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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가 없을뿐 하나님은 침묵하지 않으신다

기사승인 2018.11.17  22: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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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기장이와 진흙덩이

남북 분단 이후로 지금처럼 한반도에서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이 하나 되어 폭발된 적이 없었다. 온 국민이 평화협정 열풍에 사로 잡혀 있다.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언론, 종교 단체들이 앞을 다투어 평화를 외치고 있다. 또한 우리의 평화를 위한 호소가 세계 시민사회에 공명되고 있으며 여론을 환기시키고 있다.

그러나 평화협정을 반대하는 국내외 세력도 만만하지 않다. 전쟁이 있어야 이익을 보는 집단, 갈등과 긴장이 있어야 존재 가치가 높아지는 자들 그리고 평화협정이 타결될 경우 기득권을 상실할 뿐 만 아니라 설 자리를 잃게 되는 무리들이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국가적으로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 평화협정을 방해하고 있다. 문제는 소수인 그들이 각계각층에서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혼신을 다해 평화협정을 이루고자하는 대통령의 행보가 눈물겹다. 한반도와 민족의 평화를 위한 다양한 집단의 다양한 노력들이 협력해서 협정의 쾌거가 속히 이루어지길 간절히 바란다.

우리의 평화에 대한 갈망이 부풀대로 부풀어서 만약에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타산과 정치적 농단으로 평화협정이 무산되거나 무기한 지연되게 되면 전 국민이 세월호 때 보다 더 심한 우울증과 절망, 분노에 빠지게 될 것 같다. 그리고 온 사회가 패배의식과 무력감으로 한동안 정체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두 번 다시 끔찍한 역사의 반동이 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며 평화협정을 위한 일에 작은 힘을 합하는 바이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토기장이 이신 하나님의 침묵이 무엇을 계시하는지!

휴전 후에 태어난 세대로서, 급변하는 시대를 지난하게 살아온 자로서 지금도 역사의 주관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고민과 고뇌를 하며 상심한다. 강대국의 폭력과 전쟁으로 얼룩진 근현대사를 보며 인류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인가? 사람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며 하나님께 묻지 않을 수 없다.

▲ 사람의 눈에는 모든 것이 헛되어 보이고 모래와 같지만 하나님은 그런 모든 것을 뛰어넘어 계신다. ⓒGetty Image

하나님이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심과 심판주이심을 의심할 나위 없이 믿는다. 그러나 역사의 주관자라는 고백은 세계사를 이끌어 온 전쟁과 폭력, 세상에 만연한 불의와 악의 현존 때문에 마음이 심히 불편하다. 만약에 하나님을 역사의 주관자라고 고백하면 세계 역사에 일어난 모든 불의와 악들, 전쟁과 살인, 약탈과 파괴 등등이 그 분의 예정과 섭리 가운데서, 묵인과 허락 하에서 일어난 일이므로 그 분에게 궁극적인 책임을 물어야 한다. 너무 혼란스럽다. 창조의 전 과정에서 아름답다고 감탄하신 하나님의 경륜이 피의 전쟁으로 얼룩진 인류사를 주관하셨다고 하면 그 모순과 괴리가 너무 크다. 그러나 나 같은 일개 피조물이 무엇을 알리요 하면서 겸손히 하나님을 역사의 주관자라고 고백한다 해도 강대국의 폭력과 학대로 죽어간 수많은 아시아 아프리카인들을 대신하여 침묵하시는 하나님과 시시비비를 가리고 싶은 심정이다.

나도 언젠가는 이사야처럼 “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이와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 또는 네가 만든 것이 그는 손이 없다 말할 수 있겠느냐”고 고백할 때가 올 것인지?

