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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자유: ‘안식’에서 ‘사랑으로 종노릇하기’까지! (출 31:12-17 갈 5:1-15 마 12:9-14)

기사승인 2019.08.16  22:4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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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령강림후 열째주일(8월18일)

1. 광복절: 소화 손들기

8월 15일 광복절(光復節)이 지났습니다. 광복절은 한반도가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국경일로 매년 양력 8월 15일입니다. ‘광복’은 ‘빛(光)’을 ‘되찾음(復)’, 즉, ‘주권을 되찾았다’라는 뜻입니다. 한반도가 해방된 1945년을 광복절 원년으로 계산합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광복절을 ‘소화(昭和) 손들기’라고 합니다. 그 당시 일본 천황의 이름이 ‘쇼와(昭和)’였기에, 쇼와가 항복했다는 의미로 ‘소화 손들기’로 씁니다. 쇼와 천황(1901~1989)은 일본의 제 124대 천황입니다. 본명은 히로히토(裕仁)입니다. 쇼와는 1928년 다이쇼 천황(123대)을 이어 천황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122대 천황이 명치유신(메이지 유신, 1868년)을 일으킨 메이지 천황(明治天皇)입니다.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일본을 근대 국가로 만든 천황입니다. 에도 막부체제가 무너지고 일본이 입헌군주국으로 거듭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러일전쟁 이후 일본을 제국주의적 식민국가로 이끌어간 천황이죠. 아무튼 메이지 천황 이후 일본은 당시 아시아의 강대국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쇼와 천황 당시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의 이론에 공감한 군부 세력들이 천황을 비호하고, 대공황을 타계하기 위해, 정부를 장악하여 조선과 중국과 인도차이나 등을 침략하게 됩니다.

그리고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여 미국과 태평양 전쟁을 벌입니다. 그러나 미국에 패하였고, 쇼와는 전범으로 기소되었습니다. 이때 쇼와의 ‘황위 박탈’은 면했으나,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해 일본은 군국주의를 철저히 배제한 새로운 헌법이 제정됩니다. 이 당시 천황제를 무너뜨리지 못해, 오늘날 일본이 민주국가가 되지 못하고, 천황을 숭배하는 국가종교이데올로기에 빠져 다시 전쟁을 준비하는(물론, 이것은 경제 전쟁부터 시작됩니다) 이상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아무튼 1946년 11월에 공포한 헌법 가운데, 9조가 중요합니다. ‘평화헌법’이라는 별칭이 붙어있는데, 그 내용은 “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 평화를 성실히 희구하고, 국권 발동으로서의 전쟁 및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영구히 이를 포기한다.”, “전항의 목적 달성을 위해 육·해·공군 및 기타 전력은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 역시 인정하지 않는다.”입니다. 핵심은 ‘일본의 전력 보유 금지’와 ‘국가 교전권 불인정’을 명시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베 총리는 이것을 무효화시키려고 지금 노력하고 있죠?

아무튼 이 당시 쇼와 천황과 그 이후의 천황들의 정치적인 실권은 미군정에 박탈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황이데올로기는 지금까지 살아남아서, 일본을 움직이는 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쇼와 천황이 죽고, 그의 아들 아키히토(明仁)가 천황 직위를 후계하였죠? 아키히토가 지난 2019년 4월에 퇴임한 이후, 장남인 나루히토(德仁)가 왕위를 이어받았습니다. 이렇게 사람들 눈에 보이는 천황은 허수아비지만, 보이지 않는 천황 이데올로기는 기독교의 유일신 신앙 이상으로 일본인들의 생각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아무튼 소화가 손을 들어 항복한 날이 8월 15일 광복절입니다. 그런데 김구 선생님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아, 왜적 항복! 이것은 내게 기쁜 소식이었다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었다.”라고 통탄했습니다. 이역만리에서 풍찬노숙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해왔건만, 조선의 해방은 우리의 힘으로 이룬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해방을 이룬 것이 아니라, 해방을 당한 것입니다. 이런 김구 선생님의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습니다. 이후 한반도는 외세에 의해 남북으로 갈라졌습니다. 분단국가가 된 것입니다. 전범국인 일본이 아니라, 한반도가 분단이 된 것은 힘없는 민족의 운명이었습니다. 따라서 일제 식민지 치하 36년의 두 배도 넘는 세월 동안 우리는 굴절되고 불행한 역사를 지금도 쓰고 있습니다. 참된 쉼, 안식이 아직 오지 않은 것입니다.

