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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들에도 봄은 온다

기사승인 2019.10.15  16:3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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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을 빼앗기지는 말자(렘29:1, 4-7; 딤후 2:8-15; 눅 17:11-19)

< 1 >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시인 이상화(1901-1943)가 1926년 ‘개벽’지에 발표한 시(詩)입니다. 이 시 때문에, 1920년 6월 창간호부터 압수를 당하던 ‘개벽’지는 창간 6년 만에 폐간 당했습니다. 1922년 파리 유학을 목적으로 동경에서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다가 동경대지진을 겪고 귀국하여, ‘백조’ 동인으로 문단활동을 시작한 이상화는 그러나 시인만이 아니었습니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대구 학생봉기를 주도하였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한 그는, 1925년 8월,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고, 1927년에는 의열단(義烈團) 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되기도 했습니다. 1937년 3월에는 장군인 형 이상정을 만나러 만경(滿京)에 3개월간 갔다 와서 일본관헌에게 구금되었다가 11월 말경 석방, 그 뒤 3년간 대구 교남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지만, 그의 나이 40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독서와 연구에 몰두하다가, 43살의 나이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식민지 시대, 암울한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이 선택한 혹은 선택을 강요당한 삶의 형태는 여러 가지였습니다. 역사에 가정이란 있을 수 없다지만, 만일 우리가 그 시대를 살았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았을까 생각하는 것은 그렇게 의미 없는 일만은 아닐 것입니다.

식민지 시대 지식인이었던 이상화는 시인의 삶을 선택했고, 우리에게 이 시를 남겼습니다. 시인은 ‘지금은 남의 땅이 되었으나, 하늘과 들이 맞붙은 곳까지 이르던 조국의 들녘을 마치 꿈꾸듯이 거닐고 있습니다. 종달이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게 웃고, 잘 자란 보리밭은 삼단 같은 머리털 같은 곳, 마른 논을 안고 도는 도랑에 흐르는 물은 마치 젖먹이 달래는 노래 같고, 발목이 시리도록 밟고 싶은 부드러운 흙으로 덮인 고향이, 지금은 남의 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무엇을 찾는지, 어디로 가야할지 모른 채, 강가에 서 있는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땅을 빼앗긴 나라는 아예 봄마저 빼앗겼는지’ 일제의 식민지배는 끝날 것 같지 않습니다.

시대의 어둠만큼이나 그의 절망도 깊어지고, 절망은 그의 시의 원천이었고, 오지 않는 봄을 기다리던 그의 몸은 지치고 병들어, 43살의 나이에, 해방을 겨우 2년 앞두고, 시인 이상화는 ‘입술을 다문 하늘’로 돌아갔습니다.

35년이라는 너무 긴 일제의 식민통치 때문이었을까요. 시인은 이미 빼앗긴 나라보다, 봄(희망)마저 빼앗길 것을 두려워합니다. 나라는 빼앗길 수도 있고, 나라를 빼앗기는 것은 많은 것을 잃는 것이지만, 그러나 한 민족이 희망을 빼앗기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은 비록 나라를 빼앗기기는 했어도, 희망마저 빼앗기지는 않았습니다. 해방되기까지 저항과 독립운동은 결코 중단된 적이 없었습니다. 신민회(1907년), 독립의군부, 대한광복회(1913년) 등 비밀결사운동단체들이 조직되었고, 만주의 신흥무관학교, 연해주의 신한촌, 대한광복군이 창설되었습니다. 삼일독립만세운동 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1919년), 신흥무관학교(1919년), 조선의열단(1919년), 봉오동 전투(1920년)와 청산리 전투(1920년), ‘6,10 만세운동’(1926년), 신간회(1927년), 광주학생항일운동(1929년), 국채보상운동과 물산장려운동, 문맹퇴치운동, 안중근 의사의 이토 저격(1909년), 이봉창 열사 의거(1932년)와 윤봉길 의사의 의거(1932년), 진단 학회(1934년), 조선어학회사건(1942년) 외에도 다 언급하지 못한 항일무장투쟁과 독립운동, 애국계몽운동들은 우리 민족이 결코 희망마저 빼앗기지는 않았다는 산 증거들입니다. 그리고 그 희망을 빼앗기지 않은 우리 조상들이 지금의 우리나라를 만든 것이지요.

