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인생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기사승인 2019.11.10  15:59:25

공유
default_news_ad1

- 생명은 Y일름을 따르는 몸사름-다석 생명사상의 영성적 차원 (5)

다석은 ‘사이에 있는’ 인간을 그 사이에 따라 네 가지 차원으로 구별하여 다룰 수 있다고 본다. 빔-사이를 차지하고 있는 몸으로서의 ‘몸나’는 나의 전부가 아니다. 사람-사이를 오고가는 마음으로서의 ‘맘나’도 나의 전부가 아니다. 시간 속에 살며 때-사이를 잇고 있는 역사적 주체로서의 ‘제나[뜻나]’도 나의 전부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하늘과 땅 사이를 잇고 있는 ‘얼나’로서의 나가 참나다. 얼로서의 나가 우주의 얼인 ‘한얼’과 서로 통하기 때문이다. 다석은 노장사상과 무속종교가 너무 몸나에만 관심을 보였다면, 불교는 너무 맘나에만 치중하였고, 유교는 너무 맘나의 공동체인 ‘가(家)’에만 신경을 쏟았고, 기독교는 종말론적인 역사관 속에서 제나의 구원에만 유의하였다고 지적한다.

얼나의 하루살이

다석은 이 모든 ‘나’의 차원들을 나름대로 다 살리면서 궁극적인 참나인 ‘얼나’로서의 삶에 정진하여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몸을 건강하게 보존하며 ‘몸성히’, 마음을 놓아보내며 ‘맘놓이’, 자신의 속알[바탈]속에 새겨진 하느님의 뜻을 찾아 그 뜻을 태우며 [= 바탈태우, 뜻태우]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온 우주, 모든 빔, 모든 사이 속에 없이 계시며 모든 생성소멸과 변화를 주재하는 하느님의 성령인 한얼과 소통하여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을 살리고 섬기며, 자신을 나누며 비우는 우주적 ‘살림살이’를 사는 우주인이 될 것을 다석은 우리에게 조용하게 이른다.

하늘의 뜻을 이루며 살아야 하는 ‘얼나’는 ‘바탈태우’의 삶을 살아야 한다. 내 안에 주어져 있는 뜻(바탈), 속알을 태워야 하는 것이다. 나 혼자만 잘 살자고 할 것이 아니라 가족, 사회, 국가라는 공동체를 위해서,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인류문화와 세계평화, 지구와 우주를 위해서 내가 받은 바탈과 속알, 내 안에 새겨져 있는 깔, 꼴, 결을 찾아 태워서 모든 공동체가 한얼을 품을 수 있도록 살라는 것이다.(1)

무한 경쟁 속에 무한 소유를 부추기며 무한 소비를 조장하면서 욕망을 고무풍선처럼 한없이 키우고 있는 현대인에게 하나뿐인 삶의 터전인 지구가 쓰레기통과 도살장으로 변해가고 있다. 우리 인간이 다석의 가르침처럼 얼나로서 살림, 섬김, 비움, 나눔의 우주적 살림살이에 동참한다면 이 지구는 아직 희망이 있다.

얼숨으로 살아야 하는 삶은 ‘하루살이 삶’이다. 그러한 삶을 대표적으로 산 사람이 바로 다석이다. 다석은 자신의 나이를 몇 살이라 표기하지 않고 몇 날을 살았는가 날수를 세어 말하였다. ‘하루살이’는 말 그대로 하루를 사는 살이를 말한다.

다석은 칠성판에서 자고, 먹고, 읽고, 사색하고 사람들을 맞으며 생활하였다. 새벽에 칠성판에서 일어나 하느님께 하루를 새로 주심에 대해 감사드리고 냉수마찰을 하였다. 다시 그 칠성판 위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가부좌를 하고 동서양의 경전들을 읽으며 사색하였다.

그리고 저녁 한 끼니만을 들었다. 다석(多夕)이라는 호도 그저 많은 저녁이라는 의미다. “나의 저녁은 그저 많을 뿐이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저녁은 영원하다.” 밤이 되면 다시 칠성판에 누우면서 “이제 나는 우주와 하나가 된다”며 죽음을 맞이하는 마음으로 다석은 잠자리에 들었다.

