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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중국 용정에서의 학교설립과 종교를 통한 항일운동

기사승인 2019.04.09  14: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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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용정에서 보다 (1)

무엇이나 아는 만큼 보고, 보고 싶은 대로 본다는 말이 맞다. 십여 차례 용정에 다녀왔고 그 동안 용정을 보는 나의 시각이 많이 달라졌다. 다양한 시각으로 용정을 보노라니 1900년대 초반의 40년간 용정은 그야말로 팔팔 끓는 거대한 가마솥이었다.

조선이 외교권을 박탈당한 1905년부터 일제가 패망하는 1945년까지 용정 일대의 조선인들은 오늘 한국사회와 교회가 안고 있는 것과 같은 내부적 갈등과 대립, 정체와 위기를 겪었다. 외부적으로는 중국의 토비와 관원들의 횡포, 일제의 학대와 치욕에 굴하지 않고 폭압과 회유를 견디며 면면연연 독립운동을 견지해 갔다.

학창시절에 선구자를 부르면서 마음에 그렸던 용정은 조국을 찾기 위해 말을 달리던 독립투사들의 마을이었다. “별을 헤는 밤”이나 “서시”를 읽으면서 상상했던 용정은 나라 잃은 슬픔으로 잠 못 이루는 구국열정을 가진 저항시인의 마을이기도했다.

그러나 용정 바로 옆에 있는 도시 연길에 와서 살면서 나의 환상은 깨지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족 170여년 용정 역사에서 민족주의 망명 지사들과 기독교의 독립운동의 역사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나마도 1920년 중반을 기점으로 하여 조선족 사회에서 영향력이 점차 잃었으며 시인 역시 시를 썼다는 사실 말고는 용정의 독립투쟁사에 남긴 흔적이 없었다.

다시 용정에서 보다

내가 알고 있던 일천한 상식과 다르게 용정 일대는 1925년을 기점으로 해서 사회주의 물결에 휩쓸렸으며 사회주의 독립투사들의 기반이 되었다. 용정에서 중공공산당 산하의 조선인공산당이 최초로 결성되었다. 한국인들에게 비교적 친숙한 명동학교, 은진학교는 물론이고 대성학교, 중흥학교에서 반종교 투쟁이 치열하게 일어났다.

이들의 활동으로 인하여 역사의 주체로 깨어난 농민과 노동자, 남녀청년들이 독립 투쟁에 생명을 아낌없이 바쳤다.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투사로서 독립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청년들이 무려 1만 3,000여명에 이르며 연변 110개의 향(진)에 610개의 조선족 독립열사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당시 인구 비율을 생각하면 140명중 1명이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산화했다. 1930년대 용정은 한국독립투쟁의 최대 항쟁지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 1919년 3월13일 북간도 용정의 해란강변에서 수만명의 조선인들이 독립 만세를 부르고 있다. ⓒ한겨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용정을 망명 독립투사들의 본거지, 시인의 고향으로 인식하는 것은 사회주의자들의 독립운동을 배제할 수밖에 없는 해방 후 한국 정치상황과 기독교 영향력의 산물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역사적 사실과 다른 인식을 우리가 계속하고 있는 것은 시류에 민감한 TV 방송과 언론 매체들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다. 보수성과 중국과 수교 이후 연변 관광의 길이 열리며 여행사들이 한국인이 익히 알고 있는 “청산리전투”, “일송정과 용드레 우물”, “윤동주 시인과 명동촌” 그리고 “이상설의 서전서숙”을 여행상품으로 개발하여 그것만 보여주기 때문에 우리의 용정에 대한 인식이 고착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용정과 중국 조선족의 역사

용정을 잘 보려면 먼저 중국 조선족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중국 조선족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으며 일본이 패망하기 전 대략 100년의 역사를 크게 3개의 시대로 구분해 본다.

첫 시기는 1850년대부터 1905년까지이다. 이 시대는 가난한 소작농민들과 노비들이 조선에서 살 수 없어 도망쳐 나와 연변을 비롯한 동북삼성의 강을 따라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수전을 일구어낸 농민들의 활동기로 수전민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다.

둘째 시기는 1905년에서 1925년으로 1910년 대한제국이 망하자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 관료, 양반 사대부들이 들어와서 학교를 세워 반일민족교육과 함께 독립 투쟁을 펼친 시대로 망명 지사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다.

