 사랑의 통로가 되는 삶이다. 타자가 사랑받는 존재가 될 수 있도록 사랑을 주는 삶이다. 값비싼 무엇인가를 소비하고 타자를 이용해 자신을 빛내는 삶이 아니다. 자신을 불태워 빛을 선사하는 삶이다.

욕망의 대상이 되기보다 사랑의 대상이 되고, 누군가가 사랑의 대상이 되게 하는 삶이 왜 중요한가? 그 대답은 각자의 영혼 안에 이미 주어져있다. 익명의 다수가 ‘좋아요’를 눌러주고 부러워 할 때, 어떤가? 잠시 들뜰 수는 있지만, 결국 허무하지 않은가. 그렇게 욕망의 대상이 돼도 채워지지 않는 영혼은 답을 준다. 그럴수록 더 허전하고 외로운 영혼이 대답한다. 그 허전함이 대답이다. 그렇게는 채워지지 않는다는. 누군가가 그대로를 사랑해줄 때, 누군가를 그대로 사랑할 때 그제야 안식에 이른다. 욕망의 대상이 되는 허망함을 맛보며, 사랑을 나누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다.

많은 사람의 ‘좋아요’가 필요하지 않다. 한 사람, 단 한 사람이면 충분하다. 그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겨주는 한 사람, 그 무엇보다 소중한 한 사람이면 충분하다. 그 한 사람이면, 삶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절망 가운데 다시 일어날 이유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깨어나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갈 이유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죽음의 골짜기를 걸어가도 그 한 사람 때문에 죽어가지 않고 살아간다. 한 영혼이 자신을 불태워 그 길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길로 불러주기 때문이다.

삶의 이유가 되어주는 한 사람, 부모나 자녀일 수도 있고, 배우자나 스승일 수도 있고, 오랜 벗이거나 영적 길벗일 수도 있다. 그 한 사람을 사랑하는 길은 다양하다. 그 사람만 바라볼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이 지혜로 깊어갈 때, 그 사람만을 사랑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깊은 산속에서 솟아오른 물줄기가 결국 강을 따라 바다에 가닿듯, 한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은 모두를 향해 흘러간다. 그 사람과 이어진 모두를 사랑하지 않고는 그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또한 한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는 모두를 사랑할 수가 없다.

▲ 블라디미르 쿠쉬, 「candle」 7 x 1 inches

한 사람을 사랑하기에 모두를 사랑하게 되는 삶, 여기에서 사랑의 신비와 역설이 깨어난다. 모두를 사랑함으로써 한 사람을 사랑하고, 한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모두를 사랑하는 역설이 드러난다. 그 신비를 카르투시오 봉쇄수도원을 통해 더 깊이 만났다.

추풍령 학무산 산자락 외딴 집에 깃들어 산지 10년이 넘었다. 학이 춤추는 모양이라 학무산이라 이름 붙은 그 산자락 저편에 카르투시오 봉쇄수도원이 있었다. 15년 전에 생겨서 지금까지 같은 산자락에, 그것도 차로 10분거리에 함께 살았지만 몰랐다. 우연히 다큐멘터리를 통해 알게 된 봉쇄수도원, 가까이 살던 그 수도사들의 삶이 잠을 깨운다.

1084년 성 브루노와 여섯 명의 동료가 샤르트르즈 사막으로 들어가 시작한 은수생활이 카르투시오 수도회의 모태다. 그 이후 천 년 동안 이어져 세계 11개국에 370명의 수도사가 있고, 아시아에는 한국에만 유일하다. 카르투시오 수도사는 평생 동안 침묵과 고독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기도로 살아간다. 일주일에 하루 월요일에만 네 시간 정도 함께 산행하면서 대화를 나누고, 주일 예배 후에 함께 식사하고 대화를 나눈다. 그 외에는 독방에서 침묵하며 홀로 지낸다.

식사는 하루에 한 끼, 채식이다. 금요일에는 극기를 위해 빵과 물만 먹지만, 한국에서는 빵 대신 밥이다. 독방에는 작은 텃밭과 작업 공간이 있어서 각자에게 맡겨진 노동으로도 기도한다. 일 년에 두 번 가족이 들어와 만날 수 있지만, 함께 밥을 먹거나 잠을 자지는 못한다. 수도사가 밖으로 나가서 가족을 만날 수는 없다. 가족이 아프거나 죽어도 나갈 수 없다. 수도사는 죽어서도 수도원 안에 묻힌다.