다석은 예순다섯이 되던 해에 “나는 내년에 죽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선생님의 말씀도 제대로 적어놓은 것이 없는데 돌아가신다니 이 무슨 청천벼락 같은 말씀이냐며 속기사를 동원하여 다석의 강의를 기록하도록 시킨다. 이렇게 하여 다석어록이 나왔다. 그렇게 해서 나온 책이 『죽음에 생명을, 절망에 희망을』이라는 책이다.(2) 이것이 다석의 유일한 강의록이다.

▲ 참나를 찾지 못한 인생들이 소비사회를 부추기며 생명을 파괴시키고 있다. ⓒGetty Image

그런데 1년이 지났는데도 다석이 살아있으므로 사람들이 놀라서 물었다. 다석은 “나는 이미 몸으로는 죽었다. 그리하여 하루하루를 산다”고 하였다. 사람들이 그의 말뜻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던 것이다. 일년 뒤의 삶은 목숨이 아닌 얼숨을 의미한 것이었다.

다석은 하루를 ‘할우’라 표기하기도 하였다. ‘할’은 무엇을 할 것임을 말하고 ‘우’는 ‘위’를 가리킨다. 우리의 하루는 끊임없이 한얼에게로 올라가는 ‘할우’가 되어야 하는 그런 하루살이를 위한 ‘하루’인 것이다. 다른 말로 그것은 얼생명을 사는 ‘얼살이’다.

식사는 장사며 제사

다석은 얼나로서 얼살이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었다. 탐욕과 성냄 그리고 음욕이라는 세 가지 못된 욕망의 뿌리를 근원부터 뽑아버리고 하루 한 끼만 먹으며 25년간의 결혼(結婚)을 해혼(解婚)으로 풀고, 40여 년간 금욕생활을 한다. 여기서 우리는 식사에 대한 그의 생각이 독특하고 오늘날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기에 그것만을 좀더 살펴보기로 한다.

다석은 “식사(食事)는 장사(葬事)다”라는 충격적인 말을 하였다.(3) 우리가 먹는 음식은 ― 그것이 동물이냐 식물이냐의 차이는 있지만 ― 모두 생명체다. 우리 자신이 살기 위해서 먹는 식사라는 것이 다른 생명체들의 죽음이라는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따지고 보면 매 끼니가 장례식인 것이다. 내가 살기 위해서 나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죽이고 있다. 그러기에 다석은 “식사는 장사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모든 생명체가 이 지구 위에서 평화롭게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장례식을 될 수록 적게 지내야 한다.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다석은 하루 한 끼니만[일일일식(一日一食)] 들었다. 그러면서도 다석(1890〜1981)은 91세까지 장수하였다.

하루 한 끼니만 먹을 때 나머지 두 끼니때 나는 내 몸과 내 살을 먹는 셈이 된다. 그것은 내 몸을 제물로 바치는 산 제사나 다를 바 없다. 그래서 다석은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극치는 하루에 한 끼씩 먹는 일이다. 그것은 정신이 육체를 먹는 일이며 내 몸으로 산 제사를 지내는 일이기 때문이다.”(4)

더 나아가 다석은 식사가 곧 제사라고 말한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으면 그것이 피가 되고 그 피는 뜻이 있어서 위로 올라가니, 향불 모양으로 사상을 피워 올리는 것을 먹고 사는 것이 사실이다.”(5)

“밥 먹고 자지 말고, 밥 먹고 깨어나도록 밥을 먹어야 한다. 밥은 제물(祭物)이다. 바울은 너희 몸은 하느님의 성전이라고 한다. 우리 몸이 하느님의 성전일 줄 아는 사람만이 능히 밥을 먹을 수 있다. 밥은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이기 때문이다. 내가 먹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다. 내 속에 계시는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밥을 먹는다는 것은 예배요, 미사다. 내가 먹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제물을 도적질하는 것이다.”(6)

다석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밥을 먹어야 한다고 말한다. 예수는 십자가에 자기를 바쳤는데, 이때 ‘바쳤다’는 말은 밥이 되었다는 말이다. 밥이 되었다는 말은 밥을 지을 수 있는 쌀이 되었다는 의미다. 쌀이 되었다는 말은 다 익었다는 것이다. 성숙하여 무르익은 열매가 된 것이다.