그렇다고 인간이 역사의 주관자라고 생각하면 참으로 암담하다

인간이 사회와 국가를 형성해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인간이 당연히 역사의 주관자다. 세상의 길흉화복, 흥망성쇠, 정치경제적 대사건을 힘을 가진 소수의 무리가 장악하고, 주장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을 진리를 신봉하는 제국주의 무리들, 강한 자, 강한 군대, 강한 권력이 역사를 이끌어 가면서 전쟁, 음모, 술수, 야합으로 약소국의 운명을 결정하며, 이웃 나라와 민족을 멸망시키거나 유지시키는 것을 멋대로 한다. 약소국이 자주, 자립, 자생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며 자기들 중심으로 세계의 정치와 경제의 판을 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힘 있는 자들의 소리와 선전에 세뇌되어 그들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믿으며 그렇게 기록한다. 강자와 강대국이 역사를 주도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약소국은 그들의보살핌과 그늘의 혜택으로 산다고.

당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우리 평화 협정의 문제만 보아도 우리 국민들 대부분이 열쇠를 쥐고 있는 강대국의 권력자를 역사의 주관자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이 역사의 주도권을 가지고 역사를 주도하는 것 같지만 영원한 나라가 없고 나라들에 흥망성쇠가 있는 것을 보면 딱히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나라들의 흥망이 꼭 전쟁에 기인된 것만은 아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손이 개입해서 약소국과 약자들, 자연과 기후, 우주만물을 재창조하며 보전해 가심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침묵

문제는 “하나님의 침묵”이다. 강포한 나라들의 폭력에 대한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부재처럼 보여지고, 느껴지므로 사람들은 계속해서 강자의 신화를 만들며 하나님이 없다고 말한다. 인간이 하나님을 만들어 냈을 뿐이라고 한다.

근대 이백 여 년 동안, 서구 백인들과 그 교회들은 하나님의 침묵을 오용하여 자신들의 전쟁과 약탈을 선으로 가장하며 오만방자했으나 결국에는 수천만의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며 스스로 몰락에 이르렀다. 아무리 인간이 하늘을 찌르는 기세로 욱일승천한다 해도 인간은 한낱 인간, 피조물에 불과할 뿐이다.

국가와 세계사 인류의 차원에서 “하나님의 침묵”에 대해서는 작은 머리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어서 악과 폭력의 승리에 대하여 자주 하나님께 이의제기를 하며 변론을 요청한다. 지금도 한반도의 평화문제를 주님께 아뢰며 고통과 불안을 토로하며 씨름하고 있다. 그러나 나의 개인사에 대한 하나님의 침묵에 대해서는 깊이 묵상하며 회개하며 깨달음을 얻었다.

선교했다는 죄목으로 인도에서 나온 이후로 지난 4년 동안 고통, 고독, 고뇌에 빠져서 시도 때도 없이 흐느껴 울었다. 나의 울음은 하나님의 침묵 때문에 더욱 서러웠다. 사람들은 쉬라는 하나님의 강권, 인도를 떠나서 새로운 장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계시, 영적 교만과 죄를 회개하라는 등등의 뜻으로 해석하면서 나에게 크고 작은 상처와 위로를 주었다. 그러나 나는 어떤 위로도 권면도 수용하고 싶지 않았고 어떤 해석도 용납할 수 없었다.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싶어서 맞장을 뜨는 심정으로 억울함을 호소하며 고통과 불안을 토로하였다.

세상사람 모두가 나를 지지하여도 하나님이 외면하면 아무것도 아니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외면해도 하나님 한 분이 붙잡아 주시면 흔들림 없이 가겠다는 기개와 믿음으로 산다고 살아온 당신의 종이 상처로 피를 줄줄 흘리는데도 주인 되신 하나님께서 입을 일체 열지 않으셨다. 나는 하나님의 침묵으로 영적 고독과 우울증에 빠졌다.

한국의 일자리를 접고 인도로 떠날 때, 북인도에서 남인도로 갈 때, 첸나이에서 라열라시마 데칸고원으로 갈 때, 희망발전소 건축을 시작할 때, 바이따뻬따 교회와 어린이 집을 시작할 때 꿈과 말씀, 환상과 계시로 자상하고 섬세하게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서 인도 국경 밖으로 내동댕이 처진 나에게 가타부타 말이 없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큰 충격이었다. 절정의 순간에서 일손을 놓고 쫓겨난 종의 아픔과 슬픔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하나님의 무관심과 침묵이 나를 고뇌하게 만들었다.

