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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도와 북간도, 근대교육의 요람이 되다

기사승인 2019.05.07  19:5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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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기에도 교육주도권 다툼이 있었네 (1)

붕어빵틀에서 붕어빵이 나오고 국화빵틀에서 국화빵이 나온다. 민족주의 교육에서 애국애족의 국민이 나오고 하나님 나라교육에서 사랑과 정의의 일꾼이 나오듯이 식민주의 교육에서 친일주구와 식민지 치하에서 순종하며 살아갈 충량하고 소심한 백성이 나온다. 일제는 중국 동북지역에서 식민지 앞잡이와 저급 노동자를 양성하고자 동북지역의 조선인들의 교육권 쟁탈하기 위하여 1907년부터 강경과 회유의 두 가지 방법으로 중국과 조선이주민사회로부터 교육권을 약탈하여 갔다.

참으로 무식하고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서간도와 북간도에서 조선이주민들의 교육을 담당한 학교는 오직 ‘서전서숙’, ‘명동학교’, ‘은진학교’와 ‘신흥무관학교’ 뿐인 줄로 알았다. 뿐만 아니라 조선인들의 만주에로의 이주도 ‘한일병합’이라는 망국의 뼈아픈 역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막연히 그렇게 알고 있었다.

적지 않은 한국인들 또한, 조선인들이 1860년대에 조선 북부지역에 연속된 홍수와 한재 등의 자연재해와 사대부계급들의 학대와 수탈을 피해 청조의 ‘봉금령’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걸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었다. 하지만 이주를 시작한 사실을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였거니와 관심도 없기 때문에 나처럼 막연히 1910년, 일본에 의해 나라가 망하자 독립운동을 위하여 만주로 떠난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가끔 그런 식의 글들을 읽으면서 성찰이 없는 우리 역사교육의 현주소를 생각하며 쓴 웃음을 짓게 된다.

조선인들의 만주로의 이주 역사

조선인들의 이주 역사에 대한 기록은 1860년대부터 ‘월강’을 통한 불법이주가 활발히 진행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사이에 중국의 동북지구에 거주하는 조선이주민들의 인구가 해마다 급속히 늘어났다. 1894년에는 20,800여명, 1904년에는 78,000여명, 1910년에는 160,300여명, 1918년에는 36만 여명에 달하였고 1932년에는 62만 1천 여명에 이르렀다.

북간도, 서간도라고 불리는 연변지구에만도 일본이 통감부 산하에 용정파출소를 세웠던 1907년 당시 77,000여 명에 달하였다. 이는 연변지구 총 인구의 80%를 초과한 숫자였다. 그 뒤로 연변지구의 인구는 해마다 증가하였다.

1908년에는 91,000명, ‘한일합병’ 후 1년이 지난 1911년에는 127,500명, 1912년에는 163,000명, 1916년에는 203,426명, 1918년에는 253,961명이었다. 그리고 3.1운동이 있었던 1919년에는 279,150명, 1922년에는 323,806명, 1927년에는 368,827명이었다.

사람이 모이면 시장이 형성되고 교육의 문제가 대두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상상력이 빈곤한 나는 남한 사회에서 대표적으로 회자되고 있는 ‘기독교 학교’와 “민족 학교”로 익히 알려진 몇 개의 학교만이 조선이주민 사회에서 독립을 위해 영웅적인 맹활약을 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오랫동안 학교를 창립한 망명 지사들과 선교사들을 우러러보며 침소봉대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였다.

훗날 깊이 반성하면서 깨닫고 보니 나의 얄팍한 인식은 기독교와 민족주의가 아니면 설 자리가 없었던 해방 이후 남한의 특수 정치지형이 만들어낸 학교교육을 통한 집단세뇌의 결과물이었다. 작년에 어느 책에서 읽은 1928년 5월에 조사된 ‘조선 학생들을 위한 학교 통계표’는 나의 무식과 선입관을 산산조각으로 깨주었다. 연변의 조선인사회가 무주공산의 공간이 아니라 보다 더 사람답게 잘 살고자 하는 조선 이주민들의 욕망과 희망이 교육열로 분출되고 있는 역동적인 사회임을 깨달았다.