인생은 무엇인가? 무르익는 것이다. 제물이 되는 것이다. 밥이 되는 것이다. 밥이 될 수 있는 사람만이 밥을 먹을 자격이 있다. 완전한 사람, 성숙한 사람이 아니고는 밥을 먹을 자격이 없다.(7)

다석에 의하면 인생의 목적은 제물이 되는 것이다. 인생이 밥을 먹는 것은 자격이 있어서도 아니고 내 힘으로 먹는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은혜로, 수많은 사람의 덕으로, 대자연의 공로로 주어져서 먹는 것이다. 밥이 되기까지에는 태양빛과 바다의 물과 그 밖의 온갖 신비가 총동원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밥은 우리가 거저 받는 하느님의 선물인 줄로 알아야 한다.

인생뿐만 아니라 일체가 하느님에게 바쳐지기 위한 제물이다. 일체가 밥이다. 다석은 인생이란 밥을 통해 우주와 세상이 얻는 영양은 무엇일까 묻는다. 그것은 곧 말씀이라고 답한다. 인생이란 밥에는 말씀이 있다. 성령의 말씀이 있다. 온 인류를 살리는 우주의 힘이 되는 성령의 말씀이 있다.(8)

다석에 의하면 인생은 짐승처럼 자기의 육체를 바치는 밥이 아니다. 인생은 밥을 먹고 육체를 기르고, 이 육체 속에 다시 성령의 말씀이 영글어 정신적인 밥인 말씀을 내놓을 수 있는 그런 존재다. 인생이 제물이 되는 것은 육체적 제물이 아니다. 영적인 제물이다. 인생이 제물이 되는 것은 말씀이지 목숨이 아니다. 목숨은 껍데기요, 말씀이 속알이다.

미주

(미주 1) 김흥호는 이렇게 풀이한다. “나는 이어 이어 예 한 점이 내가 아닐까. 이 한 점에 힘이 붙고 능력이 붙고 수가 생겨 몸성히 마음놓이 이것이 내가 아닐까. 마음이 놓일 때 마음은 비어 진리를 담을 그릇이 준비되고 몸성히 불이 될 때 몸은 살아 임을 그리워하게 된다. 목숨 쉼은 불사름이요, 말씀 쉬면 물 씻음이니 깨끗하게 비고 아름답게 태워서 새로운 바탈을 내놓음이 숨쉬는 한 목숨이요, 영원히 이어나갈 이 목숨이기에 맘 비고 몸성히 숨쉬는 한 목숨이다. 나의 바탈을 비고 비어 참을 그리는 것인데 몬으로 지어 먼지가 되면 흙덩이처럼 가득 차 새로운 바탈을 내지 못하고 힘도 없고 수도 없어 숨도 못 쉬는 흙덩이가 되고 만다.” 류영모, 『제소리. 다석 류영모 강의록』, 57.
(미주 2) 류영모, 『씨알의 메아리. 다석어록. 죽음에 생명을 절망에 희망을』, 박영호 편, 홍익재, 1993. 이 강의록은 다석학회에 의해서 새롭게 수정 보완되어 출간되었다. 참조 류영모, 『다석강의』, 다석학회 엮음, 현암사, 2006.
(미주 3) 다석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입이란 열린 무덤이다. 식물, 동물의 시체가 들어가는 문이다. 식사(食事)는 장사(葬事)다.” 류영모, 『다석어록』, 355.
(미주 4) 류영모, 『다석어록』, 52.
(미주 5) 류영모, 같은 책, 91.
(미주 6) 류영모, 같은 책, 186.
(미주 7) 참조. 류영모, 같은 책, 187.
(미주 8) 참조. 류영모, 같은 책, 188.

이기상 명예교수(한국외대) saemom@chol.com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