실컷 일을 부려먹고 쓸모가 없어지니 버린 것인가? 어느 사람의 말처럼 회개를 요구하시는가? 어느 사람의 조언대로 새로운 일자리를 준비하라는 것인가? 인사도 하지 못하고 두고 온 아이들과 센터의 사역들을 어쩌라는 것인가? 계속하라는 것인가? 아니면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기에 치욕과 수치를 당하게 하시는가? 형벌과 심판인가? 재앙인가? 아니면 축복이자 새 출발인가?

위기를 기회로 바꾸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침묵은 동일하건만 그 날 그날 나의 기분과 컨디션에 따라 사건이 다르게 보이고 해석이 극에서 극으로 치달았다. 나로서는 영적 갈등과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성서에 몰입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희망하였다. 사도행전 8장 1절을 읽으면서 눈이 조금 
열렸다.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와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말하는 말을 따르더라”

사도행전의 말씀은 나에게 불의하고 부당한 고난과 시련을 어떻게 이겨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은 자신들이 위기와 시련에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반응하였다. 중요한 것은 박해에 대한 그들의 독창적, 영적 반응이다. 그들은 유대교로 돌아가지 않았고 그렇다고 기독 신앙을 버리지도 않았다.

그들은 크리스천으로 살기 위하여 일터와 집을 버리고 유대와 사마리아와 모든 땅으로 흩어지는 것을 선택하였다. 그들은 핍박을 피해 그냥 마구 도망친 것이 아니고 그런 와중에도 두루 복음을 전하며 다녔다. 그들의 선택은 박해의 시기를 복음전파의 천재일우의 기회로 만들었고 기독교 새 역사의 위대한 장을 열었다.

그들은 박해라는 폭력과 악의 문제를 사색하며 좌절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의심하며 신앙적이고 신학적인 시시비비를 가리는 함정에 빠지지도 않았으며 끝내는 바울까지도 개종시키는 쾌거를 이루어 냈다.

말씀을 묵상하며 시대와 상황을 뛰어 넘은 초대교회 신앙의 대선배를 통하여 큰 위로를 받았다. 하나님께 이의를 제기하며 질문하기를 멈추고 대신에 선교현장에 대한 몇 가지 주문을 하였다. 그리고 덧붙여서 ‘만약에 응답해주시면  주님께서 저를 계속 써주신 다는 뜻으로 알고 여생을 온전히 드리겠고 그렇지 않으면 현장을 접고 쉬라는 뜻으로 알겠노라’고 말씀을 드렸다.

나는 없었지만, 늘 거기에 계셨던 하나님

절박한 심정으로 아뢴 주문은 ‘건축 후원금이 전달된 몇 개의 달리트 교회 건축이 순조롭게 완성되어 제 때에 완성되도록 축복해주시라는 것과 관련된 3개의 고아원 운영비를 매달매달 차질 없이 공급해 주시라는 것, 첸나이에 있는 희망발전소와 데칸고원 소읍 난퓻 위치한 희망공동체에 필요한 인적자원과 물적자원을 책임져주시라는 것과 기타 나의 필요’였다.

선교사가 현장에서 직접 섬기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4년 동안 현장의 일이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기적이다. 나는 하나님께 아뢰었기 때문에 진행하고 있던 사역을 하나도 포기하지 않고 “GO! GO!” 외치면서 무리수를 두었다. 그러나 현장을 떠나 있는 내가 인도 사역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도와 후원금 모금 뿐이었다. 사역 현장에 있지 않다는 이유로 억울한 소리도 듣고 일반 교회들의 선교에 대한 무관심과 불신 때문에 냉대도 받았지만 성령님께서 동행을 하셔서 많은 기적을 일으켜 주셨다. 현상 유지를 넘어서 새로운 사역을 시작할 수 있도록 축복해주셨고 인도에서 일어나는 홍수와 기타 구제, 네팔의 지진 구제 등등에 긴급대응 할 수 있는 능력과 힘을 주셨다. 나의 요청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차고 넘치도록 풍성하였고 섬세하였으며 아름다웠고 신비로웠다.