조선인에 의한 조신인 교육

1928년 5월 당시 중국의 동북지구에는 조선인 학생들을 교육하는 학교가 무려 747개나 되었다. 그 중 470개는 조선인이 세운 학교였다. 그 중에는 독립운동단체인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등이 세운 학교가 34개, 기독교를 비롯한 각종 종교 단체나 종교인들이 세운 학교는 108개, 나머지는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과 산골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해서 세운 서당으로 무려 328개나 되었다. 농민과 노동자들이 자각과 자력으로 힘을 모아서 서당을 포함하는 개량식 서당을 328개나 세웠다는 사실에 눈이 번쩍 뜨였다.

▲ 만주에 세워진 대표적인 학교인 <서전서숙> ⓒGetty Image

그들의 서당 설립은 죽음을 무릅쓰고 불법으로 이주한 그들의 치열한 개척정신, 불굴의 민족혼의 발로로 보였다. 설립자이지만 이름도 빛도 없는 그들이야말로 바로 수전을 일구어서 동북지역의 부를 일구어냈으며 조선인 마을을 세워 조선 독립운동의 기초를 닦은 전정한 선구자이어서 감동이 더욱 컸다

중국정부도 조선인을 위한 관립학교를 무려 174개나 세웠다. 일본도 조선인을 위한 학교를 무려 103개나 세워서 1920년대 조선인 교육을 둘러싼 주도권 싸움이 갈수록 치열해졌다. 그러나 1931년 만주국이 세워지면서 일본주도의 식민지 교육, 황민화 교육으로 조선인들의 혼을 말살코자 하였다.

불법으로 월강한 조선이주민들의 교육은 19세기 중엽에서 1931년 만주국이 세워지기 전까지 대략 세 단계를 거쳤다. 첫째 단계는 19세기 중엽에서 1905년까지로 이시기는 구식봉건교육시기로 서당이 유일한 교육기관이었다.

둘째 단계는 1906년에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시기로 서전서숙을 필두로 하여 종교단체와 망명 지사들에 의해 많은 사립학교들이 세워졌다. 사립학교는 민족의식과 신학문으로 근대적인 민족교육을 창설하고 발전시켰다. 서당들은 사립학교에 의해 도전을 받아서 개량식 서당으로 탈바꿈을 시도하였다.

셋째 단계는 1920년에서 1931년 만주국이 세워질 때까지로 사회주의 물결이 동북지역을 휩쓴 시기이다. 탈종교교육, 반제와 반봉건교육을 비롯하여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한 사회주의적인 항일민족교육이 확립되었다.

중국 동북지역의 조선 이주민들은 서당과 사립학교를 통해 교육을 받았다. 서당교육은 근대교육이 시작될 때 까지 반봉건유교사상에 근거한 구식 봉건교육이었다. ❰천자문❱, ❰동몽선습❱, ❰통감❱등 유교의 교리와 윤리도덕을 가르쳐서 봉건체제를 유자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따라 변화한 개량식 서당과  망명 지사들이 세운 사립학교의 교육 목적은 동일하였다. 양자는 주권을 상실한 비참한 조국과 고통에 허덕이는 민족을 구하고 외세를 몰아내며 자주적인 독립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독립투사를 양성하는 것을 목표하였다. 그들은 근대과학문화지식을 가르치는 한편 그것을 통하여 민족교육과 애국애족 사상을 불러일으켰다.

서당 교육

1928년 통계에 의하면 328개 서당에서 580명의 교사가 10,499명의 학생을 가르치는 것으로 집계되어 있다. 이 수치는 당시 조선인이 있는 모든 마을에 1개 이상의 서당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동북지역에 이주해온 조선인들은 기초적인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자 서당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서당은 조선에서 실로 오랜 역사를 가진 사설초등교육기관의 하나였고 근대교육기관이 설립되기 전에는 향촌의 유일한 교육기관이었다. 무엇보다도 서당은 자유로이 설립 또는 폐지할 수 있어 후진 양성에 뜻을 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서당을 꾸리고 아이들에게 계몽교육을 실시할 수 있었다.

초기 서당교육은 ❰삼강오륜❱에 근거한 ‘충효’와 신분질서를 강조하는 유교사상과 윤리도덕을 주입하는 봉건교육이었다. 당시 서당은 대략 다섯 가지 방법으로 만들어졌다. 첫째는 훈장이 자기의 생계를 유지하거나 교육에 대한 관심으로 설립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마을에서 부유한 가정이 자기 자녀와 친척의 자녀들을 위해 서당을 만들고 훈장을 초빙하는 것이었다. 셋째는 뜻이 맞는 몇 사람이 서당을 만들고 훈장을 모시는 것이었다. 넷째는 온 마을 사람들이 뜻을 모아서 서당을 꾸리고 훈장을 초빙하는 것이었고, 다섯째는 유림인사가 ❰사서오경❱을 가르치며 반일의식으로 민족의식을 일깨우고자 설립하는 것이었다.

