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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정체성

기사승인 2019.01.09  19: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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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이라는 정체성의 환상 1

정체성의 형성

스스로 자신이 정체성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개인으로서 자각하는 시기는 일반적으로 유아기라고 추정이 가능하다. 그 이전 상상계 속에 머무른다고 표현할 수도 있는 시기 현재 자신에게 기억이 없는 시기에 대해서는 아직 많은 것이 불분명하다. 때문에 그 이전에 대한 태교라든지 어릴 때 부모님이 어린아이에게 쥐어주는 성경책이나 또는 의미도 모르는 채로 영어비디오를 보거나 듣게 하는 일들은 조기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쉽게 볼 수 있는 일들이다.

그렇다면 생성되는 정체성이란 것은 무엇인가. 정체성은 쉽게 정의하기는 어려운 관점이다. 스스로 형성한 것을 정체성 이라고 말 할 수도 있지만 그 과정에서 타인의 시선 또한 간과할 수는 없다.

나는 아무리 선한 의도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었다고 하더라도 다른 타인들이 아첨을 하는 사람으로 본다면 나의 정체성은 나도 모르는 사이 두 개가 형성이 되어 버린다. 아무리 무시하려 하여도 상징적인 구조 속에 살아가는 사회적 동물인 인간으로서는 무시할 수는 없으며 그 또한 분명히 다른 하나의 나로서 존재하는 부분이다. 오히려 내적인 실재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며 실재에서 존재하는 신체랑 실존한다고 생각하는 정신 또한 실존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안개속일 가능성이 높다.

타자라는 존재의 개입

나는 이미 스스로 생각을 하는 순간부터 타인과의 관계 속이라는 구조 속에 갇힌 채로 정체성의 형성이 시작된다. 정체성의 일반적인 개념은 전통적으로는 한 개체가 자신과 맺는 관계로 정의된다. 하지만 이 여기서 자신이라는 존재는 현재만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자신이지만 자신이 아니다. 과거의 자신과 미래의 자신 그리고 현재의 자신은 같은 선상아래 존재하지만. 엄밀히 말해 생각하는 순간 현재는 과거가 됨으로 현재의 나는 존재하지만 존재할 수 없는 역설을 가지고 있다.

▲ 고대와 현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에게 중요한 문제 중에 하나는 자신의 정체성 발견하기 아닐까 한다. ⓒGetty Image

그렇기에 현재의 나는 나라는 정체성을 어느 정도 확립했다고 착각하며 정체성이란 것을 찾고자 한다. 이 때 개입을 시작하는 타자는 나의 감정을 움직이고 정체성 형성과정 중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다. 타자의 개념은 나 이외에 다른 존재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른 개체 이외에도 나라는 개체와의 관계 속 즉 실재의 나와 나의 실재가 나라고 생각하는 나 이 두 주체들도 서로가 타자가 된다.

인간은 헤겔이 언급했듯 누구나 인정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타인의 인정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 하는 이 자신과의 싸움은 의식하지 못하며 무의식으로 진행된다. 나는 여기서 감정들 중 조와 울의 흔들림이 일어난다고 여긴다.

이 흔들림은 나는 제어할 수 없는 타자의 영향력만이 기울거나 당기게 유도한다. 만약 우울로 기울 경우 우울증에 가까운 증상들이 나와 무기력하게 되며 조증의 방향으로 기울 경우 조증이 드러나 마치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을 법한 환각에 빠지게 만들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감정을 움직이는 스위치는 내가 가지고 있지는 않다.

제어할 수 없는 감정들은 스스로를 제어 불가능하게 만든다. 지금도 대부분의 사람은(거의 모든 사람은) 스스로의 감정을 의지로는 완전히 조종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어떤 사람도 아직은 어느 한 사람의 감정을 온전히 컨트롤 시킬 수 있는 외부적 압력을 가할 수도 없다. 우울증 환자에게 처방되는 안정제도 개개인이 가진 우울증을 임시적으로 연기시키거나 약에 의존하게 만들뿐 감정 스위치에 잠시 보호 덮개를 얹은 것에 불과하다. 외부적으로나 내부적으로서 양측에게 영향을 받지만 그 영향을 거부할 수는 없다.

결국 불합리하게도 타자에게서 영향을 받는 개인은 원하든 원하지 아니하든 자신이 감정 조정의 의무를 지게 된다. 하지만 억울하게도 이 둘을 제어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내가 아닌 타자들로부터 온다. 이 타자들에 시선에 의해 개인은 나의 모습을 의식하며 거기서 나의 정체성을 만들고자 한다. 극단적 이지만 흔할법한 이야기를 하나 지금 작성해본다.