▲ KBS 다큐 인사이트 「세상 끝의 집 카르투시오 봉쇄수도원」 캡쳐

인근 마을 주민에게 카르투시오 수도사를 아는지 물어보면, 가끔 이상한 옷을 입은 사람들을 본적이 있다는 정도다. 비신앙인에게 말하면, 왜 그렇게 사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왜 아니겠는가. 개신교 신앙인도 이해하기 쉽지 않은데. 침묵과 고독, 관상(contemplation)의 삶에 관심이 있는 나조차도 알 듯 모를 듯하다. 왜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일까? 그렇게까지 철저한 고독 속에 침묵으로 기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통 받는 이웃을 돕는 활동 역시 기도가 아닌가? “활동 중의 관상”(contemplation in action)도 있지 않은가. 세상을 등지고 홀로 기도하다가 죽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분명 깊은 울림과 감동을 맛보면서도 깔끔하게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그런데 카르투시오 봉쇄수도원을 접하면서 기도시간의 결이 달라졌다. 가능한 하루에 두 번 침묵기도로 하나님께 향하려 한다. 30분에서 한 시간 이상 가만히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임재를 향해 자신을 열어 드린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모두 하나라고 믿는다. 구체적인 기도제목으로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 자신을 다 열어드리는 지향만으로도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기도라 믿는다. 기도에 대한 그런 믿음이 봉쇄수도사로 인해 생생한 경험이 되었다. 지난 십 년 간 교회에서, 서재에서 기도할 때마다 혼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비통함에 쓰러질 때도, 때론 절규할 힘조차 남지 않았던 순간에도 혼자가 아니었다. 어두운 밤 산자락 저편에서 수도사들이 함께 기도하고 있었다. 함께 기도하는 영혼, 침묵 가운데 주님 품에 함께 안긴 영혼들이 느껴졌다. 주님 안에서 함께 하는 영적 동반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대도시, 분주한 거리를 걸으면서도 수도사들과 연결된다. 독방 좁은 공간에서 얼마나 왔다 갔다 하며 기도했던지 바닥에 거닐던 부분의 색이 달라질 정도다. 그들의 걷는 기도가 도시를 걷는 나의 발걸음과 이어진다. 빌딩숲을 걸을 때 봉쇄수도사의 삶을 떠오른다. 감탄인지, 탄식인지 문득 쏟아져 나오는 숨결, 대체 어떻게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무엇이 얼마나 간절하면 그럴 수 있을까? 물음에 압도된다. 얼마간 침묵하고 독거하는 기도는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모든 인연을 끊고 평생을 그렇게 살다가 죽는 길에는 가닿을 수가 없었다.

문득문득 수도사들의 모습이 떠오르며 화두가 된다. 도저히 그들처럼 살 수가 없겠구나 생각하다가 물음에 붙들린다. 산자락을 향한 외침이 메아리로 돌아오듯, 물음이 되돌아 왔다. 왜, 어떻게 그렇게 살아가느냐는 물음이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메아리가 내 목소리로 물어온다. “너는(나는) 왜 이렇게밖에 살 수 없느냐? 왜 고독과 침묵 속에서 살아갈 수 없느냐?” 되돌아온 물음 앞에 선다.

맛난 음식을 포기할 수 없어서인가? 맛집과 먹방의 시대를 역류하는 물음이다. 수많은 생명을 죽이고 자연을 파괴하는 이유는 사실 단순하다. 무엇보다 혀끝의 쾌감이 아닌가. 너무 초라해서 너무 잔인한 이유가 아닌가. 이웃과 친구와 가족 때문인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중요한 만큼 그렇게 깊이 사귀고 나눴던가. 라브뤼예르의 처세술은 표피적인 관계의 씁쓸함을 보여준다. “우리는 언젠가 친구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적과 함께 살아야 하고, 언제 원수가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친구와 함께 살아야 한다.”(라브뤼예르, 알랭 드 보통의 『불안』 124쪽) 나중에 축의금이 돌아올 사람인가, 얼마나 하면 되는 만남인가… 이해관계를 저울질하며 만나고 헤어지지 않았던가. 외로움을 허망한 쾌락과 껍질뿐인 만남으로 마비시킨 것이 아닌가. SNS로 시도 때도 없이 수다를 떨지만, 그 안에 영혼이 담긴 대화는 얼마 되던가. 쓸모없는 혹은 누군가를 헐뜯는 잡담을 빼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물론 각자 절박한 이유가 있겠지만, 고독과 침묵 속에 살아갈 수 없는 이유가 이 정도라면, 허무하지 않은가.

