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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의 여행(1/2)”

기사승인 2019.12.13  17: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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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라디미르 쿠쉬, 「은유의 여행 Metaphorical Journey」

추풍령 산속에 있는 작은 교회에 매주 내려오시던 권사님 한 분을 잊을 수 없다. 여든을 앞둔 몸으로 네 시간 반, 지하철과 기차를 몇 차례 갈아타고 내려오셨다. 대상포진으로 손이 마비되고 말도 못하게 되어 한동안 못 내려오신 적이 있다. 두 달 반 만에 주변의 만류에도 추풍령 공기라도 마셔야겠다며 내려오셨다. 그렇게까지 내려오고 싶은 이유를 여쭸다. 추풍령 산속에 이 작은 교회를 건축할 때부터 지금까지 당신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하셨다. 그래서 보고 싶고 또 오고 싶다고. 오랜 세월 정성과 관심을 쏟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소중하게 느껴지신 게 아닐까.

첫 눈에 반하지만 점점 시들해지는 만남이 있다. 반면에 처음에는 대면대면 하다가 점점 깊어지는 만남도 있다. 사람도, 풍경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첫 인상만 좋고 갈수록 실망하는 만남보다 오랠수록 진국인 만남이길 바란다. 그렇다고 첫 인상만 좋은 만남은 외면하고 무시할 일이 아니다. 사람이든, 풍경이든 그 진면모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깊이 알면 알수록 결국 사랑하게 되기 때문이다. 시간을 들여 손때와 땀과 눈물을 묻힐 때, 결국 사랑에 빠지고 만다. 좋은 사람, 멋진 풍경, 마음에 드는 공동체… 기준을 세우고 찾으려 하면 그렇게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땀과 눈물, 기도와 섬김을 쏟아 부으면 드디어 보이기 시작한다. 얼마나 사랑스럽고 아름다운지.

예술작품도 오래도록 보고 또 볼 때 드디어 속살을 보여준다. 값비싼 예술작품을 구입해 집에 걸어 놓는 이유 중 하나다. 세월 속에 오래도록 곁에 두고 사귀기 위해서다. 블라디미르 쿠쉬의 「은유의 여행」은 찬찬히 오래도록 음미하는 맛과 멋을 알게 해준 작품이다.

▲ Vladimir Kush, 「은유의 여행 Metaphorical Journey」 37x94 inches ⓒU.H.M.Gallery 단해기념관

처음 이 작품은 피곤과 두통을 치유해주는 휴식 정도로 만났다. 추풍령 산속 160평의 저온저장고를 리모델링 해서 갤러리를 만드는 기획이 구체화되기 시작했을 때, 비전이 있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나듯, 시골 산속에서 예술의 오아시스를 만나게 하고픈 바람은 분명했다. 뜻이야 아름다웠지만 망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미술, 갤러리, 전시회, 작품해설… 어느 하나 낯설지 않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첫 전시회 작가를 쿠쉬로 정해 오픈을 준비하면서, 지치고 힘들 때면, 은유의 여행 앞에 서서 가만히 바라봤다. 구름 가득한 바다 풍경이 마음에 맑은 바람 불어주었기 때문이다.

푸른 바다 풍경을 음미하며 쉼을 누리는 맛, 그러나 작품해설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게다가 쿠쉬 작품을 연구해보니 「은유의 여행」에는 대략 열 개 정도의 작품이 들어 있었다. 앞서 소개한 「날개를 단 배의 출항」이 가운데 있다. 오른쪽 끝에는 「라만차의 동물 Fauna in La Mancha」이 풍차의 날개가 된 나비와 그 나비를 잡으려는 사람을 보여준다. 왼쪽 끝에는 건물에 묶인 셔츠가 휘날리는 작품 「바람」이 있다. 그 사이사이에 다른 작품들이 이어지며 긴 서사시가 펼쳐진다.

이 가운데 한 작품만 설명하기도 벅찬 상황에 열 개 이상이 엮인 작품이라니 망막하기만 했다. 처음에는 개별 작품을 연구해서 전체적인 흐름과 분위기를 설명하는 정도로 준비했다. 다행히 자주 음미하고 나눌 수 있었다. 쉴 때마다 그 앞에서 서는 일이 많은데다가 여러 관람객과도 함께 이야기를 나누곤 하였다. 여러 사람과 나눈 느낌과 생각이 내면에 쌓이기 시작했다. 다른 것 같지만 서로 공명하는 그 파편들이 내면에서 점차 하나의 긴 서사시로 제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어느덧 살아있는 하나의 이야기로 숨쉬기 시작했다. 이제 그 이야기를 풀어가려 한다.