환상 속에 있는 “나”라고 생각했던 존재

여기 한 학생이 있다. 이 학생은 어릴 때부터 학교에 다니며 방과 후 학원에 다니고 대부분의 고등학교 생활은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수능을 끝내기 이전까지 학교에 다녔다. 그리고 이 학생은 드디어 모두가 우러러보는 대학교에 가장 비싼 곳으로 취업을 할 수 있는 학과에 합격했다. 지금 이 학생은 인생에 두려울 것이 없으며 마치 모든 것을 이룬듯 한 기분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제 이 학생은 바로 자신의 부모님에게 달려가 그 기쁨을 느낀다. 그리고 충족감을 느낀다. 모든 친척들이 합격소식을 들었고 그들이 축하한다. 학생은 부모님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며 아들을 자랑하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희열을 느낀다. 마치 이 순간을 위해 살아온 듯하다. 하지만 부모와 떨어져 부모의 영향력이 적어지는 대학에 진학한 뒤 오히려 연극이 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 길은 무명 생활이 너무 길고 급여도 높지 않은 길이지만 거기서 진정한 나를 찾은 것만 같은 희열을 느낀다. 그는 이제 자기 길을 찾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이 사실을 부모님에게 알리지만 그들은 강하게 반대한다. 자신의 길을 선택하기엔 부모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그들로 인한 나의 보상이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대로 학교를 다녀 취업을 하자니 자신의 미래는 너무 어둡게 보인다. 마치 삶의 목표를 잃은 기분이다.

이 학생은 이전까지 단 한순간도 자신으로서 산 적이 없다. 이제 하려고 한 연극은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것일 거라는 욕망이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기엔 강하지 않다. 스스로의 의지로 결정을 한 적이 없기에 선택에 있어 극심한 두려움도 느낄 것이다. 목표를 공부하는 것은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다. 확고한 의지와 노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안타깝게도 이 학생은 스스로를 타자로 삼았다.

하지만 그 타자는 현재의 자신이 아니다. 미래의 자신이다. 여기서 미래의 자신은 두 명이 존재한다. 하나는 대학에 붙은 뒤에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부모에게 알리고 주위의 칭찬을 받고 인정받는 자신이고 또 다른 자신은 불합격 한 뒤 부모를 실망시킬 것과 주위의 손가락질을 받을 것을 두려워하는 자신이다.

심지어 이 두 환영은 자신의 욕망이 아닌 부모의 욕망이 표상된 것을 자신이라 착각한 것이다. 여기서 진짜 자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연극을 좋아하는 자신 또한 진짜 자신을 찾는 과정들의 착각일 수도 있다.

앞서 정체성은 한 개체가 자신과 맺는 관계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 학생은 자신과의 충분한 관계를 맺지 않았다. 맺었다고 생각한 관계는 타인에 받은 자신의 미래의 모습이었고 자신은 사라지고 타인들 사이의 관계가 자신의 정체성이 되어버린 것들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정체성을 찾으려는 현대인들의 시도들

사람들은 이제 와서야 타자들을 자신과 동일화해야만 하는 대상이 아닌 아예 다른 존재인 타인으로 인식하려한다. 이를 대변하는 것으로서 사회에서 가장 시대의 변화에 민감한 사람들은 상인들일 것이다. 이들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새로운 가치를 찾는 것들에 돈을 들일 것을 누구보다 빠르게 인지한다.

지금 대형서점에 간다면 매월 베스트셀러 가판대에서 내려가지 않는 책들이 몇 가지 있다. “개인주의자로 살기로 했다.” “미움받을 용기” 같은 책들은 자신의 정체성이 타자들이 만든 정체성과 충돌하면서 받는 상처를 위로받기 위한 것이며 “지대넓얕” “사피엔스”와 같은 깊게 탐구해야 될 내용들을 한권 안에 소개하는 책들은 마치 세상의 진리를 알게 된 것 같은 착각 속에 빠지게 하며 신을 믿거나 알고리즘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미련하며 나는 지식들로 나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착각을 일으킨다.

이런 시도들은 모두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거나 현재에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 찾는 방법이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진들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것은 어렵다. 타인과의 관계는 결정하는 개체뿐만 아니라 나의 결정으로 인해 슬픔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부모와 같은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연결되어 타자들로 부터 벗어날 수 없게 만든다.

