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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이 파괴하지 못하도록

기사승인 2019.12.04  18: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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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결 (2)

문: 그렇지만 네 눈을 뽑으라든가 네 팔을 찍어버리라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설마 문자 그대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예수께서 그처럼 엄격하신 것은 아니지 않은가?

답: 예수께서 의미하신 것은 문자 그대로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엄격한 것이다! 대체적으로 그렇듯이 여기서도 문자대로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쉬울 수도 있을 것이다. 엄격함에 관해서 말한다면 치료를 위해서 깊이 도려내는 의사의 엄격함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욕망이 인간을 지배한다면 욕망은 인간의 육체와 영혼의 지옥이 되고 따라서 욕망의 가장 깊은 뿌리까지 가차없이 도려내야 할 것이며, 만약 가장 좋아하는 것이 유혹을 하고 그것 때문에 “분노”를 하게 된다면 그 가장 좋아하는 것은 희생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치유를 위한 수술이다. 예수의 엄격함은 온화함이다. 그것이 사람을 살린다. 맹목적인 율법의 단호함은 오로지 고뇌와 위선을 낳을 뿐이며 욕망을 강화시킬 뿐이다. 단지 하나님을 공경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이 욕망을 가라앉히고 그것의 뿌리를 파괴한다. 그렇게 해보라!

문: 그러면 우리는 이 점에서 부족한 사람들을 엄격하게 심판하고 정죄해야만 하는가?

답: 우리는 죄에 대한 원칙적인 단호함과 죄인에 대한 혹독한 심판을 혼돈해서는 안 된다. 오로지 율법에서 나온, 심히 위선에 사로잡힌 생각이나 광적으로 남을 헐뜯기 좋아하는 것이요, 자기 자신에 대한 참된 엄격함이란 바로 온화함에 있는 것이다. 바리세인들은 간음한 여인을 정죄했으나 성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고 그 여자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다. (요한복음 8장 1절 이하 참조)

또한 예수께서는 성적인 문제에 대해서 매우 진지하게 비난했음에도 불구하고 육적인 죄는 영적인 죄보다 덜 사악한 것으로 보셨고, 청녀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보다도 하나님 나라에 가깝다고 본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인데 일반적인 기독교 신앙은 이것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문: 하지만 예수의 엄격함으로 인해 남녀관계에 있어서도 걱정에 사로잡혀 자유롭지 못한 정신이 나타나지 않을까?

답: 그 반대다. 율법은 부자유하게 하고 욕망을 일으키고 위선으로 이끌지만 하나님에게서는 자유함이 나온다. 이 자유가 욕망을 몰아내고 남녀관계를 순수하고 참되게 만든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고린도후서 3장 19절) 남녀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문: 일부일처제만이 유일하신 하나님과 상응하는 것이고 모든 방종한 탐욕을 쫓아낸다. 그러면 일부일처제는 이혼도 배제하는가?

답: 근본적으로는 그렇다. 온전한 결혼에 특유한 것은 영원함이다. 온전한 결혼은 영원한 것이다. 그래야만 결혼은 성례전인 것이다.

▲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는 드러나야 한다. ⓒGetty Image

문: 그렇다면 재혼 역시 배제되어 있다는 말인가?

답: 근본적으로는 그렇다. 결혼이란 한 분이신 하나님 앞에서의 엄격한 일부일처제인 것이다.

문: 그렇다면 가톨릭교회가 이혼을 금지한 것이 옳다는 것인가?

답: 가톨릭교회는 그 나름대로 옳다.

문: 그러면 다른 방식도 있다는 것인가?

답: 개신교적 방식도 있다.

문: 개신교적 방식은 어느 점에서 옳은가?

답: 늘 그렇듯이 개신교적 방식은 가톨릭적 진리 대신에 하나님의 자녀들의 자유라는 개신교적 특징을 내세운다. 다른 말로 하면, 율법의 완성으로 율법을 위한 율법일 뿐인 것을 대신한다.

문: 그것은 무슨 뜻인가?

답: 결혼이란 것은 법적 형식만으로서는 아직 결혼이라고 할 수 없다! 결혼은 완성된 어떤 것이 아니다. 주님이시오,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피조물을 계속 이끌어 주시고 구원하신다. 경우에 따라서는 한번 결혼한 것이 결혼이라고 할 수 없을 때도 있다. 그럴 때에 그 결혼은 지속하는 것보다 파기하는 것이 더 낫다. 예수 자신은 간음을 이혼 사유로 간주했다. 인간의 완악함이 하나님의 법을 깨뜨린다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마태복음 19장 3-12절 참조) 바로 그 예수의 말씀에 의하면 간음은 너무 한정된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고 이혼도 따라서 더 넓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가 인정되어야 한다. 그와 동시에 새로 결혼하는 것도 당연히 인정되어야만 한다.

문: 도대체 누가 옳은 것인가? 가톨릭의 견해인가 개신교의 견해인가?