세로 240cm에 달하는 이 작품은 한눈에 전체를 볼 때, 왼편 육지와 나머지 오른편의 분위기가 대비된다. 가운데 바다에는 나비의 날개를 단 배가 자유롭게 항해를 하고 있다. 앞서 「날개를 단 배의 출항」이라는 작품을 소개하면서 언급하였듯이, 나비는 영혼을 상징한다. 영혼의 그리스어 프쉬케Psyche에는 나비라는 뜻도 있다. 영혼의 날개를 단 자유로운 항해, 바람이 없어도, 맞바람이 불어와도 자유로이 나아가는 항해다.

배가 향하는 곳에는 구름이 거북이의 등에 비를 내리고 있다. 거북이 등 위에는 비를 맞으며 춤추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쿠쉬의 작품 「Rain」이 변형된 풍경이다. 「Rain」은 골고다의 언덕을 은유한 작품이다. 인간의 몸으로 내려온 하나님,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과 한 몸 된 모습으로 골고다 언덕에서 계시된다. 십자가 위의 성육신, 하나님 사랑의 절정을 하늘이 비를 타고 땅을 만나는 합일로 표현한다. 천지의 합일에 사람들이 흠뻑 젖어드는 모습으로 은유한다.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는 가장 아프면서 가장 아름다운 자리가 아닌가. 그래서인지 비에 젖는 사람들을 보는 사람마다 그 느낌이 엇갈린다. 기쁜 듯, 슬퍼 보이기도 하고, 슬픈 듯 기뻐 보이기도 한다.

▲ Vladimir Kush, 「Rain」, 「은유의 여행」 일부분

그 오른쪽, 화면 맨 끝에는 육지에 풍차가 보인다. 날개가 나비인 풍차다. 그 나비를 잡으려고 잠자리채를 든 사람이 그 앞에 서있다. 라만차의 돈키호테를 풍자한 이 작품 역시 바람에 끌려가는 풍차가 아니라 바람을 일으키는 영혼을 보여준다. 생명의 바람을 일으키는 영혼의 아름다움에 매혹돼 붙잡으려는 사람의 모습이다. 그 위쪽 하늘에는 구름을 열기구 삼아 날아가는 사람이 보인다.

영혼의 날개를 단 배의 자유로운 항해,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 됨에 젖어드는 춤, 생명의 바람을 일으키는 영혼의 날개… 이 모든 풍경이 하나로 어우러져 영혼의 자유와 합일과 충만함을 보여주고 있다.

왼편 육지는 그러나 다른 분위기가 펼쳐진다. 바다에서 배를 끌어올리는 한 사람, 배는 거대한 물고기가 가득하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서 만선의 기쁨을 읽어낼 수 없다. 시커먼 흑암으로 묘사된 온 몸은 무겁고 어둡게만 보인다. 어느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이 그 사람이 슬프고 외로운 이유를 설명해줬다.

“저 사람에게는 친구가 없어요. 저렇게 큰 물고기를 잡았을 때, 친구가 있다면, 저 뒤 해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서 자랑하며 함께 즐거워했을 거예요. 그런데 그런 친구가 없어서 혼자 무겁게 끌고 가는 거예요. 그래서 큰 물고기를 잡아도 기쁘지 않고 우울하기만 해요.” 충분히 그럴 법하고 마음에 와 닿는 설명이었다. 어떤 이유가 보이든, 거대한 성취도 마음을 채우지 못하는 인생의 단면만은 분명히 드러난다.

해변을 살펴보면, 사람을 달팽이로 묘사했다. 달팽이집을 이고 가는 사람들, 그 모습은 이 땅의 삶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자신을 안락하고 안전하게 보호해줄 집을 구한다. 평생 일만해도 다 갚지 못할 빚을 지고, 그 집값에 짓눌려 느릿느릿 살아간다. 집만 그럴까. 학벌, 직장, 재물, 명예, 권력, 인기… 자신을 안전하게 보호해주리라 믿는 그 무엇인가를 짊어지고 살아가지 않던가. 아니 그 무엇에 짓눌려, 그것에 갇혀 죽어가지 않던가.

달팽이 인생은 그래도 낫다. 해변 한 가운데 소라는 더욱 더 애틋하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저 소라껍질로만 보인다. 그러나 찬찬히 살펴보면, 남자와 여자의 포옹이다. 원형으로 말려 올라가는 소라껍질의 곡선이 서로 꼭 안아 하나 된 포옹이다.