그러나 사람이란 격렬한 감동과 은혜의 시간, 하늘의 평화와 환희의 시간은 쉽게 잊어버리고 고통과 불편, 공포와 불안에 직면하면 마구 아우성치는 그런 존재다. 나 또한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해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감사와 찬양, 불평과 이의 제기를 번복하였다. 그러나 신실하신 하나님은 꾸짖지 아니하시고 치열한 나의 묵상과 기도, 질문에 구체적인 응답을 주시기 시작하셨다.

지난 9월 5일에 첸나이 희망발전소 건물을 마드라스크리스천칼리지에 기증하였고 10월 17일에는 희망발전소가 MCC한신호프센터로 개원하는 기념식이 있었다. 등기 이전으로 기증이 끝나고 개원식이 있기까지 한 달 반 동안 만감이 교차하면서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희망발전소가 세워지기까지 7년의 과정과 세워진 후 8년의 과정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작년 6월에 억장이 무너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후임으로 가신 이 목사님이 비자를 받지 못해서 부득불 다른 곳으로 떠나게 된 것이다. 국가 공권력 앞에서 그대로 당하기만 해야 하는 무력한 우리네 선교사가 한 없이 초라해 보였다. 비자를 받기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했던 이 목사님은 새로운 장으로 훨훨 떠났다. 희망발전소는 순식간에 주인 없는 빈집이 되었고 많은 문제들이 동시에 야기되었다. 관리인 부재로 말미암아 전기세가 몇 달이나 밀렸다는 고지를 받았을 때 가슴이 짜하게 아파왔다. 빈집이란 사실을 안 밤손님이 들어왔다가 이웃 사람의 기지로 달아났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외국인등록사무처 직원이 찾아와서 건물을 다시 조사했으며 몇 사람의 이름을 운운했다는 소식이 왔다. 희망발전소가 요시찰 대상이 되었으므로 앞으로는 누가 와도 위험하다는 말이 들렸다.

인도 밖에 있으면서 전기세, 물세, 전화세, 가옥세 등등을 제 때 납입하게 하는 것도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한 때는 영광스럽게 빛나며 귀하게 쓰임 받던 건물이 이제 아무도 찾지 않는 인적이 끊긴 집이 되었다는 사실이 나를 힘들게 만들었다. 성도들의 귀한 헌금이 낭비되어지고 건축을 하며 바친 기도와 눈물이 무의미해지고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 황폐해져서 세상의 놀림감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죄인의 심정이 되었다.

새로운 후임자를 찾을 능력도 없고, 사람을 찾아서 보낸들 건물 자체가 요시찰 대상이 되었으므로 사역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서자 넋이 빠졌다. 다시 쓴 뿌리가 올라와서 하나님 면전에서 불평을 쏟아내기 시작하였다.

제가 사용하지도 못할 건물을 왜 힘들게 짓게 하셔서 오늘날까지도 이런 고통을 당하게 하십니까? 후임자가 있다 해도 제가 운영비를 책임져야 하면 너무 힘듭니다. 왜 저는 떠난 후에도 많은 책임을 져야 합니까? 달리트 지도자 훈련원으로 세워진 건물이 지도자 훈련은커녕 건물 관리조차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언제까지 이런 문제에 매달려야 합니까? 부디 저를 건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십시오. 외국인등록관리사무처 직원들의 발걸음을 막아주시고 우리 건물이 인도정부의 감시대상에서 속히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다시 돌아가게 될지 못 돌아가게 될지 모르지만 희망발전소 건물 문제를 짊어지고 살기에는 너무 힘듭니다. 부디 속히 해결해주십시오 라고 무시로 아뢰었다.