자신의 정체성을 위한 선택이라고 여길 수 있는 부분이 타인에게 슬픔을 주고 나 또한 그로인해 슬픔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을 두려워 하기에 쉽게 자신의 정체성 형성하는 시도를 하지 못하고 이 개체는 정체성을 이루지 못함과 이룰 시도조차하기 힘든 상황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무기력한 우울증과 같은 상황 속으로 빠져들 것이다.

여기서 나라는 개체는 결국 나라는 주체를 모른 채로 또 타인에게 내보여질 나의 초라함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여기서도 완성을 향해가는 나라는 개체는 없다. 타인에게 피해줄 것과 나의 개성을 이룰 수 없다는 절망에 빠진 만들어 지다만 두 개체가 있다.

이렇게 모두가 만들어진 환상과 같은 사회구조 속에서 주체를 확인하려 잠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인생의 패배자라는 오명을 무릅쓰고 나라는 개체를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럼 이 구조가 잘못된 것일까? 물론 그렇다 라고도 볼 수 있다.

정체성은 문화라는 담론에도 영향을 받는다. 한국 사회와 젊은 세대가 요즘 닮길 원하는 듯한 대표적 유럽 사회 중 프랑스 사회를 예를 들면. 어떤 세대는 젊은 이성끼리의 성적 충족인 원나잇 문화를 자신들의 자유로 여기며 프랑스 여자와 같은 유럽여자들은 자유 속에서 우아하게 산다고 생각하며 이것이 진보된 의식인양 그것을 닮고 싶어 한다. 그런 사람들을 인식하고 나오는 책들이 “프랑스 여자는 늙지 않는다.” 또는 “시크_하다”와 같이 이기적인 것처럼 보여서 행복하게 사는 프랑스인들의 모습을 비추어서 마치 그런 자유가 진정한 나를 찾는 자유인 것처럼 말한다.

그들은 그런 자유에서 느끼는 쾌락을 자유를 차지하고 있는 상태로 알고 있다고 나는 여긴다. 그러나 한국의 구조 속에서 저렇게 사는 것은 그저 한 헤픈 남녀의 관계와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들이다. 프랑스 구조의 개념은 이곳에서 통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 구조를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양 사회에 우열은 없다.

하지만 저들은 타인과 나의 관계에서 만큼은 한국 사회의 구조보다 조금 더 자유로워 보인다. 그러나 나는 나라는 개념은 이기적이기도 하지만 자기 방어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들의 철저한 공과 사의 구별은 마치 이들의 사회가 우리의 사회보다 자유롭고 행복하게 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최근 북유럽 4개국의 1인 가구는 평균 40%에 육박하다고 보도된 바 있으며 유럽 전체의 자살률 또한 결코 낮지 않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들 역시 같은 무게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 타자와의 관계를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개체의 정체성을 잃고 단체 속에서 자신의 잃어버린 정체성으로 인해 자살을 하는 경우가 높다. 학생들의 자살률이 다른 나라보다 압도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외고의 상위권 학생이 명문대 대학에 합격한 뒤 부모에게 “이제 됐어?”라는 말을 남기고 자살한 유명한 사례의 이유도 이곳에 있다.

반면 서구권은 이 반대가 이루어진다. 나는 나라는 사회 구조가 오히려 개인의 정체성 형성을 돕는 것 같지만 오히려 여기서 타인과의 관계에서 받을 수 있는 충분한 관계가 부재한다. 부모가 자녀의 방문을 함부로 열 수 없는 것은 이곳에서는 마치 개인의 개성을 존중해 주는 행위로 여길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극도로 타인과의 관계가 단절된 모습이기도 하다. 이것은 이들의 사회 또한 우리와 같은 정체성의 문제를 겪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다른 담론이기에 그 맥락이 같은 맥락으로 서로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사회 속의 인간은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없다. 우리는 이미 선택권이 없이 실존하고 있으며, 이미 이 담론 속에 그리고 인간은 세계에 내던져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인간에게 진정한 자유란 없다. 인간은 자신의 선택에 대한 대가를 받는다. 의도가 어떠하든 결과적으로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게 되어있다.

때문에 나의 정체성과 타인의 정체성 사이의 중용을 지키려 하여야 겨우 살아갈 수 있는 구조 속에 우리는 겨우 자신을 지키며 머물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지키며 사회가 준 가면을 쓴 채로 구조가 부여하는 자본에 연결되어 있는 행복이란 개념을 쟁취하기 위한 노력을 그 또한 자신의 욕망일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살 것이다. 그 가면을 진정한 자신으로 알고 있는 채로.

김인(감리교신학대학)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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