봉쇄수도원의 침묵과 고독이 작은 촛불처럼 비춰준다. 블라디미르 쿠쉬의 작품 「양초」처럼 그들은 자신을 불태워 빛을 비춘다. 수도사처럼 살아갈 수 없다고 붙잡은 이유들이 얼마나 허망한지 비춰준다. 헛된 욕망과 집착을 깨우친다. 대체 무엇이 의미 있는 삶인지, 참된 삶인지 물어온다. 고독과 침묵과 가난으로 타오르는 그들의 삶이 물어온다. 그럼에도 대답이 듣고 싶었다.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왜 그렇게 살아가는지. 산책길에서 기다렸다가 함께 걸으며 물어볼까? 수도회의 회헌을 살펴보니 물어도 소용이 없었다. 다행히 다큐에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한 수도사가 카르투시오 수도회의 특징을 말한다. 다른 수도회는 봉사로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카르투시오는 기도로 섬긴다고.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것이 뭐냐는 물음에 그 수도사가 대답한다. 한참을 뜸을 들인 후, 복받치는 감정을 누르려는 듯 고개를 젓고 또 젓다가 답한다. 눈물을 삼키며 대답한다. “사람들을 돕는 것! … 돕고 싶어요.” 그 수도사는 독방에서 사람들의 기도제목을 놓고 기도하며 살아간다.

사람을 돕는 길은 다양하다, 물질로, 몸으로, 마음으로. 그러나 무엇으로도 도울 수 없는 상황이 있다. 바로 그때 기도가 절로 나온다. 자신을 위해 하나님의 마음으로 기도해주는 한 영혼,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기도해주는 한 영혼만이 그에게 빛이고 길이 아닐까. 카르투시오 수도사는 이 세상 그 누구도 절망 가운데 혼자 버림받지 않게 한다. 침묵과 고독 속에서 모든 존재를 위해 기도의 불을 밝힌다. 기도의 제단으로서 살아간다. 카르투시오회 헌장 4-11은 말한다. “우리의 마음은 끊임없이 주님을 향하여 순수한 기도가 올려지는 살아있는 제단이다.”

▲ KBS 다큐 인사이트 「세상 끝의 집 카르투시오 봉쇄수도원」 캡쳐

종신서원을 한 다른 봉쇄수도사는 누나가 무료병원에서 환자를 섬기는 수녀다. 동생은 독거하며 침묵 가운데 하나님을 향하는 삶을 살고, 누나는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을 도우며 산다. 동생이 누나에게 말한다. 독방 안에만 있다 보면, 가난한 분들을 위해서 직접적으로 봉사할 수 없는 게 슬플 때도 있고, 안타까울 때도 있다고. 그 슬픔과 안타까움 속에서 수도사는 누나를, 수녀를 생각한다. 수녀도 기도할 때, 하얀 수도복을 입고 무릎 꿇고 기도하는 동생을 떠올리며 기도한다. 수도사가 말한다. “너무 좋네요. 저는 수녀님 덕분에 가난한 사람을 더 생각하고, 수녀님은 저 덕분에 하느님 바라보시는 생각을 하고.”

두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된 영적 동반의 신비를 보여준다. 평생 침묵과 고독 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삶은 이웃을 섬기는 길에 빛이 된다. 동시에 이웃을 섬기는 삶에 자신을 다 드리는 수녀 역시 기도하는 수도사에게 빛이 된다. 각자를 부르신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 하나님과 이웃을 오롯이 그러나 다르게 사랑한다. 서로 다른 길이 기타줄처럼 서로 다른 음을 울리지만, 하나님 안에서 한 노래를 연주한다. 사랑이라는 노래의 화음을 이룬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그렇게 함께 걷는 영적 동반이다.

봉쇄수도사는 평생 하나님을 바라보며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고 싶어서 수도회에서 종신서원을 한다. 다른 수도사가 가장 바라는 소원은 우리 가운데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온 세상에 보여주는 것이다. 이기적인 자기 집착이나 세상으로부터의 도피가 결단코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특별한 길로 부르심을 받았을 뿐이다. 목숨까지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사랑에 빠진다. 그 하나님을 너무 사랑해서 자신을 다 드리고픈 마음이다. 그 하나님과 함께 사랑의 신비를 나날이 더 깊이 맛보고픈 바람이다. 너무나 자연스럽지 않은가.