애틋함이 절절히 느껴지는 이유는, 껍질뿐이기 때문이다. 달팽이 인생은 움직일 수라도 있다. 그러나 소라껍질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껍질뿐이어서 할 수 있는 것도, 갈 수 있는 곳도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 아무것도 줄 수 없는 한계 그 속에서 서로를 꼭 끌어안는 체온으로 견디고 있다. 살다보면, 목숨보다 더 사랑하지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렇게 껍질뿐인 무력함에 직면해도, 서로를 향한 사랑은 오히려 더 절절하다. 그래서 소라의 중심이 붉게 타오르고 있다.

▲ Vladimir Kush, 「shell」 ⓒU.H.M.Gallery 단해기념관

달팽이 인생과 소라의 포옹 뒤쪽에는 하얀 건물에 휘날리는 파란 셔츠가 보인다. 건물 주변에는 일하다가 바다 쪽을 바라보고 손가락질하기도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들 모두 저 너머 바다의 삶을 동경하는 듯하다. 달팽이 같고 소라껍질 같은 삶, 큰 물고기를 잡아도 검게 죽어가는 삶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건물에 갇혀 일한다. 건물에 걸린 시계는 일을 재촉한다. 노동자의 셔츠는 바람에 날려 저 바다를 향해 펄럭이고 있다. 영혼의 날갯짓으로 자유로이 항해하는 바다,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 된 기쁨을 향해 펄럭인다. 그러나 건물에 묶이고 갇혀 펄럭이기만 할 뿐 풀려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대비되는 두 풍경을 바라보면, 물음이 솟아오른다. 길은 없는가? 해변에 펼쳐진, 고통에 짓눌린 삶이 자유로운 항해와 합일로 나아갈 길은 없는가? 무력감과 묶임과 짓눌림의 삶으로부터 영혼의 자유와 합일과 아름다움으로 건너갈 길은 없는가? 쿠쉬는 「은유의 여행」에 그 길의 힌트를 숨겨뒀다. 해변과 바다 사이에 거대한 흐름이 보인다. 고통의 해변에서 자유의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구름이 길을 보여준다.

그 길에는 세 가지 관문이 있다. 나무와 사자와 양이다. 뿐만 아니라 이 작품에는 그것 이외에도 반전이 숨어있다. 그 모든 이야기는 한 호흡 쉬었다가 다음 글에서 다시 펼치려 한다. 다시 한 번 긴 호흡이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기까지에서 갈무리해야할 알짬이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 결론 부분으로 넘어가기 전에 다시 한 번 작품 전체를 바라보자.

무엇이 보이는가? 그저 해변과 바다 풍경만 보이는가? 아마도 더 이상 단순한 바다 풍경일 수만은 없으리라. 제목 그대로 「은유의 여행」에 눈이 열리기 시작했다면 말이다. 배, 나비, 구름, 비, 달팽이, 소라… 이 모든 것이 여전히 평범한 사물로만 보이는가? 수많은 의미를 품고 있는 상징으로, 기호로, 의미로 보이지 않는가. 오래도록 곱씹고 또 곱씹을 퀴즈로, 동화책으로 보이지 않는가. 자신만의 이야기를 풀어나갈 삽화로 보이지 않는가.

「은유의 여행」을 음미하고 또 음미하다가 눈을 돌려 세상을 본다. 어느 날 문득 벽에 붙은 거미를 손으로 상상하게 되었다. 그렇게 눈에 들어오는 사물, 사건, 사람… 그 모든 익숙한 것들이 새롭게 보였다. 은유와 상징과 기호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사물, 사건, 자연, 사람… 그 모든 것은 언어가 아닌가. 어떤 차를 타고, 어떤 집에 살고, 무엇을 먹고, 어떤 제품을 사용하고… 그 모든 몸짓은 특정한 의미를 선택하여 말하는 언어행위다. 그렇다고 알면서도 잊고 살았을 뿐이다. 쿠쉬의 작품은 단지 그렇다고만 말하지 않고, 그것을 보여준다. 은유의 언어를 보여주고 세상을 그렇게 보는 눈을 열어준다.

쿠쉬는 자기 작품세계를 “은유적 사실주의”(Metaphorical Realism)라 이름 할 만큼 은유를 중시한다. 그는 “은유의 거울에 세상을 비춰 보여주는 것, 그것이 예술가의 목표”(vladimirkush.com)라고 강조한다. 일상 속 모든 사물과 사건, 그 익숙함 속에서 새로움과 의외성을 발견하는 눈을 뜨게 하는 것이다. 세상 전체를 은유로 읽는 눈, 낯설지 않다. 특히 기독교인에게는 더욱 그렇다. 예수님께서 이미 이천 년 전에 하신 일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주로 은유로, 비유로 가르치셨다. 돈, 촛불, 소금, 포도열매, 포도나무, 씨앗, 누룩, 양, 염소, 목자, 백합화, 새… 일상 도처에 흔한 것을 통해 하나님 뜻을 드러내셨다. 쉽게 가르치시려고? 예수님의 비유가 정말 쉬운가? 하나님 말씀의 일상성을 보여주신 것은 아닐까? 쿠쉬 작품을 보고 나서 일상 속 사물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하듯,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나면 일상 모든 것이 하나님 말씀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경전에서만, 랍비의 가르침에서만 만나던 하나님 말씀이 온 세상에 가득했으리라. 특히나 저자거리, 과수원, 들판, 부엌 같이 지극히 평범한 일상 도처에서 도드라졌으리라.

