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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고백이 정답이 될 때까지”

기사승인 2019.08.19  18: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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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며 묵상하며

13 예수께서 빌립보의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서,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 14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예레미야나 예언자들 가운데에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15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 17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시몬 바요나야, 너는 복이 있다. 너에게 이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시다. 18 나도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 내가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20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엄명하시기를, 자기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마태복음 16:13~20/새번역)

스승 벌에게 제자 벌이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 묻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닮으셨을까요? 우리처럼 날개도, 침도 있을까요?” 선생 벌이 대답합니다. “천만에 어떻게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 같겠느냐? 하나님은 분명 날개가 네 개 이상이시고, 침도 두 개 이상이실 것이다.” 놀란 제자는 다시 묻습니다. “그럼 천국에 가면 우리도 그렇게 될까요?” “물론이다. 하나님처럼 우리도 두 개의 침을 가지게 될 것이다. 다만 하나님 것만큼 크지는 않겠지.”

경험으로 알게 된 지식으로 하나님을 그려보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대답에서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런 식으로 판단합니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위대한 이들,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에 빗대어 예수님을 이해하려 합니다. 위대한 예언자 비슷한, 혹은 그보다 좀 더 뛰어난 예언자쯤으로 판단합니다. 알고 있는 것에 비추어 모르는 것을 판단하는 접근입니다. 전혀 새로운 것, 알 수 없는 것, 기대할 수도 없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경험과 지식에 의지해서 다가갈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경험과 지식은 걸림돌이 되기 쉽습니다.

▲ Tim Noble & Sue Webster, 「DIRTY WHITE TRASH (WITH GULLS)」(1998)

베드로의 대답은 어떻습니까?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16절) 복이 있다고,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것이라고 주님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고백이 무슨 뜻인지 베드로는 알았을까요? 바로 이어지는 대화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주님의 길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십자가에 직면했을 때 주님을 부인하고 도망갔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누구신지 알았던 것이 맞나요?

수학문제집을 공부하면서 답만 외우는 어리석은 학생이 있겠습니까. 당연히 그것이 왜 답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풀이과정을 모르면 답은 무의미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은 분명 정답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왜 정답인지, 그 이름에 담긴 뜻과 길은 무엇인지, 그것을 고백하고 믿는다는 것이 어떤 대가를 지불하겠다는 결단인지, 풀이 과정을 깨닫고 살아내야만 진정한 정답이 됩니다.

시몬이 베드로 곧 반석이 되어 교회를 세우는 기초가 될 것이라 말씀해주십니다. 그러나 시몬이 이름 그대로 반석이 될 때까지 쉽지 않은 과정이 남아 있습니다. 자신이 한 고백이 담고 있는 진리 앞에서 무너지고 찢어지고 쓰러지는 과정입니다. 그 처절한 실패를 딛고 일어나 주님을 따르고 또 따르면서, 베드로의 고백은 단단한 기초석으로 다듬어져야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습니다. 부활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신앙인들에게 익숙한 이 고백들이 어찌 그리 가볍고 무기력한지 그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이 고백들이 일상 속에서 어떤 의미인지 깨닫고 체현하지 않으면, 이 고백들은 풀이를 모르는 정답과 같습니다. 삶의 구체적인 문제 앞에서 너무 무기력한 정답입니다.

베드로는 바울처럼 한 번의 회개로 전혀 다른 삶을 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믿음은 실수와 실패를 통해 배우고 성숙해갑니다. 베드로의 믿음이 교회의 기초석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아닐지. 그래서 위로와 소망의 이유도 됩니다. 일상 속에서 생명력 있는 정답이 될 때까지, 지난한 과정을 겪어내야만 하는 신앙인들에게는 작지 않은 위로입니다. 실수와 실패를 통해서 배우고 성숙해갈 수 있다는 증거이자 위로입니다.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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