답: 둘 다 옳다. 하지만 가톨릭의 견해는 (그 방식 상) 이상적이다. 그것은 다시 보다 세밀하게 밝혀져야만 한다. 일부일처제는 가톨릭적 이해를 넘어서는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 성례전으로써 새롭게 강조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일부일처제의 완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자유 속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

문: 어떻게 그런 성취가 가능한가?

답: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해 그런 성취가 가능하다. 인용된 부분을 보면 “모세는 이혼을 해도 좋지만 …,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원칙적으로 단지 엄격한 일부일처제가 있을 뿐이다. 인간의 “완악함”으로 인해 다르게 변한 것이다. 구원은 인간을 높임으로써 “그 처음”으로 다시 데리고 간다. 여자와 남자는 하나님께서 다시 새롭게 해주신 피조물의 영광 속에서 결혼을 찬미해야 한다.

문: 남자와 여자가 단지 하나가 되어야 그것이 가능한가?

답: 그렇다. 단지 하나가 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고 그것을 위해서 남녀가 창조되어진 것이다.

문: 그렇다면 그것은 오로지 결혼으로써만 가능한가?

답: 결코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선천적인 피조물의 속박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 여자와 남자는 결혼하지 않고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으며 상황에 따라서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만 한다. 예수의 말씀에도 마치 그 자신이 하늘나라를 위해서 결혼하지 않았듯이 “하늘나라를 위해 스스로 결혼하지 않은” 사람도 있다. 순결성은 여전히 고상한 이상이다. 이것은 마치 오로지 결혼에서만 남자와 여자의 완성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을 교정해 준다.

문: 그렇다면 그런 이상은 추구되어져야만 하고 결혼하지 않는 것이 결혼하는 것보다 더 고상한 것인가?

답: 결혼하지 않는 것을 추구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것은 소명이나 운명으로서 용인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삶의 특별한 경지와 기쁨을 의미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섬기기 위한 특별한 자유를 준다. 그것은 특별하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기꺼이, 정말 기쁘게, 그렇게 존재함으로써 오직 하나님에게만 그 남녀가 속해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며 그런 까닭에 그들의 최상의 자유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주 당당한 것이다.

문: 그러나 그들은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섬기고 영화롭게 해야만 하지 않는가?

답: 물론이다. 그러나 하나가 된다는 것이 꼭 결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특별히 가능한 우정도 둘이 하나가 되지 않고서 하나님을 섬기는 한 방식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적인 의미, 즉 여자는 여자로서, 남자는 남자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여자와 남자, 각자가 독신인 자신의 방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그 때문에 바로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남녀의 온전한 관계를 고양하고 신성하게 할 수 있다. 또한 모든 남녀에게, 결혼한 사람들에게도 그러한 순결성의 요소는 특유하게 존재한다. 성모 마리아는 이에 대한 최고의 상징이다. 그렇듯 예수에 의해서 예시되고 요구된 남녀관계는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자유와 영광 속에 빛나고 있다.

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결혼이나 결혼하지 않는 것으로만 표현되어야 하는가?

답: 물론 당연히 그렇지 않다. 만약 그것이 우리의 전반적인 삶 속에서 표현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여자와 남자 그리고 그 관계의 고상함과 품위는 모든 개인생활과 사회생활에서 빛을 발해야 하고 하나님 나라를 목표로 하는 인간 존재의 변화의 대원칙이어야 한다. 즉 새로운 의로써, 하나님 나라의 모범이요, 그것을 위한 운동으로써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 여성의 권리는 어떻게 생각해야만 하는가?

답: 여자의 동등한 권리는 바로 이와 같은 맥락에 속한다. 모든 욕망 속에 기본 요소로서 존재하는 매춘은 여자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가장 끔찍한 표현인데, 그것은 어재가 열등한 권리를 가진 존재로 인격적 존재가 아니라 사물로 보이게 하는 원인이요, 또 그 결과이기도 하다.

문: 순결에 대해서 언급된 것은 단지 남녀관계에만 적용되는가?

답: 아주 중요한 언급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하나의 예일 뿐이다. 그것은 모든 삶에 적용된다. 우상이 아니라 주님이시며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중요한 곳에서는 어디에나 순결함이 있다. 또한 허영심, 이기심, 명예욕, 질투심, 거짓 선전 등과는 반대로 겸손하고 공평무사하며 객관적인 태도는 언제 울타리에 불과한 것일 뿐인 법률로부터-그것이 종교적 율법이든 민법이든 간에-나오지 않고 주님이시며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부터만 나온다. 의사의 엄격함은 언제나 뿌리까지 가차 없이 도려내야 한다. 즉 유한한 것을 무한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탐하는 욕심과 명예, 권력, 향락, 금전에 대한 탐욕을 도려내야 한다. 속세에 대한 탐욕은 늘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과 충만함으로 진정되어야 한다. 우상들은 언제나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인해 전복되어야 한다. 우상들의 유혹은 언제나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사랑으로 말미암하 꺾어져야 한다. 잘못된 목적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려는 노력을 통해 물리쳐 버려야 한다. 그렇게 해서 늘 순결함이 싹트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순결의 가장 중요하고 근본이 되는 것은 진실이다.

레온하르트 라가츠/신요섭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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