< 2 >

바벨론 제국에 의해 나라가 멸망당한 유다 백성은 우리보다 훨씬 더 긴, 약 70여 년 동안의 포로기를 견디어야 했습니다(렘 25,11-12).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주전 597년, 587년, 그리고 582년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유다를 공격, 유다 땅을 철저히 파괴하고, 유다를 도살장으로 만들었습니다.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유다 지도층 인사들은 그만두고라도 수천 명의 사람들이 전쟁, 굶주림, 질병으로 죽거나, 처형당했고, 일부는 이집트로 피난을 가기도 했습니다.

▲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하나님을 놓지 말아야 한다. ⓒGetty Image

주전 8세기에는 25만 명이 넘었고, 주전 597년의 첫 번째 바벨론 포로기 후에도 그 절반은 되었을 유다의 인구는 주전 539년, 최초의 포로들이 귀향한 후에 2만 명을 넘지 못했던 것으로 보아, 유다 땅이 얼마나 황폐해 있었는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불타버렸고, 그와 함께 유다 백성의 정체성이었던 야훼 하나님에 대한 유일신 신앙과 제의공동체도 와해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제 나라 없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디아스포라 유다인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지요. 세 차례에 걸쳐 포로로 잡혀간 유다의 지도층 인사들의 숫자는 예레미야서에 의하면 정확하게 모두 4,600명이었다고 합니다(렘 52,28-30). 이것이 남자 성인들만을 계산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전체 포로의 총수는 그 수자의 3,4배를 넘지 않았을 것입니다.

포로로 잡혀간 이들 유다 지도층 인사들은 바벨론 남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모여 살았습니다. 이 포로들이 겪은 고초와 굴욕, 한 맺힌 울분을 대수롭게 여겨서는 안 되겠지만, 그들의 처지는 그렇게 가혹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비록 자유롭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죄인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집을 짓고, 농업과 상업에 종사하는 것이 허용되었고(렘 29,5), 자기들의 방식으로 생계를 영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라를 잃고 포로로 잡혀간 유다인들은 심각한 신학적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국가와 제의의 토대가 되었던 야훼 하나님의 약속, 곧 다윗에게 종말이 없는 영원한 왕조를 주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수 없게 된 것이지요. 창조주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도 의심을 받았습니다. 야훼만이 전능하신 유일신이고, 이방신들은 허깨비에 불과하다는 민족 신학도 바벨론 제국의 침략으로 붕괴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조상 대대로 이어져온 신앙을 버리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다른 한편에서 이런 재난이 야훼께서 친히 행하신 징벌이라고 느낀 사람들은 큰 소리로 울부짖으면서 하나님의 공의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겔 18,2-5; 애 5,7). 예언자들의 말을 받아들인 경건한 사람들은 자기 민족이 죽을 죄를 저질렀고, 따라서 하나님 자신이 진노로 이스라엘을 끊어버리는 것이 아닌가하는 두려움으로 절망에 빠졌습니다.

이런 절망과 위기의식은 고향으로부터 강제로 추방당해 처음으로 접촉하게 된 당시 제국 바벨론의 위용 앞에서 더욱 고조되었습니다. 그들이 우주의 배꼽이라고 확신했던 예루살렘은 바벨론의 대도시들에 비하면 참으로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도처에 세워진 이방신들의 웅장한 신전들은 그들이 믿었던 야훼 하나님이 정말 최고의 유일신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의혹을 갖게 했습니다.

