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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도 잘 알지 못한다

기사승인 2018.11.18  20:2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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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약성서에 대한 문학적 이해 5

둘째 창조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둘째 창조 이야기의 범위에 대해 먼저 언급해 보자. 이야기 자체만 놓고 보면 창세기 2:4 하반절부터 25절까지, 즉 아담이 창조되어 에덴동산에서 살게 되고, 마지막으로 하와가 창조되고 아담과 같이 있게 되는 장면까지 보아도 어색하지 않다. 3장부터는 에덴동산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이야기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창세기 2-3장에 이르는 이야기는 사람의 운명에 관해 정교하게 연결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뚜렷한 의도를 가진 신학적인 반성을 제공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창세기 2장과 3장의 통일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더하여 창세기 1장 1절-2장 4절 상반절까지의 창조 이야기와 둘째 창조 이야기는 지난 글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완전히 성격이 다른 출처이다. 첫째 창조 이야기가 고대 근동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둘째 창조 이야기는 초기 이스라엘의 신학적인 전통에 속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오해하는 둘째 창조 이야기

또한 둘째 창조 이야기에 들어가기 앞서 이 본문, 즉 창세기 2:4절 하반절부터 3장 24절까지 오해하고 있는 점 다섯 가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이 오해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이 본문은 문학이 아니라 교회 교리를 뒷받침 하는 증빙 구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오해는 많은 사람들이 이 본문이 성서 전체에 대해 결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았다. 그 뒤에 따라오는 다른 모든 이야기들의 전제를 이룬다고 이해해 왔다. 그러나 사실 이 본문은 매우 주변적인 본문이다. 구약성서는 이 둘째 창조 이야기에 대해 후속적인 언급을 분명하게 하지 않는다. 오직 에스겔서 28장만 이 둘째 창조 이야기와 연결점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신약성서의 경우, 바울이 저술한 로마서의 첫 장들에서 언급되고 있을 뿐인데, 이것이 중요하게 부각된 것은 중세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의 인간론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바울조차도 이 둘째 창조 이야기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는다. 즉, 성서는 이 둘째 창조 이야기의 전적인 지배를 받지 않는다.

▲ 바티칸 시스타나 성단에 있는 미켈란젤로가 그린 타락 ⓒGetty Image

두 번째는 오해는 이 둘째 이야기가 ‘타락’에 관한 것으로 다루어진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둘째 창조 이야기로부터 너무 벗어나 있다. 오히려 둘째 창조 이야기는 구약성서 안에 있는 다른 이야기들과 나란히 놓여질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 구약성서는 ‘타락’을 가정하고 이야기를 전개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명기 30:11-14은 사람들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다는 가정을 하고 있다. 또한 둘째 창조 이야기를 지나 창세기 전체를 살펴보더라도 사람의 가능성에 관한 일반적인 주장 같은 것이 없다. 만일 누군가 사람의 본성에 관한 비관적인 주장을 찾고자 한다면, 차라리 둘째 창조 이야기가 아니라 호세아, 예레미야, 에스겔 등에서 찾는 것이 빠르다.

세 번째 오해는 이 둘째 창조 이야기를 통해 악이 어떻게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는가를 찾으려고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구약성서는 이러한 추상적인 문제에 관심이 전혀 없다. 그리고 둘째 창조 이야기 자체가 악에 관해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 둘째 창조 이야기 어떤 부분도 뱀이 악의 원리를 대표하고 있다는 암시조차도 주지 않는다. 반면에 구약성서는 실존적인 요소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즉 기원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이보다는 오히려 신실한 응답과 효과적인 대응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성서는 악의 기원에 관해 이론적인 설명이 전혀 없다. 그리고 신정론(神正論) 문제가 제기되는 곳에서도 그 문제는 현대의 철학들처럼 사변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신앙과 관련되어 있다.

네 번째 오해는 세 번째 오해와 연관되어 어떤 기원을 설명하려는 시도인데, 죽음의 기원에 관한 설명으로 착각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가정은 죄와 죽음을 기계적으로 관련짓는 신약의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언급하자면 성서는 이러한 문제를 지속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죽음의 현실에 대해 매우 다양한 해답들이 제시되지만, 상당히 많은 경우 어떤 형태의 죽음은 징계이지만 죽은 그 자체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더욱이 둘째 창조 이야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둘째 창조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 누구도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둘째 창조 이야기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보다는 고통과 괴로움에 가득찬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점은 우리 인간의 삶의 정황에서나 둘째 창조 이야기의 세계에 있어서나 죽음보더 더 중요한 문제이다.

둘째 창조 이야기에 대한 마지막으로 언급해야 할 오해는 타락에 관한 일반적인 전통(‘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뱀’)은 이 둘째 창조 이야기가 성(性)에 관한 문제들과 성에 의해 생겨난 악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는 점이다. 이 둘째 창조 이야기 전(前)역사에 뱀을 남근(男根)의 상징으로 보는 입장이나, ‘선악을 안다’는 것을 성적인 지식으로 이해하는 입장이 있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실제로 둘째 창조 이야기에는 벌거벗음에 관한 언급이 등장하기도 한다(2:23, 3:7). 그러나 이 둘째 창조 이야기에서 성에 관한 강조점이나 성과 죄 사이의 관련성을 찾으려는 노력은 둘째 창조 이야기 자체를 넘어서는 것이다. 둘째 창조 이야기는 여남 양성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한에 있어서, 그 관심사는 힘과 통제력, 자율성 등 오히려 정치적인 역동성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성서도 잘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둘째 창조 이야기를 해석하는 원리는 무엇일까? 둘째 창조 이야기에 등장하는 죄/죽음/타락 등의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문제들에 대해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성서도 “잘 알지 못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성서는 만능 열쇠가 아니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이정훈 typology@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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