전혀 길이 보이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비전아시아와 MCC, 한신대를 통하여 물꼬를 터주셨다. 무엇보다 건물이 본래의 목적대로 사용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주셨고 그에 적합한 일꾼도 파송해 주셨다. 이로서 희망발전소를 위해 바친 기도가 다 응답이 되었다.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를 위해서 함께 수고하며 물길을 만들어 준 모든 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할렐루야! 인도의 외국인 관리담당사무처는 나를 조사하고 내보냈지만 하나님은 내가 인도에 들어갈 수 없는 고통스런 상황을 이용하여 여러 명의 일꾼을 선교 현장으로 파송하셨다. 뿐 만 아니라 나로 하여금 핍박으로 흩어진 초대교회 선배들처럼 동부 아프리카 6개의 나라와 아시아 여러 나라들의 고난의 현장을 더 방문하게 하셨고 남은 삶을 더 치열하게 살 수 있는 길로 이끌어주셨다.

하나님은 4년의 지난한 과정 속에서 나의 영적인 교만과 독선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자신이 의롭다는 교만, 자신이 누구보다도 선하다는 독선, 자신의 순례자적인 삶에 대한 자부심, 초월적인 삶에 대한 우월감, 십자가를 지고 사는 종의 삶을 주인이 철저하게 지켜주고 보호해주어야 한다는 확신 등등으로 병들어 있었다.

나는 마치 욥처럼 하나님께 내가 당하는 고통의 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하라고 탄원하며 제소하였다. 나의 교만과 망상은 철저하게 순종하며 헌신적으로 살아온 종을 지켜주지 못한 주인을 비난하고 의심하였다. 의인을 핍박하는 인도를 가만히 버려두는 것도 불만이었다. 내가 수고하여 닦아 놓은 길을 편안히 가면서 감사할 줄 모르고 힘들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두는 것도 답답하였다. 선교현장을 적당히 섬기며 유유자적 취미생활 하는 사람을 나무라지 않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의 영적인 교만과 무지는 선교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충고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겉으로는 한 없이 겸허하며 자신을 만물의 찌꺼기처럼 낮추었지만 내 속 사람은 충성스런 종이란 미명으로 무례하고 방자해져 있었던 것이다.

4년 동안 나그네로 살며 다시 깨달은 가장 중요한 개념은 종에 대한 것이었다

종은 하나님의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을 위한 존재다. 종은 주인과 주인의 일을 위해서 존재하며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자로서 주인의 협력자다. 달란트의 비유에 나오는 종들처럼 주인의 유익을 위하여 순간순간 최선을 다할 권리와 의무가 있으며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다.

주인은 종이 일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며 책임지시며 축복하신다. 주인은 충성된 종에게 상을 베푸시는 자이며 종의 충성스러운 헌신을 받으신다. 종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신다. 주인은 종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며 자신의 뜻을 세상에 펼쳐 가신다.

종은 쓰임 받으면서 주인의 동산을 가꾸며 주인과 함께 동역하는 축복을 누린다. 세상살이에서 종이 받는 최고의 축복은 역설적이게도 십자가이다. 주인이 가장 사랑하며 신뢰하는 종에게 자신의 최고의 임무를 맡기시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만물과 만사에 때가 있으며 예외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때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에게는 힘든 때는 없을 것이며 좋은 때만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 였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닥쳐온 고난과 고통을 불의하고 부당하다고 간주하고 하나님께 하소연하며 원수를 갚아달라고 간청했던 것이다. 그러나 때는 남녀노소 빈부귀천, 선인과 악인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공평하며 누구에게나 온다.

선한 일도 시작할 때와 끝날 때가 있다. 희생과 헌신도 뽑힐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다. 사랑도 할 때가 있고 끝날 때가 있다. 마찬가지로 선교도 시작할 때가 있고 멈추어야할 때가 있다. 사역도 열매를 맺을 때가 있고 뽑힐 때가 있다. 종도 십자가를 질 때가 있고 내려놓아야할 때가 있다. 고아도 보살필 때가 있고 멀리 내칠 때가 있다.

인간이 하는 일은 그 어떤 선한 일도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의로운 일도, 헌신도, 희생도, 사랑도, 봉사도, 수고도, 나눔도, 섬김도 영원히 계속되지 않는다. 자신이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결코 중단되어서는 안 되고, 중단되지 않을 것이라는 신념은 좋으나 지극히 위험하다. 인간의 일은 전후좌우 상황과 여러 조건의 지배를 받으며 때가 가고 온다. 그 속에서 생성, 성장, 사멸한다. 그리고 다시 새 일이 시작된다.