한국 개신교회는 어떤가? 신구약 성경만이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는 하나님 말씀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대형교회 목사나 유명 부흥사의 설교, 혹은 베스트셀러 작가의 책, 감동적으로 연출된 예배에서 하나님 말씀을 듣는다. 유럽의 어느 교회처럼 동양경전을 설교 본문으로 삼는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될 불경이다. 예수님께서 일상 모든 곳, 모든 존재를 통해 들을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 말씀을 성경과 예배, 그것도 대형교회나 소위 감동적이라는 예배 안에 가둬버린 형국이다. 그러면 오직 성경만이 진리라고 믿는 일상은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 말씀을 들을 귀가 사라진 일상, 하나님 말씀이 제거된 일상은 어떤가?

한 가지 예를 생각해본다. 유럽에서 기후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제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다는 절박함이다. 어떤 지인은 비건 식단을 선택해 도시락을 가지고 다니고, 비건베이커리를 오픈했다. 그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그러나 이웃과 생명을, 다음세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후 붕괴에 저항한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믿고, 문자 그대로 칠일 동안 창조하셨다고 굳게 믿는 기독교신앙, 그런데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무엇을 사용하던가? 만일 기후 붕괴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문자 그대로 믿는 창조신앙은 무슨 의미일까? 말이 사라진다면, 몸짓만으로 본다면, 누가 하나님을 믿고 피조세계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보일까.

창조신앙을 철저히 믿어도 그의 의식주가 온 생명의 고통에 무심하다면, 그의 음식과 옷과 자동차와 일상은 다른 말을 하고 있다.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는 성경말씀, 그대로 믿는 믿음은 일상에서 아무 의미 없는 일이야. 신앙은 머릿속의 일일뿐 몸짓이나 일상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 이것이 일상 모든 것을 통해 말하고 있는 내용이다. 신앙인의 말보다 손이 더 분명한 은유로 말하고 있다. 쿠쉬 작품 속에만 은유의 언어가 담긴 게 아니다. 쿠쉬는 일상의 은유성을 드러내줬을 뿐이다. 예수님께서도 이미 비유를 통해 들을 귀를 열어주셨으니, 주님 비유뿐 아니라 일상의 모든 행동도 들을 귀에게는 비유고 말이다.

먹방이 대세인 시대, 맛집이라면 새벽부터 줄을 서 몇 시간을 기다리고, 시골 마을에도 긴 줄이 선다. 예쁜 음식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는 게 이젠 일반화 되었다. 덧없는 물음이 떠오른다. ‘맛난 음식을 먹으면 맛있는 인생, 예쁜 음식을 먹으면 예쁜 인생일까?’ 물론 힘겨운 삶에 활력소가 될 소소한 재미이자 놀이이다. 거기에 인생의 무게를 묻는 것은 과해 보인다. 정치적 갈등이 극에 달하지만 해결의 길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 해도 더 이상 미래가 보이지 않는 비관적인 시절이다. 그러니 거대담론의 허상과 무력함에 신물이 날 수밖에 없다. 지금 당장 작은 즐거움에라도 기대고픈 마음이 왜 공감되지 않을까. 그러나 그렇게만 볼 수 없는 이유는 소소함 속에 깃드는 의미 때문이다.

의도하지 않아도 소비를 통해 말하게 된다. 그 말이 성공과 실패, 권력과 재력, 혹은 SNS의 좋아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치중립, 정치중립은 환상이자 자기기만일 뿐이다. 결국 생명을 살리고 죽이는 선택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는지 아닌지도, 하나님께서 진정 사랑하시는지 아닌지도 의미한다. 모든 신앙과 비신앙은 말 이전에 몸짓 은유로 전도하고 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고 하셨다. 맞다. 그러나 어떤 것을 입에 넣는지가 세상을 파괴하기도 한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씀 앞에 귀를 기울인다. 오늘 아침 식탁, 입고 있는 옷… 일상의 소비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귀를 기울인다. 예수님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유이시듯, 신앙의 일상 역시 하나님의 은유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가장 진실하고 가장 강력한 은유 아닌가.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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