<일본 대표 시게미쓰 마모루 외무대신이 항복 문서에 서명 하고 있다>

지난주 세 본문 말씀은 참 사랑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 다시 오실 때까지 성령 받은 교회 공동체와 성도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들려주는 말씀들이 성령강림절기가 끝날 때 까지 계속되는데,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안식에 관한 말씀입니다. 노동을 쉬고 안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로 오면 안식은 좀 더 구체적인 내용으로 바뀝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참된 안식을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는데’ 있음을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참 자유라는 놀라운 신앙적 통찰이 보여줍니다. 나의 안식에서 서로 종노릇 하는 자유! 오늘 세 본문 말씀은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2. 안식: 일을 마치고 쉬었음이라

먼저 안식에 관한 말씀입니다. 구약 출애굽기 말씀은 안식일에 관한 말씀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볼까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 됨이니라.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일지며, 그 날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출 31:12-15)

상황이나, 맥락, 혹은 신학적 이해가 없으면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거룩한 날인 안식일에 일하면 죽인다고 하는데, 아무리 구약시대라고 해도 조금 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말로 하면, 주일 성수하라는 말씀 아닙니까? 주일을 성수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벌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죽인다는 말씀입니다. 놀랍죠? 그렇다면 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중요할까요? 아니, 왜 안식 쉼이 중요할까요? 계속 본문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 일을 마치고 쉬었음이니라 하라.”(출 31:16-17)

안식일은 하나님과의 언약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언약의 의미 두 가지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자손 사이의 표징’, 곧 하나님의 백성들의 징표가 되는 것이며, 둘째 ‘하나님도 안식하셨기 때문’입니다. 한 주간의 마지막 날(제7일)인 토요일, 곧 히브리인들의 시간 개념으로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의 시간(레 23:3; 마 12:9-10)이 바로 인식일(שַׁבָּת)입니다. 히브리어 ‘솨바트’는 ‘일을 중지하다’, ‘행동을 멈추다’, ‘휴식하다’라는 말입니다. 즉 안식일은 ‘하던 일을 중지하고, 행동을 멈추고 휴식하는 날’입니다. 따라서 태초에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제 7일에 창조 사역을 멈추고 쉬심으로써 창조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 2:2-3)

이러한 안식일을 하나님께서는 거룩히 구별하고 복을 주셨다고 합니다. 사실 하나님의 천지창조에서 중요한 것은 ‘창조’가 아니라, 바로 ‘안식’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안식일에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모든 일을 멈추고, 그날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지키며 안식하는 날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터전인 팔레스틴의 지형을 살펴볼까요? 팔레스틴은 서쪽이 바다, 북쪽은 비옥한 초생달 지역인 레바논 산악지대, 남쪽은 시내광야, 동쪽은 아라비아 사막지대로 되어 있습니다. 지형은 크게 네 개의 지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서쪽에서 동쪽으로 순서대로 열거하면 ‘해안 평야지대-중부 고원지대-요단 계곡지대-동부 고원지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중요한 도시는 모두 중부 고원지대에 위치해 있습니다(지도에 예루살렘, 사마리아, 나사렛 등). 그리고 해양 민족인 블레셋이 가나안 남부 해안 평지를 지배했습니다.

<팔레스틴 지형>

따라서 출애굽한 히브리인들과 중부 고원지대 백성들은 ‘야훼 신앙’을 통해 하나가 되어 새로운 세상을 만듭니다(성서에는 사사 시대로 이야기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남부 해안 평지의 블레셋이나 주변 나라들의 괴롭힘을 받아왔습니다. 노예 전쟁을 일삼는 애굽, 블레셋, 메소포타미아 지역(앗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과 지중해 연안(그리스, 로마)의 강대국들! 이러한 주변 정세에서 야훼 신앙의 핵심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라는 신앙입니다. 게다가 그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에게 ‘안식’을 준다는 사실입니다. 놀라운 신앙 아닌가요?