1905년 이후부터 조선의 문화계몽운동의 영향으로 동북의 조선인거주지역에서도 반일민족계몽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운동의 실천의 장으로서 사립학교들이 많이 세워졌다. 이에 따라 봉건교육을 하던 구식서당이 근대적인 사립학교나 개량식 서당으로 개편되었다.

이 때부터 서당은 조선어, 산수, 조선역사, 조선지리 등을 가르쳐 학생들에게 민족적 긍지와 민족의식을 심어주었으며 반일사상과 독립의식을 고취하였다. 일제는 구식 서당에 대해서는 경비를 지원하며 보존정책을 실시하였지만 개량식 서당에 대해서는 감시와 통제와 탄압을 일삼았다. 일제가 민족교육을 하는 사립학교 탄압을 한층 더 강화하자 독립 운동가들은 개량식서당을 만들었다.

일제의 눈을 피해 학생들에게 조선 글과 조선역사, 안중근을 비롯한 독립투사들의 전기를 가르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여 역사적인 사명을 감당하였다. 서당은 만주국에서도 유일하게 존속하며 교육기능을 계승하며 발전시켰다. 서당이 이렇듯이 해방 전 까지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를 몇 가지 꼽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인교육기관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이나 오지에 사는 아이들은 서당에서 초등교육을 받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둘째 서당의 교육 내용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였기 때문이다. 형태는 서당으로 하되 근대교육을 실시하여 현실적인 필요를 충족시켰고 일제의 억압도 피하였다. 셋째 반일의식을 가진 조선인들이 일제가 세운 공립보통학교를 기피하였으므로 초급교육기관으로서 서당이 계속 존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넷째 서당이 초등교육기관으로서 민중교육기관이었기 때문에 대중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어려서 서당교육을 받다가 정규적인 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다섯째 서당은 시설이 간단하고 운영비가 많이 들지 않아서 설립과 관리가 쉬웠기 때문이다. 여섯째 유교사상이 봉건사회의 지배사상 이었기 때문이다.

유림인사들이 조선과 중국에 대한 일제의 침략을 반대하기 위해서 서당을 만들어서 ❰사서오경❱을 가르치며 항일교육을 하며 독립투사들을 양성하였다. 일제 또한 만주국을 세워서 유교를 통치사상으로 삼아서 지방에 ❰향교❱를 설치하고 농촌에서 장의, 도유사, 교감, 유사 등을 선거하여 문묘를 관리하게 하였다. 서당을 꾸리고 유교의 규칙으로 그 성원을 단속하게 만들었다.

개량식 서당은 일제의 탄압으로 사립학교가 폐교되거나 그 설립이 어려울 때, 탄압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설립되거나 초등교육 시설이 전혀 없거나 부족한 상황에서 설립되었다. 조선인들의 민족의식을 불러일으키고 항일의식을 고조시켰으며 민족의 자질 향상과 문맹퇴치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재래식 서당도 비록 신식교육을 실시하지는 못하였지만 수많은 아동들을 교육하여 초등교육의 몫을 감당하였다는 측면에서 기여를 하였다.

각종 사립학교 교육

1928년 5월 통계에 의하면 독립운동단체와 외국인을 포함한 여러 종교단체가 세운 사립학교는 142개, 교원 수는 316명, 교육받는 학생 수는 7,648명이었다.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는 화흥중학, 남만학원, 동명학교, 화성의숙 등 22개 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참의부는 횡도천예비학교, 환인예비학교 2개를 운영하였다. 신민부는 개신학교, 동명학교, 신창학교, 등 10개의 학교를 설립, 운영하였다.

학교를 세운 종교는 기독교의 장로파가 44개, 남감리파가 8개, 안식파가 2개, 천주교가 6개, 불분명한 것이 4개였다. 천도교는 5개, 시천교는 8개, 원종교는 6개, 대종교는 4개, 청림교는 2개였다. 외국인선교사가 세운 학교는 천주교가 17개, 캐나다장로파가 2개였다.