셋째 시기는 1925년에서 1945년으로 사회주의의 영향으로 농민대중과 청년들이 조직화되고 의식화되어 주체적으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시대로 대중 항쟁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다.

한국사회는 이 세 시기 중 월강 조선 이주민, 수전민의 시대를 거의 모르고 관심도 없다. 그러나 선구자, 수전민 시대야말로 망명 지사들의 독립운동의 출발점이었으며 오늘날 조선자치주탄생의 시점으로서 다각적으로 심도 있게 다루어야 할 시대이다. 무책임하고 무능했던 망국의 역사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평가 없이 새 역사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이 글에서는 두 번째 시기에 해당하는 망명 지사들의 시대를 다루며 그들의 교육운동과 독립운동을 소개하며 그런 속에서 출현한 사회주의의 활동을 보고자 한다.

중국 용정의 망명 지사의 시대

두 번째 시기에 해당하는 1905년부터 1925년까지 조선은 망국과 식민치 통치 속에 들어갔다. 일본에게 외교권을 빼앗기고 군대가 해산되고 결국에는 일본에게 자주권을 넘기는 나라의 멸망이었다. 그 과정에서 조선인들은 연변으로 대대적인 이주를 시도하였다.

1904년에 연변지역에 이주해온 조선 이주민은 50,000여명에 달했다. 1907년에는 71,000여명, 1909년에는 85,000여명, 1910년에는 109,500여명, 1911년에는 126,000여명, 1912년에는 210,000명에 이르며, 1920년에는 277,000여명에 이른다. 일본 척무성의 자료에 의하면 1920년에 이르러 만주 동북지역 조선이주민 인구는 457,000여명이었다고 한다.

이 시기의 이주민들은 나라가 망하기 전후에 들어온 정치 이민으로 집단 또는 개인적으로 이주를 하였다. 특별히 ❮신민회❯, ❮서북학회❯, ❮청림교❯, ❮대종교❱ 계열의 인사들이 많았다. 또한 홍범도와 수하 의병들, 이진룡과 수하의 의병들과 함경북도 성진군 학성면 달래동의 양씨 일가친척 150여명은 집단 이주를 했다.

개인적으로 망명한 이들은 이상설, 안중근, 안명근, 양기탁, 서일, 안희제, 안무, 조맹선, 전덕원, 김중건, 김좌진 등등이 있다. 이 시기를 주도한 망명 지사들은  조선인들의 반일 정서를 고양시키며 독립투쟁을 준비하기 위하여 항일단체들을 조직했다. 그리고 독립운동 인재 양성을 위한 사립학교 설립 및 조선인의 이주와 함께 따라온 기독교를 비롯한 민족종교의 전파를 통하여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1905년~1925년대 망명 지사들의 항일활동 조직

첫째로 그들은 항일단체 설립과 항일교육과 계몽으로 독립운동을 시작한다. 1909년 이동춘의 발기로 ❮간민교육회❯가 설립되었다. 이동춘은 당시 변무공서교섭과 통역관원으로 등용되어 간도에서 조선족교육체계 확립에 큰 기여를 하였다.

1913년 2월에는 김약연과 이동춘, 구춘선, 김립 등 기독교계 지도자들이 앞장섰다. 조선이주민들의 자치와 연합을 위하여 ❮간민회❯를 만들었다. 이동휘와 용정 일대의 기독교 인사들이 ❮삼국전도회❯를 세우고 복음전파와 함께 일제에 맞서는 반일 교육을 하는 사립학교를 설립 운동을 펼쳐 나갔다.

1911년 봄에 왕청현 덕원리로 망명한 서일은 1912년에 계화, 현천묵과 함께 반일독립단체인 ❮중광단❯만들어서 청년들을 군사 훈련시켰다. 1919년 3.13 만세 시위 후에는 대한정의단으로 개편하였으며 그 휘하에 무장독립단체인 ❮대한군정회❯만들었다. 1920년 봄에❮대한군정회❯는 청산리전투의 주력부대인❮북로군정서❯로 이름이 바뀐다.