사실 고대의 노예들은 쉼이 없었습니다. 노예는 사람이 아니기에, 쉼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러나 생명은 쉼에서 유지됩니다. 쉼 없는 노동은 지옥입니다. 안식 없는 삶은 무의미 합니다. 따라서 야훼 신앙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쉼은 가장 중요한 인간의 가치입니다.

최근 일본의 경제 보복으로, “주 52시간 근로제 도입을 재검토하자!”라는 소리가 기업과 정치권으로부터 나옵니다. 현행 근로기준법상, 상시 근로자 규모가 50명 이상 300명 미만인 사업장은 2020년 1월부터, 5명 이상 50명 미만 사업장은 2021년 7월부터 주 52시간 근로제를 준수해야 합니다. 또한 일본의 경제 보복으로 최근 강화된 환경 규제를 완화하자고도 합니다. 그러나 노동계의 입장은 일본 수출 규제를 ‘빌미’로 기업 민원을 들어주고, 노동자들에게 피해를 안기는 처사라고 반발합니다. 성서적으로 노동계의 반발은 정당합니다. 쉼을 없애겠다는 기업과 정치권의 논리는 잘못된 것입니다. 쉼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쉼을 통해 확보된 자리를 나누어야 합니다. 그것이 이 나라가 외적 위기를 극복하고, 내적 소통을 이루는 길입니다.

3. 선(善): 안식일에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그러나 신약시대로 오면, 안식일에 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 마태복음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안식일에 관해 변론한 사건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예수님께서 “거기에서 떠나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마 12:9-10)

그러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마 12:11-13)

그러나 본문 마지막 구절을 보세요.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마 12:14)” 사람을 쉬도록 만든 생명의 법이 사람을 죽이는 율법이 되어 그 본래 의미를 잃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자본의 본질이고, 사탄의 핵심입니다. 생명을 돈으로 환산하며 가치 평가하는 것!, 사람의 노동을 기계의 작업으로 취급하는 것!, 쉼을 새로운 창조(recreation)이 아니라, 그저 생산에 불필요한 것이라 취급하는 사회! 여기에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라고 더 구체적으로 우리를 일깨우고 있는 것입니다.

4. 자유: 오직 사랑으로 종노릇하라

그런데 이러한 선을 행함이 ‘종노릇’으로 연결됩니다. 그리고 자유로 연결됩니다.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요? 서신서의 말씀이, 오늘 세 본문 말씀의 의미를 다시금 깊이 있는 영적 차원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바울 사도의 서신인 갈라디아서는 오직 ‘믿음’으로만 자유를 얻을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사랑’으로서 그 자유를 보존할 수 있다고 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놀라운 선포입니다. 그리고 멍에에 관해 할례의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2-4)

율법과 할례가 아니라, 성령과 믿음을 이야기 합니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갈 5:5-8)

그런데 우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적은 누룩으로 예를 듭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갈 5:9-12)

십자가 신앙, 곧 자기희생의 신앙에 걸림돌을 제거하고, 진리에 올바로 서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결론을 이야기 합니다.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 5:13-15)

참된 자유는 자신의 육체의 욕망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서로 종노릇 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잘못된 천황이데올로기에 빠진 일본인들에게도 해당이 됩니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합니다. 성서의 말씀처럼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여야 합니다.

5. 자유, 평등, 박애!

프랑스의 국기는 파란색, 하얀색, 빨간색으로 된 삼색기입니다. ‘라 트리콜로네(La Tricolore)’라고도 불립니다. 이 삼색기에는 프랑스 혁명의 이념인 ‘자유(파란색), 평등(빨간색), 박애(흰색)’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이념들은 근대 민주주의의 이상이 되었습니다. 가만히 보면 근현대의 역사의 화두는 바로 프랑스 삼색기의 색깔의 의미로 진행이 되었습니다. 19세기는 자유의 세기, 20세기는 평등의 세기, 그리고 이제 21세기는 박애의 세기, 곧 사랑의 시대가 될 것입니다. 자유에 기반 한 평등, 그리고 사랑의 시대가 우리가 만들어갈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완성이 될 것이나, 지금 저와 여러분들은 그때까지 서로 종노릇하는 진정한 자유를 실천하여야 할 것입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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