활동 중의 관상이 가능하고 가장 이상적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럼에도 침묵과 고독 속에서 평생을 주님 안에 거하는 깊이는 분명 다르다. 독거와 침묵 속에서 평생 하나님을 바라보는 기도, 그것을 통한 은총은 경험한 사람만의 몫이다. 그 신비와 환희는 분명 교회가 지켜내고 전해야할 은총이다. 봉쇄 수도사들은 그 사랑의 신비와 깊이를 이 땅에 존재하게 한다. 그 신비의 불꽃을 꺼뜨리지 않고 이어준다.

그럼에도 낯설고 이상해 보인다면, 그 길이 담고 있는 역설 때문이리라. 카르투시오 수도회는 ‘모두를 떠나 모두와 하나 되는 역설적인 길’을 걷는다. 카르투시오 수도회 회헌 34-2는 이를 분명히 밝힌다. “모두로부터 떨어져 있는 우리는 모두와 일치되어 있다.” 고독을 통해 하나님 안에서 모두와 함께 거하고, 침묵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철저하게 세상의 이방인이 됨으로써 세상을 사랑한다. 하나님 한 분을 깊이 사랑함으로써 온 존재를 사랑한다. 주님께서도 미움을 통해 사랑하는 역설적인 길을 가르치시지 않았던가.

“누구든지 내게로 오는 사람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형제나 자매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누가14:26)

세상은 효율과 효과, 성과와 성공으로 판단하라고 다그친다. 봉쇄수도원의 길도 그 헤아림의 안경 때문에 이상해 보이기 쉽다. 사랑의 신비에 대해서조차 무슨 쓸모가 있는지부터 묻는다. 그러나 쓸모없어 보이는 일을 통해서도 사랑을 지켜내는 삶, 그것이 봉쇄수도원의 존재 이유가 아닐까? 모두를 떠나서 모두와 하나 되는 사랑의 신비를 지켜내는 삶이 존재이유가 아닌가.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당연하게 여긴 많은 것의 속임수와 허망함이 드러난다. 고독과 침묵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깊은 위로가 된다.

봉쇄수도사가 온 삶을 다 바쳐 사랑을 불태우고 있다. 고독과 침묵으로 빛나고 있다. 그들의 존재가 타오르는 양초처럼 삶의 진실과 허상을 비춰준다. 진정한 소원을 흔들어 깨운다. 아무도 떠나지 못하면서 누구와도 함께이지 못한 일상에 빛을 비춘다. 아무것도 포기하지 못하면서 아무것도 누리지 못하는 일상을 비춰준다. 모두를 떠나 모두와 함께인 사랑의 신비로, 모든 것을 포기해 모든 것을 누리는 신비로, 하나님 한 분을 사랑함으로써 모두를 사랑하는 역설로. 그들의 길을 이해할 수 없고, 동의할 수 없다 해도, 그 빛은 분명 비춰준다. 때론 당황스럽게, 때론 감동스럽게. 그 빛 앞에서 무엇이 보이는가? 그 빛이 비춰주는 자신의 진실은 무엇인가? 가장 간절한 소원은 무엇인가? 사랑하는 이에게 진정 주고픈 삶은 무엇인가?

일하기보다 주님 앞에 앉았던 마리아, 주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누가복음 10:42) 봉쇄수도원에서 마리아처럼 주님을 바라보는 수도사의 선택은 그 누구도 빼앗지 못하리라. 그러나 주님께서 마르다에게도 마리아의 길을 강요하지 않으셨다. 누군가는 마리아의 마음으로 마르다를 살라고도 한다. 활동 중의 관상이 최고라 한다.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어느 한쪽만 살기도 쉽지 않다. 각자를 향한 부르심이 있는 게 아닐까?

마르다의 길로 부르심 받아 걸어도 충분하다. 아니 이 땅에 얼마나 많은 마르다가 필요한가. 마르다의 길을 좋은 몫으로 택했다면, 그 역시 아무도 빼앗지 못하리라. 다만 마르다의 길을 걸으며, 주님 바라보는 마리아와 함께라면 어떨까? 다른 길을 함께 걷는 영적 동반이 아름다워 보인다, 누나인 수녀와 동생인 봉쇄수도사처럼. 마리아의 길이 아니면 어떤가, 마르다의 길을 걸으며 주님 바라보는 마리아와 함께 간다면.

(예정한 글은 「은유의 여행2」이었습니다. 그러나 카르투시오 수도회를 만나면서, 그 강렬한 여운을 붙잡으려고 다음으로 미뤘습니다. 혹시나 기다리신 분이 계시다면,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길. 은유의 여행 결론부로 새 해의 첫 인사를 올리겠습니다. 한 해 동안 읽어주시고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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