그러나 포로로 잡혀온 유대 지도층은 절망 속에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나라를 빼앗기고 유배지로 추방당한 그들은 주변 강대국들과 그들의 신들에 대하여, 또 자기 민족의 비극과 그 의미에 대하여 새로운 방향을 부여하고, 나라를 잃은 유대인 공동체를 궁극적으로 재건하기 위한 미래를 설계해야 할 과제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예언자, 예레미야와 에스겔이 나서야 했습니다. 예언자들은 민족의 재난에 대한 신학적 해명을 제시하고, 미래를 위한 소망의 불꽃을 살려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다가 당한 비극은 민족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며, 이 심판은 새로운 미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준비시키는 정화 과정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이제 예언자들이 예비한 길을 따라 새로운 집단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들은 더 이상 새로운 국가를 성전 중심의 제의적 공동체가 아니라 – 어차피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갈 전망도 보이지 않았기에 - 전통과 율법의 고수를 특색으로 하는 공동체를 형성하려고 했습니다. 안식일과 할례의 엄격한 준수가 강조되었습니다. 국가와 성전이 없고, 제의도 끝장난 상황에서 그들이 유대인임을 나타내는 표식이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때까지 구전되거나, 문서로 보존되어온 역사서와 제의법들을 수집하고 편찬하고 확정하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유대인은 이제 ‘제의 공동체’에서 ‘책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기간동안 유대인들은 이른바 ‘모세 5경’을 편찬했습니다. 나라를 빼앗기고 유배당한 남의 땅에서 그들은 율법 책으로 과거를 고수하면서, 미래를 대비한 것이지요.

물론 유대 포로들의 결코 사라지지 않는 소망은 귀향이었습니다. 자기들을 이곳 낯선 이방인의 땅으로 끌고 온 사람들에 대한 사무치는 증오로 가득 차서 시온에 대한 향수에 젖어 있었습니다(시편 137편). 그들 가운데 대다수는 귀향하여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는 옛 체제를 회복하는 국가의 재건을 바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이 꿈꾸는 새로운 나라는 이미 소멸한 다윗 왕국의 연장선상에서가 아니라, 옛 지파동맹의 체제를 이상적으로 수정한 형태의 국가, 다시 말해 하나님의 직접 통치(신정 국가)를 재건한다는 웅장한 설계였습니다. 이 새로운 국가에서 토지는 지파별로 평등하게 분배되고, 왕과 제사장 등 특권층의 권한도 제한되어야 했습니다. 레위지파에 독점되었던 제사장 직무는 박탈되어야 했고(겔 44,10-11), 왕은 ‘폭행과 탄압을 그치고, 공평과 공의를 실행해야 했으며, 백성을 착취하는 일을 멈추어야 했습니다.’(겔 45,9). ‘백성의 유산을 빼앗고, 그들을 폭력으로 내쫓아서, 그들의 유산을 차지해서도 안 되었습니다.’(겔 46,18).

유대인들의 70년 바벨론 포로기는 이스라엘 역사의 결정적인 전환기였습니다. 전환은 먼저 이스라엘의 신앙에서 일어났습니다. 근동의 한 작은 국가의 수호신이라고만 생각되었던 야훼 하나님은 진정으로 세계사의 주재자이자 우주의 창조주로 고백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됨으로써 제의가 아닌 율법을 중심으로 ‘책의 백성’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가진 ‘유대교’(Judaism)가 탄생된 것도 역설적이게도 포로기가 준 하나의 선물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언자들과 포로로 잡혀간 유배지에서 새로운 나라를 꿈꾸었던 유다 지도층 인사들에게 70년 바벨론 포로기는 결코 오지 않는 봄을 원망하면서 절망했던 고통스러운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 3 >