1904년에 이범윤의 통역관으로 러일전쟁에 참여하였으며 안중근과 단지동맹을 결성하였던 황병길은 백삼규, 오병묵과 반일교육과 활동을 주목적으로 하는 ❮기독교우회❯ 조직했다. 상인들의 계몽과 교육을 위해❮훈춘상무회❯를 조직하였다. 황병길, 오병묵, 이종호, 윤해 등은 한족과 연합하여 조선의 독립을 회복하고 일본의 연해주 병탄을 방지하기 위한 ❮둔전영❯을 조직하였다.

1910년에 김익근과 김문호는 왕청현 라자구에 농업과 상업을 흥성시키며 일본을 배척하고 한국을 회복시킨다는 취지로 ❮라자구농상회❯를 조직하였다. 또한 대별남구에서는 송익준이 주도하여 무력투쟁단체인 ❮창의소❯를 만들었다. 1915년에 이동휘, 장종휘 등은 ❮만국개량회❯를 조직하여 연해주와 간도가 긴밀한 연락 속에서 대일작전을 추진키로 하였다.

1919년 3월에 구춘선을 회장으로 하는 반일단체인 ❮독립기성회❯가 조직되었다. 1919년 3월 간도에서 가장 큰 ❮국민회❯가 만들어졌다. 1919년 4월에 동년현, 훈춘현의 대표들이 훈춘 탑도구에 모여 ❮훈춘현국민회지부❯를 설립하였다.

항일인재 양성을 위한 학교 설립

둘째로 그들은 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하며 항일인재를 양성하였다. 항일인재 양성을 위한 사립학교가 동북삼성 곳곳에서 세워졌다. 사립학교는 반일민족단체에서 세운 사립학교, 조선족종교단체와 그 인사들이 세운 학교, 외국인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와 광범위한 민중들이 세운 학교로 농촌지역의 농민들이 세운 학교가 있었다.

❮만주국교육방안❯에 나오는 1928년 통계에 의하면 반일민족 단체인 정의부 22개, 신민부 10개, 참의부가 2개의 학교를 세웠다. 같은 책의 통계에 의하면 조선족종교단체와 지도자들이 세운 학교는 기독교에서 세운 학교는 64개, 천도교, 시천교, 원종교 대종교 등의 민족 종교 단체가 세운 학교가 25개 였다. ❮최근간도사정❯에 나오는 1926년도 통계에 의하면 외국인 선교사에 의하여 세워진 학교가 19개였다.

❮만주국교육방안❯에 나오는 1928년 5월 통계에 의하면 조선족 마을이 있는 곳마다 농민들에 의해서 세워진 개량식 서당학교가 328개였다. 외국인을 포함한 조선인이 세운 사립학교의 총수는 470개 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조선인들의 반일교육의 의지가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참고로 1928년 통계에 의하면 중국인이 세운 조선족 관립학교는 174개였으며 일본이 세운 조선족 학교는 148개였다.

조선인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근대사립학교는 1906년 말에 세워진 서전서숙이었다. 그러나 설립자인 이상설의 1907년 봄, 헤이그밀사행과 일본 ❮통감부간도파출소❯의 억압으로 강제로 문을 닫게 되었다. 그 뒤를 이어서 창동학교, 정동학교, 광성학교, 명동학교가 설립되었다.

계속해서 왕청현에 명동학교, 훈춘현에 신풍학교, 북일학교, 연길에 길동학교, 용정에 영신학교, 명신여학교, 일공학교, 은진학교, 동흥학교, 대성학교, 광명학교, 동양학원, 노동학원, 동아학교 등등이 세워졌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1916년 12월까지 동북3성내 조선족 사립학교가 238개소, 학생이 63,000여명이 있었다. 만주국 시절에 기록된 ❮만주국교육방안❯의 1928년의 통계에 의하면 조선족사립학교는 470개소, 학생은 16,929명이었다.

민족사립학교는 1911년 8월에 선포된 ❮조선교육령❯이 조선인을 충성된 식민지 백성으로 만들고자 하는 민족말살정책과 동화정책에 반대하는 반일을 교육의 취지로 삼았다. 민족의식과 독립을 고취하는 교육과목에 중점을 두었으며 종래의 한학과 유교의 윤리도덕교육을 혁파하고 근대적인 새로운 문화 지식을 교육하였다. 국어, 역사, 생리, 화학, 지리, 수학, 체육 등 학과목을 중시했다.