교만한 인간들은 아무리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어도 자신은 예외적인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독선과 교만으로 독재자가 되고, 폭군이 되고, 영웅이 되고, 우상이 되고, 거짓 신이 되어 세상에 재앙과 저주와 고통을 가져온다. 지혜로운 인간은 때를 알며 하나님과 세상과 역사 앞에서 물러설 줄 안다.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하고 때를 얻거나 못 얻거나, 때가 좋거나 나쁘거나 주님과 동행한다.

세 번째는 아무리 부정하여도 인간은 주님께서 손수 빚으신 진흙 그릇이라는 사실이다. 신적 권위든 정치적 권위든 간에 권위를 수상하게 생각하고 싫어하는 현대인들에게 사람이 하나님의 손으로 빚어진 피조물이라고 말하면 곧 바로 반격과 조롱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이 토기장이시며 사람은 진흙으로 그 손에서 빚어진 그릇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있듯이 하나님도 사람을 그렇게 만드실 수 있다. 평등 세상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귀하다 천하다는 말에 알레르기적인 반응을 하는데 성서가 말하는 귀하고 천하다는 것은 가치나 품질의 문제가 아니고 용도의 문제 불과할 뿐이다. 권위가 인정되지 않는 시대의 흐름에 젖어서 나도 모르게 주님이 토기장이라는 사실과 귀한 그릇과 보통 그릇을 자신의 경륜으로 만드시는 분이란 사실을 잊었다.

토기장이가 그릇을 빚는 것은 쓰기 위해서다. 그릇은 쓰임을 받을 뿐이다. 그릇이 잘 나서 스스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수고하며 헌신하는 것이 아니다. 그릇이 자신의 능력, 지식, 지혜와 신념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써주시는 것이다. 은혜로 쓰임 받는 자는 겸손히 종이 할 일을 다 하였을 뿐입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을 뿐이다. 쓰임 받는 자는 공치사를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토기장이에게서 나와서 그에게로 돌아감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감히 종으로서 주인에게 머리를 치받으며 철부지 아이처럼 공치사를 했다.

“제가 당신을 자녀들을 위하여 죽도록 수고했는데 쫓겨나는 수치를 당하게 하시다니요!”
“아니 제가 어떤 종인지 당신께서 아시면서도 저를 게으른 종들과 같이 취급을 하시다니요!”
“당신께만 희망을 두고 사는 저를 사람들 속에서 거지가 되게 하시다니요!”

이렇듯 영적교만과 피해의식과 공로의식에 찌들어 있는 나를 하나님께서 4년 세월에 걸쳐서 청소를 해주셨다.

할렐루야! 나의 생명을 빚으신 분, 당신의 일터로 초청해서 써주신 분, 나의 고통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심신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켜주신 분, 나의 수고가 헛되지 않도록 지금도 현장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주시는 분, 주인의 음성을 듣고자  방황하며 헤매는 나를 회개와 성찰의 길로 인도해주신 분, 나의 의문과 시시비비를 다 들어주시되 야단을 치지 아니 하시는 분, 당신에 대한 나의 불만을 묵묵히 들어주시는 분께 더욱 충성하며 순종하기로 다짐한다. 남은 생명의 시간에도 그에 맞게 써주시라고 넙죽 엎드린다.

인도에 두고 온 일들과 아이들로 말미암아 눈물로 밥을 삼고 분노하며 탄식했던 시간들이 오히려 나의 영적인 교만과 무지를 나를 회개하며 치유하는 길로 인도하여 주었다. 4년의 긴 방황이 끝났다. 모든 것이 합동해서 유익하고 협력해서 선을 이룸을 믿는다. 이제 주님께서 주시는 곳에 작은 둥지를 틀어야겠다.

인류 역사에 대한 그리고 한반도 평화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침묵”이 아프다. 인간이 감히 하나님의 침묵을 이해하고 깨닫기란 쉽지 않지만 호기심이 많은 순진무구한 아이처럼 문제를 하나님께 여쭙고 또 아뢰며 풀어야겠다.

이이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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