조선인이 거주하는 동북지역에서 최초로 설립된 근대학교는 1906년 말에 용정촌에 세워진 “서전서숙”이었다. 서숙에서는 수학, 지리, 역사, 법학, 정치학, 한어문과 같은 근대과학지식 교수와 함께 철저한 항일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창립자 이상설의 헤이그행과 운영비 부족, 일본통감부간도파출소의 방해와 감시로 말미암아 1907년 여름에 문을 닫았다.

“서전서숙”은 조선이주민 사회에 세워진 첫 근대사립학교로서 근대 신교육운동의 시작이며 동시에 항일민족교육의 시작이기도 하였다. “서전서숙”의 영향으로 많은 사립학교가 세워졌다.

1907년 황병길, 서고도, 김종대가 훈춘 신풍에 종명학교를 설립하였다. 같은 해에 남성우, 오상근 등이 국자가 서쪽 교외에 와룡동에 창동서숙을 설립하였다. 1908년 김약연, 박무림 등이 명동촌에 명동서숙을, 같은 해 10월에 강백규, 유한풍 등이 화룡현 자동에 정동서숙을 설립하였다.

이런 학교들은 이름이 서숙이었지만 규모, 운영방식, 학과목설치, 운영방침 등에서 구식서당과 완전히 달랐으며 근대교육과 반일민족교육을 진행하였다. 신교육이 자리를 잡아감에 따라 서숙의 명칭도 학교로 바뀌었다. 일부학교에서는 중학부와 여학생부도 설치하였다.

1920년대에 들어서 캐나다 선교부에서 “은진중학교”, 천도교에서 “동흥중학교”, 대성유교공교회에서 “대성중학교”를 설립하였다. 예수교장로회파에서 세운 “영신학교”가 “영신중학교”로 캐나다 장로파 교회에서 세운 “ 명신여자학교”가 “명신여자중학교”로 승격되었다.

20세기 초엽 조선 이주민사회에 세워진 사립학교는 설립주체가 다양하고 학교 운영취지와 교육내용도 서로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근대교육과 반일교육을 중심으로 하였다. 설립자와 교사들도 대부분 망명 지사로서 민족주의자, 종교인, 유학자 및  지방의 유지들이었다. 따라서 당시 사립학교 교육은 몇 가지 시대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 신학이 구학을 대체하였다. 교과목 설치에 있어서 구식 윤리교육을 완전히 배제하고 그 대신 수학, 물리, 생물, 역사. 지리, 체육 등등 근대교육과목으로 대체를 한 것이다. 둘째 사립학교는 항일민족 교육의 요람으로서 독립운동의 일환이 되었다. 교육 그 자체가 항일운동의 일부로서 선후세대가 교육을 통하여 독립의지를 확인하며 독립정신을 계승하며 독립투사를 양육하는 장이 되었다.

셋째 독립전쟁을 염두에 두고 군사교육을 중시하였다. 3.13만세 시위를 비롯한 모든 비폭력만세 시위에 좌절감을 느낀 망명 지사들과 애국청년들은 무력투쟁 없이 독립이 올 수 없다는 현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리하여 무장독립운동단체들을 결성하였다.

왕청현 십리평 잣덕에 ❰사관양성소❱, ❰신흥무관학교❱, 길림성 화전현에 ❰의용군강습소❱, 길림성 교화헌 남강자에 ❰검성중학❱과 간도국민회 주관으로 여러 곳에 사관양성소를 세웠다. 이곳에서는 직접 군사학을 가르치며 독립군을 배출하여 무장투쟁 최전선에 수송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반학교에서도 체육을 중시하여 군사교육과 함께 결합하여 교수하였다.

넷째 종교교육을 통해서 종교전파의 장이 되었다. 1928년 통계에 의하면 당시 사립학교의 75%가 종교단체나 종교인에 의하여 세워졌다. 많은 독립투사들이 탄압을 피하고자 종교에 귀의하여 독립운동을 수행하였으며 종교가 포교활동과 독립운동을 병행하고자 학교를 세웠으므로 많은 교육에 종교의 영향이 크지 않을 수 없었다.

다섯째 치열한 교육열과 의지로 민족교육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리하여 소수에 불과한 조선인들이지만 민족적인 자긍심을 가지고 한족들의 민족 차별과 억압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서 오늘의 조선족을 이루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이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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