3.13 만세 시위 후 군사교육을 실시하여 독립군의 역량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뿐만 아니라 사립학교들은 조기공산주의자들과 진보적인 지식인에 의하여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사회주의혁명사상을 전파하는 기지가 되었다. 다양한 종교재단이 세운 사립학교에서는 사회주의 사조의 파급으로 교육과 종교 분리운동이 일어났다.

하지만 대성유교회 계열에서 세운 대성학교에서는 공자의 위패가 제거되고 매월 초에 드리는 제사가 사라졌으며 중흥학교에서도 천도교 재단으로부터 분리가 되어 일체의 종교 행위가 중단되었다. 기독교 학교도 마찬가지 시련을 겪어야 했다. 명동학교도 반 종교투쟁과 사회적 여론의 압력으로 교장인 김약연이, 1928년 교장직무를 사임하고 용정촌으로 떠난 뒤 오을열이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학교가 교회와 완전히 분리되었다.

은진학교는 1927년 졸업을 앞두고 졸업이 취소된 최성회로 말미암아 졸업생 전원이 졸업을 거부하고 해산했다. 이에 2, 3학년들이 최성회에게 졸업장을 수여할 것과 성경 과목을 취소할 것을 요구하며 동맹휴학에 들어가게 된다. 결국 150명의 재학생들이 대성학교와 증흥학교로 단체로 전학을 가는 바람에 폐교에 위기에 까지 이르렀다. 그리하여 1928년에는 11명이 졸업하였고, 1929년에는 7명이 졸업하였으며 1932년에는 2명이 졸업하는 진통을 겪어야 했다. 
민족사립학교는 많은 항일지사들을 양성하였으며 이들의 활동은 3.13 만세 시위, 각 지역의 만세 시위, 15만원 탈취사건을 비롯하여 일본 군대와 경찰서, 관청을 습격하는 일로 나타났다.

일반사립학교에서는 학식을 갖춘 지도자를 배출해내는 것에 중점을 두었지만 무장투쟁을 예상하며 직접 독립군을 양성하는 무관학교도 세워졌다. 이종호의 지원으로 이동휘와 김립이 라자구에 세운 무관학교가 설립되었다. 1920년 3월에 서일, 현천묵, 계화가 김좌진을 소장으로 초빙하여 세운 북로군정서 산하의 ❮무관연성소❯가 세워진다.

3.1운동 후 임시정부가 지원하여 신흥학교에 세운 ❮신흥무관학교❯, 길림성화전현에 세워진 ❮의용군강습소❯, 1920년 5월에 국민회 주관으로 연길현 숭려향 이정배에 세워진 사관학교, 화룡현 삼도구 능지영에 세워진 사관양성소, 안도현 내두산에 설립한 사관학교, 길림성 교화현 남강자에 설립한 검성중학, 신민부가 목릉현 팔리평에 설립한 성동사관학교 등이다. 이들 사관학교에서는 군사교육과 실전 훈련을 실시했다. 임전무퇴의 군인정신을 배양하였으며 하루에 10여 시간씩 강훈련으로 독립군을 양성하여 무장투쟁의 최전선으로 수송하였다.

종교 모임을 통한 독립운동 단체 조직

셋째로 제종교 포교와 전도활동 및 신도들의 모임으로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한다. 천주교 인사들이 3.13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방우룡은 김종담, 김연과 함께 천주교를 기반으로 하는 항일무장부대 ❮의민단❯를 조직하여 홍범도연합부대에 가담하여 청산리전투에 참여하였다.

캐나다 장로교에는 이동춘, 정재면, 박무림, 홍순국, 남공선, 황병길, 오병묵, 구춘선, 안무, 마진, 강백규, 김약연, 이성국, 등 많은 망명 지사들이 모였다. 그들은 ❰서전서숙❱을 효시로 하여 각처에 교회와 신식학교를 세웠으며 교민회를 만들어서 반일 계몽운동을 벌였다. 용정 3.13 시위를 계획하고 주도하였으며, 각처의 만세 시위를 조직하여 주도적으로 이끌어 갔다.