충격적인 재난과 고통스러운 시련이 오히려 새로운 전환의 기회가 되는 경험은 사도 바울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힌 상황에서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비록 복음 때문에 자신은 고난을 당하며 죄수처럼 매여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 어느 것에도, 그 누구에 의해서도 결코 매여 있을 수 없기에,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실현된다고 바울은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이루어지거나, 안 믿는다고 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의 불변함은 하나님 자신의 신실하심에 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부인할 수 없는 분이시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희망은 우리 자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에게 신실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 4 >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에 있는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다가 치유해주신 나병환자 열 사람 이야기도 구원은 믿음에서 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나병환자들은 멀찍이 멈추어 서서,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소리쳤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레위기 13장 49절의 모세 규율을 암시하셨을 뿐, 그들을 치유도 하지 않으셨고,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은 채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그들이 가는 동안, 그들 모두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오직 한 사람, 사마리아인만이 자기의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하나님께 큰 소리로 영광을 돌리면서 예수님에게 돌아와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 사람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되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 사람 한 명밖에 없느냐?’고 반문하신 후, ‘일어나서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7,11-19).

이 이야기의 핵심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에게 되돌아오지 않은 아홉 사람의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결여되었다는 것을 시사하는데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고, 치유는 가는 중에 발생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돌아오지 않은 유대인들과 돌아온 이방인을 대립시켜 반유대주의를 암시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돌아오지 않은 아홉 명의 나병환자들이 모두 유대인이었는지 아닌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왜 그들은 모두 제사장에게 가다가 치유 받았는데, 사마리아 사람처럼 돌아와서 예수님에게 감사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도 누가복음서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성서학자들은 이 이야기의 초점은 치유 받은 아홉 명의 나병환자들의 믿음이 감사와 연결되지 않았다는 데 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에게 감사하지 않는 믿음은 설령, 그것이 기적을 일으킨다고 해도, 은혜에 대한 올바른 반응이 아니라는 데 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돌아오지 않은 아홉 명의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의 치유능력을 의심하지 않았기에 말씀에 순종하고 제사장에게로 향했습니다. 가는 길에 그들은 모두 치유 받았지만, 오직 이방인이었던 사마리아 사람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제사장에게 가는 길을 돌이켜 예수님에게 돌아와 감사를 드렸습니다. 다른 아홉 명의 치유 받은 나병환자들은 어쩌면 서둘러 더 빠르게 제사장에게 갔을 것입니다. 제사장에게 나은 몸을 보이고 그들을 추방했던 일상으로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믿음은 그들을 치유로 인도했으나, 감사로 인도하지는 못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믿음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보다, 자기목적 성취의 수단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감사 없는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과 감사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구원은 믿음과 감사가 결합되었을 때 온전해집니다. 믿음 없이는 감사할 수 없습니다. 믿음 없이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 모든 일을 기도와 간구로 하고, 우리가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뢸 수 없습니다.’(빌 4,6). 믿음 없이는 우리가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없고’(살전 5,18), 우리가 기도할 때, 이미 받은 줄 알고 감사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우리 기도가 응답받지 못했다고 생각될 때에도 감사할 수 있는 힘입니다. 감사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믿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믿음의 행동입니다. 믿음 없이는 감사할 수 없으나, 감사 없는 믿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습니다.

70년 동안 나라를 잃고, 바벨론 제국, 이방의 땅에서 포로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회의했던 유대인들, 너무 오래 지속되는 일제 강점기에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절규했던 시인 이상화에게, ‘그렇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온다!’고 말할 수 있는 힘은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파기될 수 없다’는 믿음에서 옵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의 공동체, 도무지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감사할 때, 더욱 강해지고, 오직 그런 감사만이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으나, 율법을 중심으로 새로운 나라를 꿈꾸었던 유대 지식인들이 그랬고, 일제 강점기, 믿음의 힘으로 독립을 꿈꾸었던 한국의 크리스천들이 그랬습니다.

오늘의 세계, 제2의 바벨론 포로기에 처해 있습니다. 기후위기, 무역전쟁, 배제와 축출의 시장경제, 내전과 난민, 증오를 부추기는 가짜뉴스와 양극화, 실업과 전망 없는 미래라는 거대한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때는 ‘탈출(출애굽) 공동체’였던 이스라엘,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도 시대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과연 누가, 어떤 공동체가 우리 세계를 제2의 바벨론 포로기에서 탈출시킬 수 있단 말일까요? 그 희망, 우리 교회가 주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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