그들은 간민회를 기초로 하여 장로교인 중심의 연변 최대의 반일단체인 ❮간도국민회❯를 조직하여 ❮국민회군❯를 만들었고 독립군양성소를 세웠다. 국민회군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 참여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황병길, 오병묵 등은 훈춘에서 ❮기독교우회❯, ❮훈춘상무회❯, ❮둔전영❯, ❰훈춘한민회❱을 조직하여 반일교육과 독립군을 양성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동휘와 김립 등은 대한기독교회를 통하여 연길, 훈춘, 왕청에 교회학교를 세웠고 3국전도회 이름으로 왕청현 라자구에 무관학교를 세웠다.

나철, 김교헌, 윤세복, 서일, 계화, 현천묵, 김규식, 김복, 김장, 이장녕, 김규식(우사 김규식과 동명이인) 등은 대종교 교세확장을 통하여 독립운동을 꾀하였다. 1911년에 연변지구에서 포교를 시작한 이래로 교우 자녀들을 위하여 화룡현 청일학교, 환인현 동창학교, 무송현 벽산학교, 밀산현 대흥학교, 용정현 문명학교, 중흥학교, 왕청현 명동학교, 훈춘현 진동학교, 영안현 대종학교 등 많은 학교를 세웠다. 김교헌은 무오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으며 서일, 현천묵, 계화 등은 1912년에 교도 중심의 반일단체인 ❮중광단❯을 만들었다. 

1919년 말에 김좌진을 무관양성소 교관으로 초청하여 독립군양성소 ❮사관양성소❯를 세웠으며 대종교 교도를 기반으로 하는 무장단체인 ❮북로군정서❯ 조직하였다. 북로군정서는 청산리전투에 참여하여 역사에 길이 남는 전투를 치루었으며 그 후❮대한독립군단❯으로 재정비되었다. 1920년 당시 밀산에 모인 조선독립군 부대는 모두 3,500여 명이었는데 대종교 계통의 군인이 2,500여명에 이르렀다.

이범윤, 황운세, 홍두극은 유림인사를 중심으로 하는 반일무장단체 ❮광복단❯을 만들어 왕청현 춘양일대를 근거지 삼아 반일무장투쟁을 벌였으며 청산리전투에도 참여하였다. 임창세, 신포, 오석영, 김광숙, 윤좌형, 현기정, 지창욱, 임방혁 등은 청림교를 기반으로 하여 무장독립단체인 ❮야단❯을 조직했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 병력과 군복 등을 지원하였다.

왕청현의 청림교도들은 1922년에 명신소학교를 짓고 80명을 모집하여 반일교육을 실행했다. 1920년부터 청림교 지도부는 백두산에 올라 일본의 멸망을 기원하고 나라의 독립을 비는 단군제를 드리며 청림교도들에게 반일의식을 고취하였다.

참고서적

1. “연변조선민족사” 집필소조 편, 『연변조선민족사』(상), 연변인민출판사, 2011년.
2. 김춘선, 김철수 외 10인 공저, 『중국조선죽통사』(상), 연변인민출판사, 2009년
3. 정협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위원회 문사자료위원회 편, 『연변문사자료2』, 연변인민출판사, 1984년.
4. 연변정협문사자료위원회편, 『연변문사자료6집 교육사료전집』, 연변정협문사자료위원회 내부발행, 1988년 .
5. 연변정협문사자료위원회편, 『연변문사자료 8집 종교사료전집』, 연변인민출판사, 1997년
6. 중국조선민족교육출판사, 『중국조선족교육사』, 동북조선민족교육출판사, 1991년.
7. 리광인, 『겨레항일지사들1』, 민족출판사, 2007년 
8. 심영숙, 『중국조선족력사독본』, 민족출판사, 2016년 
9. 연변해외문제연구소편저, 『중국연변조선족력사화책』, 1997년.
10. 한국근현대사학회, 『한국독립운동사강의』, 한울, 2016년.
11. 김철수, 『연변항일사적지 연구』, 연변인민출판사, 2002년
12. 김춘선, 『북간도 한인사회의 형성과 민족운동⌟ 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원』, 2016년 
13. 양소전, 차철구, 김춘선, 김철수, 안화춘,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 연변인민출판사, 2009년
14. 관봉 엮음, 『중국조선족유래와 20세기 초기의 학교』.

 

이이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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